반평생

        프리드리히 횔덜린




노랗게 익은 배와

거친 장미들이 가득 달린,

호수로 향한 땅,

너희 고결한 백조들,

입맞춤에 취한 채

차가운 물에 성스럽게

머리를 담근다.



슬프도다, 겨울이면, 나는

어디서 꽃을 얻고, 어디서

햇빛과 지상의 그림자를

얻게 될까?

장벽들은 말없이

차갑게 서 있고, 바람결에

풍향계 소리만 덜걱거린다.



프리드리히 횔덜린(1770~1843)이 서른세 살 무렵에 쓴 시다. 잘 익은 배와 장미, 고결한 백조가 등장하지만 시 전편에 흐르는 정조는 쓸쓸하고 비극적이다. 무슨 사연이 있었을까. 그 배경에는 안타까운 러브 스토리가 깔려 있다.

그녀의 이름은 주제테 콘타르트. 그가 스물여섯 살 때 가정교사로 들어갔던 은행가 콘타르트의 부인이다. 그는 온화하고 기품 있는 그녀에게서 그리스적인 아름다움과 조화의 화신을 발견했다. 그녀도 그의 맑은 심성에 마음이 끌렸다. 그는 그녀를 디오티마(Diotima)라고 불렀고, ‘디오티마’ ‘디오티마를 애도하는 메논의 탄식’ 같은 작품까지 썼다.

소설 《히페리온》에서는 부인에게 디오티마라는 이름을 붙여주기도 했다. 디오티마는 플라톤의 《향연(饗宴)》에서 에로스를 예찬하는 여제사장. 올바른 연애 과정은 육체의 아름다움에서 영혼의 아름다움으로, 나아가 아름다움 그 자체의 관조에까지 도달하는 것이라고 설파한 주인공이다.

두 사람은 멀리 떨어져 있는 동안에도 짧은 밀회를 즐기며 편지를 자주 교환했다. 그러나 가정교사와 안주인의 사랑은 오래가지 못했다. 몇 년간의 간헐적인 이별 끝에 그녀는 병을 얻었고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녀의 마지막 편지에서 병과 죽음을 예감한 그의 마음은 찢어지는 듯했으나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녀의 죽음 이후 그는 평생을 정신착란으로 비틀댔다.

그런 점에서 ‘반평생’이라는 작품은 그가 꿈꾸던 여인과의 사랑이 사별로 끝나고, 정신병자로서의 후반생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탄생한 비가(悲歌)라 할 수 있다. 비련의 아픔뿐만 아니라 세상의 밝음과 어둠, 생성과 소멸, 생의 이쪽과 저쪽을 대조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이기도 하다. 두 연으로 나눈 구성처럼 그의 일생을 양분하는 이미지까지 곁들여져 있으니 더욱 그렇다.

독일 슈바벤의 네카 강변 작은 도시 라우펜에서 태어난 그의 삶은 유년기부터 평탄하지 않았다. 수도원 관리인이던 아버지는 그가 두 살 때 돌아가셨고, 양아버지 또한 그가 아홉 살 되던 해 세상을 떴다.

집안 형편이 어려운 그는 수도원 학교를 겨우 졸업하고 튀빙겐대학 신학부에 장학생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어머니의 바람인 신학 공부보다는 고전 그리스어, 철학, 시 창작에 몰두했고 헤겔이나 셸링 등의 학우들과 교류하는 데 열중했다.

졸업 후 가정교사가 된 뒤 주제테와의 사랑으로 한때 활력을 찾았으나 그마저 비극으로 끝나자 그는 온갖 데를 방랑하며 다녔다. 30대 후반에는 거의 폐인이 돼 튀빙겐대학병원에 입원했다. 다행히 그를 숭배하는 목수의 보살핌으로 네카 강변의 집에서 살다 73세에 숨을 거뒀다.

그가 후반생을 보낸 강변의 집 ‘횔덜린 탑’은 그의 묘지, 비명(碑銘)과 함께 튀빙겐의 상징물이 돼 세계 각국 순례객을 맞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