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시] 늦게 온 소포를 받고 밤새 잠들지 못한 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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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게 온 소포
밤에 온 소포를 받고 문 닫지 못한다.
서투른 글씨로 동여맨 겹겹의 매듭마다
주름진 손마디 한데 묶여 도착한
어머님 겨울 안부, 남쪽 섬 먼 길을
해풍도 마르지 않고 바삐 왔구나.
울타리 없는 곳에 혼자 남아
빈 지붕만 지키는 쓸쓸함
두터운 마분지에 싸고 또 싸서
속엣것보다 포장 더 무겁게 담아 보낸
소포 끈 찬찬히 풀다보면 낯선 서울살이
찌든 생활의 겉꺼풀들도 하나씩 벗겨지고
오래된 장갑 버선 한 짝
해진 내의까지 감기고 얽힌 무명실줄 따라
펼쳐지더니 드디어 한지더미 속에서 놀란 듯
얼굴 내미는 남해산 유자 아홉 개.
“큰 집 뒤따메 올 유자가 잘 댔다고 몃 개 따서
너어 보내니 춥울 때 다려 먹거라. 고생 만앗지야
봄 볕치 풀리믄 또 조흔 일도 안 잇것나. 사람이
다 지 아래를 보고 사는 거라 어렵더라도 참고
반다시 몸만 성키 추스리라”
헤쳐 놓았던 몇 겹의 종이
다시 접었다 펼쳤다 밤새
남향의 문 닫지 못하고
무연히 콧등 시큰거려 내다본 밖으로
새벽 눈발이 하얗게 손 흔들며
글썽글썽 녹고 있다.
벌써 20년이나 됐다. 그날 밤 우여곡절 끝에 늦은 소포를 받고 한참동안 멍하게 앉아 있었다. 글씨로 봐서 어머니가 보내신 거라는 건 금방 알 수 있었다. 미리 전화도 없었는데 불쑥 소포 꾸러미가 도착하다니…
겉포장을 뜯는 데만 한참 걸렸다. 꽃게 등짝 같은 마분지를 벗겨내니 닳고 닳은 내의가 드러났다. 그걸 벗겼더니 또 낡은 버선이며 장갑 같은 것들이 나타났다. 그렇게 몇 차례 포장을 벗겨내고 보니 아, 그 안에서 쏘옥 알몸을 드러내는 녀석들이란…. 혹시라도 으깨지거나 상할까봐 단술단지 싸듯 아듬고 보듬어서 보낸 남해산 유자 아홉 개였다. 풀어헤쳐 놓은 포장지 더미를 내려다보며 할 말을 잃었다.
훈장집 딸로 태어난 어머니는 그나마 어깨너머로 글을 배우셨다. 한문도 조금 깨쳤고 어른들이 다 저 세상으로 가신 뒤, 열세 살 때의 어느 날에는 직접 제문을 지으시기도 했다. 그렇지만 자고 나면 바뀌는 한글문법을 제때 따라잡지 못해 편지를 쓰거나 누구네 생일날을 기록할 때는 맞춤법이 제대로 맞지 않았다. 그걸 보고 내가 빙긋거리면 ‘반편이 글’이라도 모르는 것보다는 백 번 낫다며 퉁을 주곤 했다.
편지 속의 맞춤법은 자유자재였다. 그러나 어중간한 글쟁이보다 더 선명하고 사려 깊은 표현이 담겨 있었다. 말하자면 주제가 뚜렷한 글이었다. 눈뜨고도 코 베인다는 서울에서 그래 고생 많지, 우짜겠노 성심껏 살면 괜찮을 거다, 다른 건 몰라도 건강을 꼭 챙겨야 한다, 그런 내용인데 이건 꼭 틀린 맞춤법 그대로 읽어야 어감이 온전하게 전해진다.
그런데 왜 하필 유자란 말인가. 별스럽지도 않은 과실 몇 개 보내면서 그토록 금이야 옥이야 싸서 보내는 마음이 따로 있긴 하다.
내 고향 남해에서 가장 정감 있는 것을 들라면 두 말 않고 유자를 꼽는다. 알다시피 남해는 섬이다. 농사도 변변치 않고 무슨 장사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섬사람들은 나름대로 호구책을 따로 마련할 수밖에 없다. 바다에 나가 고기잡이하는 것도 배가 있어야 하니 언감생심 꿈도 꾸기 어렵다. 하다못해 갯벌에서 조개를 줍거나 미역을 따거나 해서 한 푼이라도 돈을 사야 아이들 공부를 시킬 수 있었다. 지금이야 규모 있는 어장도 생기고 양식장이니 양어장이니 해서 나아졌지만 이전에는 참으로 곤궁했다.
유자가 남해의 특산품으로 유명해진 것도 이런 궁핍한 환경 때문이었을 것이다. 워낙 배고픈 지경에서 그나마 도드라져 보이는 ‘돈 나무’였기에 사람들의 심중에 특별한 의미로 새겨졌을 것이다. 물론 자연환경이나 기후 토양 등도 작용했다. 차갑고 억센 바닷바람 또한 유자를 잘 영글게 하는 요인일 것이다.
유자는 남부 해안지방에서만 자란다. 그 중에서도 남해 유자는 유독 성장이 느려 묘목을 심어놓고도 오랫동안 기다려야 과실을 볼 수 있다. 그래서 향기가 진하다. 집 뒤안이나 담장 너머에서 황금빛으로 타오르는 유자는 남해의 가을 풍경을 상징하는 진경이다.
요즘엔 남해 마늘과 남해 멸치가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유자보다 마늘과 멸치가 실생활에 더 가까운 탓이겠지만 나는 그런 것들보다 유자에 대해 특별한 정감을 갖고 있다. 향기나 유명세 같은 것보다 그 성장과정이 남다르고 의미 또한 각별하기 때문이다.
한때는 유자나무 몇 그루만 있어도 아이들을 대학에 보낼 수 있다고 해서 ‘대학나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런데 우리 집에는 그 대학나무가 한그루도 없었다. 북간도부터 시작해서 오랫동안 객지로 떠돌다 병을 얻은 아버지가 우리 식구를 이끌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기에 궁색하기 그지없었다. 게다가 하루라도 몸이 편한 날이 없었다.
우연히 남해 금산 절에 갔던 어머니가 ‘날아갈 듯한 컨디션’으로 건강을 회복한 뒤 우리 식구는 모두 절로 삶터를 옮겼고 나는 절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마쳤다. 아버지는 내가 중학교에 입학한 그해 돌아가셨다. 객지에서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혼자 다니는 동안 절집에서 ‘중도 소도 아닌’ 어머니가 겪었을 마음고생은 철이 든 뒤에도 미처 헤아리지 못할 만큼 컸으리라. 어릴 때부터 남들과 다른 환경에서 어렵게 키운 아들에게 어머니는 늘 죄스런 마음을 갖고 있었다고 어느 해 아버지 제삿날 한 번 속내를 비친 적이 있다. 그런 어머니에게 늠름한 유자나무, 대학나무의 위용은 얼마나 부러운 것이었을까.
내가 객지 공부를 시작한 뒤 본격적으로 불경 공부에 몰두하던 어머니는 몇 년 뒤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셨다. 이미 속세를 떠난 사람이 속가의 아들에게 사사로이 보낸 소포와 편지. 그러니까 위태로운 사회 초년병 시절, 서울살이의 곤궁한 이랑밭에서 막 자리를 잡기 위해 아등바등하던 20년 전 그 때, 어머니가 큰집에서 얻은 유자 아홉 개를 그토록 귀하게 싸서 서울로 보낸 사연은 내게 삶의 한 상징이자 은유로 깊숙이 각인돼 있다.
그렇게 해서 어머니는 내게 오래도록 품에서 떠나지 않는 시 한편을 낳게 해 주셨다. 그게 바로 이 시 ‘늦게 온 소포’다.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셨지만 아직도 내 곁에 현재형으로 살아 계시며 한 편 한 편 살아있는 시를 쓰라고 등을 다독거려 주신다. 유자껍질처럼 우둘투둘하지만 한없이 따뜻한 그 손으로 향기 깊고 여운이 오래 남는 글을 쓰라고.
고두현
밤에 온 소포를 받고 문 닫지 못한다.
서투른 글씨로 동여맨 겹겹의 매듭마다
주름진 손마디 한데 묶여 도착한
어머님 겨울 안부, 남쪽 섬 먼 길을
해풍도 마르지 않고 바삐 왔구나.
울타리 없는 곳에 혼자 남아
빈 지붕만 지키는 쓸쓸함
두터운 마분지에 싸고 또 싸서
속엣것보다 포장 더 무겁게 담아 보낸
소포 끈 찬찬히 풀다보면 낯선 서울살이
찌든 생활의 겉꺼풀들도 하나씩 벗겨지고
오래된 장갑 버선 한 짝
해진 내의까지 감기고 얽힌 무명실줄 따라
펼쳐지더니 드디어 한지더미 속에서 놀란 듯
얼굴 내미는 남해산 유자 아홉 개.
“큰 집 뒤따메 올 유자가 잘 댔다고 몃 개 따서
너어 보내니 춥울 때 다려 먹거라. 고생 만앗지야
봄 볕치 풀리믄 또 조흔 일도 안 잇것나. 사람이
다 지 아래를 보고 사는 거라 어렵더라도 참고
반다시 몸만 성키 추스리라”
헤쳐 놓았던 몇 겹의 종이
다시 접었다 펼쳤다 밤새
남향의 문 닫지 못하고
무연히 콧등 시큰거려 내다본 밖으로
새벽 눈발이 하얗게 손 흔들며
글썽글썽 녹고 있다.
벌써 20년이나 됐다. 그날 밤 우여곡절 끝에 늦은 소포를 받고 한참동안 멍하게 앉아 있었다. 글씨로 봐서 어머니가 보내신 거라는 건 금방 알 수 있었다. 미리 전화도 없었는데 불쑥 소포 꾸러미가 도착하다니…
겉포장을 뜯는 데만 한참 걸렸다. 꽃게 등짝 같은 마분지를 벗겨내니 닳고 닳은 내의가 드러났다. 그걸 벗겼더니 또 낡은 버선이며 장갑 같은 것들이 나타났다. 그렇게 몇 차례 포장을 벗겨내고 보니 아, 그 안에서 쏘옥 알몸을 드러내는 녀석들이란…. 혹시라도 으깨지거나 상할까봐 단술단지 싸듯 아듬고 보듬어서 보낸 남해산 유자 아홉 개였다. 풀어헤쳐 놓은 포장지 더미를 내려다보며 할 말을 잃었다.
훈장집 딸로 태어난 어머니는 그나마 어깨너머로 글을 배우셨다. 한문도 조금 깨쳤고 어른들이 다 저 세상으로 가신 뒤, 열세 살 때의 어느 날에는 직접 제문을 지으시기도 했다. 그렇지만 자고 나면 바뀌는 한글문법을 제때 따라잡지 못해 편지를 쓰거나 누구네 생일날을 기록할 때는 맞춤법이 제대로 맞지 않았다. 그걸 보고 내가 빙긋거리면 ‘반편이 글’이라도 모르는 것보다는 백 번 낫다며 퉁을 주곤 했다.
편지 속의 맞춤법은 자유자재였다. 그러나 어중간한 글쟁이보다 더 선명하고 사려 깊은 표현이 담겨 있었다. 말하자면 주제가 뚜렷한 글이었다. 눈뜨고도 코 베인다는 서울에서 그래 고생 많지, 우짜겠노 성심껏 살면 괜찮을 거다, 다른 건 몰라도 건강을 꼭 챙겨야 한다, 그런 내용인데 이건 꼭 틀린 맞춤법 그대로 읽어야 어감이 온전하게 전해진다.
그런데 왜 하필 유자란 말인가. 별스럽지도 않은 과실 몇 개 보내면서 그토록 금이야 옥이야 싸서 보내는 마음이 따로 있긴 하다.
내 고향 남해에서 가장 정감 있는 것을 들라면 두 말 않고 유자를 꼽는다. 알다시피 남해는 섬이다. 농사도 변변치 않고 무슨 장사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섬사람들은 나름대로 호구책을 따로 마련할 수밖에 없다. 바다에 나가 고기잡이하는 것도 배가 있어야 하니 언감생심 꿈도 꾸기 어렵다. 하다못해 갯벌에서 조개를 줍거나 미역을 따거나 해서 한 푼이라도 돈을 사야 아이들 공부를 시킬 수 있었다. 지금이야 규모 있는 어장도 생기고 양식장이니 양어장이니 해서 나아졌지만 이전에는 참으로 곤궁했다.
유자가 남해의 특산품으로 유명해진 것도 이런 궁핍한 환경 때문이었을 것이다. 워낙 배고픈 지경에서 그나마 도드라져 보이는 ‘돈 나무’였기에 사람들의 심중에 특별한 의미로 새겨졌을 것이다. 물론 자연환경이나 기후 토양 등도 작용했다. 차갑고 억센 바닷바람 또한 유자를 잘 영글게 하는 요인일 것이다.
유자는 남부 해안지방에서만 자란다. 그 중에서도 남해 유자는 유독 성장이 느려 묘목을 심어놓고도 오랫동안 기다려야 과실을 볼 수 있다. 그래서 향기가 진하다. 집 뒤안이나 담장 너머에서 황금빛으로 타오르는 유자는 남해의 가을 풍경을 상징하는 진경이다.
요즘엔 남해 마늘과 남해 멸치가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유자보다 마늘과 멸치가 실생활에 더 가까운 탓이겠지만 나는 그런 것들보다 유자에 대해 특별한 정감을 갖고 있다. 향기나 유명세 같은 것보다 그 성장과정이 남다르고 의미 또한 각별하기 때문이다.
한때는 유자나무 몇 그루만 있어도 아이들을 대학에 보낼 수 있다고 해서 ‘대학나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런데 우리 집에는 그 대학나무가 한그루도 없었다. 북간도부터 시작해서 오랫동안 객지로 떠돌다 병을 얻은 아버지가 우리 식구를 이끌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기에 궁색하기 그지없었다. 게다가 하루라도 몸이 편한 날이 없었다.
우연히 남해 금산 절에 갔던 어머니가 ‘날아갈 듯한 컨디션’으로 건강을 회복한 뒤 우리 식구는 모두 절로 삶터를 옮겼고 나는 절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마쳤다. 아버지는 내가 중학교에 입학한 그해 돌아가셨다. 객지에서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혼자 다니는 동안 절집에서 ‘중도 소도 아닌’ 어머니가 겪었을 마음고생은 철이 든 뒤에도 미처 헤아리지 못할 만큼 컸으리라. 어릴 때부터 남들과 다른 환경에서 어렵게 키운 아들에게 어머니는 늘 죄스런 마음을 갖고 있었다고 어느 해 아버지 제삿날 한 번 속내를 비친 적이 있다. 그런 어머니에게 늠름한 유자나무, 대학나무의 위용은 얼마나 부러운 것이었을까.
내가 객지 공부를 시작한 뒤 본격적으로 불경 공부에 몰두하던 어머니는 몇 년 뒤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셨다. 이미 속세를 떠난 사람이 속가의 아들에게 사사로이 보낸 소포와 편지. 그러니까 위태로운 사회 초년병 시절, 서울살이의 곤궁한 이랑밭에서 막 자리를 잡기 위해 아등바등하던 20년 전 그 때, 어머니가 큰집에서 얻은 유자 아홉 개를 그토록 귀하게 싸서 서울로 보낸 사연은 내게 삶의 한 상징이자 은유로 깊숙이 각인돼 있다.
그렇게 해서 어머니는 내게 오래도록 품에서 떠나지 않는 시 한편을 낳게 해 주셨다. 그게 바로 이 시 ‘늦게 온 소포’다.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셨지만 아직도 내 곁에 현재형으로 살아 계시며 한 편 한 편 살아있는 시를 쓰라고 등을 다독거려 주신다. 유자껍질처럼 우둘투둘하지만 한없이 따뜻한 그 손으로 향기 깊고 여운이 오래 남는 글을 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