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시] 최승희를 사랑한 영랑이 목매 죽으려 했던 나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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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이 피기까지는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시인 김영랑(1903~1950)의 생가가 있는 전남 강진. 거리 곳곳에 그의 시 구절을 딴 모랑공원, 모란상회, 모란미용실 등이 보인다. 영랑사진관과 영랑다방, 영랑화랑도 있다. 컴퓨터 가게 간판에도 시인의 이름이 붙어 있다.
군청 옆길로 걸어 올라가니 고즈넉한 초가집이 눈에 들어온다. 그의 옛집이다. 안채에 딸린 마당의 장독대도 정겨운 풍경이다. 해마다 초여름이면 마당 한 구석에 모란이 피어나는 곳. 진한 모란 향기가 그의 시비를 감싸는 모습이 그림 같다.
툇마루에 걸터앉아 그의 시집을 펼친다. 가는 길에 읽다가 접어두었던 ‘모란이 피기까지는’이 눈에 먼저 들어온다. 꽃이 피기까지의 기다림과 낙화한 뒤의 절망감을 반복적인 리듬으로 노래한 시. 기다림이 무산된 순간의 절망을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뚝뚝 떨어지는 모란에 빗댄 그의 마음은 어땠을까. ‘삼백예순날 하냥 섭섭해’ 울면서 그토록 기다린 ‘찬란한 슬픔의 봄’은 또 무슨 의미일까.
그의 ‘찬란한 슬픔’은 젊은 날 이루지 못한 사랑의 비극에서 비롯됐다. 상대는 훗날 한국 최고 춤꾼으로 이름을 날린 무용가 최승희다.
최승희는 작가 최승일의 여동생이다. 영랑은 14세에 일찍 결혼했으나 1년 만에 상처하고, 서울 휘문의숙(徽文義塾, 지금의 휘문고)에 다니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거기에서 최승일을 사귀었다. 관동대지진 여파로 유학생활을 접고 귀국한 뒤 서울 나들이 때마다 최승일의 집에서 유숙했다. 그때 자연스럽게 최승희를 만났다. 최승희가 숙명여학교 2학년이었으니 14세밖에 안 됐지만 뛰어난 미모에 내면도 꽤나 성숙했다. 당시 영랑은 22세였다.
오빠 친구인 영랑의 시적인 감수성에 최승희의 마음도 흔들렸다. 둘 사이는 마침내 결혼을 약속할 정도까지 발전했다. 그러나 두 집안은 이들의 사랑을 허락하지 않았다. 영랑의 집안에서는 “그런 경성의 신여성은 우리 가문에 필요 없다”며 손사래를 쳤고, 최승희 집안에서는 영랑의 지방색을 들어 반대했다.
1년간의 줄다리기 끝에 상심한 영랑은 뒤란 대나무숲 동백나무에 목을 매고 자살을 시도하다가 발각됐다. 영랑 생가에 장독대 쪽으로 가지를 길게 늘어뜨린 나무가 바로 그 나무다.
봄날의 풋사랑 같은 이 사연을 뒤로 하고 최승희는 일본으로 건너가 당대 최고 무용가의 길을 걸었고, 영랑은 그 빈자리를 시로 채웠다. ‘찬란한 슬픔의 봄’은 해마다 그의 가슴을 아리게 했다.
그는 모란이 피는 5월이면 좋아하는 술도 끊고 노래도 멀리하면서 모란 옆을 지켰다. 가장 화려하게 피어나는 꽃을 보면서 그 진한 향기만큼 깊은 슬픔을 혼자 견디는 모습이 애잔하다. 그는 집 뜰에 300여 그루의 모란을 심어 정성껏 가꾸었다.
1930년 박용철과 함께 《시문학》지를 창간하면서 순수시의 시대를 연 영랑은 이후 20여 년간 향토적이고 미학적인 시를 잇달아 발표한 뒤 9·28 서울 수복 때 포탄 파편에 맞아 삶을 마감했다.
지금도 모란이 필 무렵이면 그의 생가에 사람들이 몰린다. 초가을엔 마당가 장독대 앞에서 ‘오-매 단풍 들것네’를 읊조리며 시향에 젖는 독자도 많다. 그 속에서 최승희와의 안타까운 사연을 되새기며 젊은 날의 영랑을 떠올리는 사람 또한 만날 수 있다.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시인 김영랑(1903~1950)의 생가가 있는 전남 강진. 거리 곳곳에 그의 시 구절을 딴 모랑공원, 모란상회, 모란미용실 등이 보인다. 영랑사진관과 영랑다방, 영랑화랑도 있다. 컴퓨터 가게 간판에도 시인의 이름이 붙어 있다.
군청 옆길로 걸어 올라가니 고즈넉한 초가집이 눈에 들어온다. 그의 옛집이다. 안채에 딸린 마당의 장독대도 정겨운 풍경이다. 해마다 초여름이면 마당 한 구석에 모란이 피어나는 곳. 진한 모란 향기가 그의 시비를 감싸는 모습이 그림 같다.
툇마루에 걸터앉아 그의 시집을 펼친다. 가는 길에 읽다가 접어두었던 ‘모란이 피기까지는’이 눈에 먼저 들어온다. 꽃이 피기까지의 기다림과 낙화한 뒤의 절망감을 반복적인 리듬으로 노래한 시. 기다림이 무산된 순간의 절망을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뚝뚝 떨어지는 모란에 빗댄 그의 마음은 어땠을까. ‘삼백예순날 하냥 섭섭해’ 울면서 그토록 기다린 ‘찬란한 슬픔의 봄’은 또 무슨 의미일까.
그의 ‘찬란한 슬픔’은 젊은 날 이루지 못한 사랑의 비극에서 비롯됐다. 상대는 훗날 한국 최고 춤꾼으로 이름을 날린 무용가 최승희다.
최승희는 작가 최승일의 여동생이다. 영랑은 14세에 일찍 결혼했으나 1년 만에 상처하고, 서울 휘문의숙(徽文義塾, 지금의 휘문고)에 다니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거기에서 최승일을 사귀었다. 관동대지진 여파로 유학생활을 접고 귀국한 뒤 서울 나들이 때마다 최승일의 집에서 유숙했다. 그때 자연스럽게 최승희를 만났다. 최승희가 숙명여학교 2학년이었으니 14세밖에 안 됐지만 뛰어난 미모에 내면도 꽤나 성숙했다. 당시 영랑은 22세였다.
오빠 친구인 영랑의 시적인 감수성에 최승희의 마음도 흔들렸다. 둘 사이는 마침내 결혼을 약속할 정도까지 발전했다. 그러나 두 집안은 이들의 사랑을 허락하지 않았다. 영랑의 집안에서는 “그런 경성의 신여성은 우리 가문에 필요 없다”며 손사래를 쳤고, 최승희 집안에서는 영랑의 지방색을 들어 반대했다.
1년간의 줄다리기 끝에 상심한 영랑은 뒤란 대나무숲 동백나무에 목을 매고 자살을 시도하다가 발각됐다. 영랑 생가에 장독대 쪽으로 가지를 길게 늘어뜨린 나무가 바로 그 나무다.
봄날의 풋사랑 같은 이 사연을 뒤로 하고 최승희는 일본으로 건너가 당대 최고 무용가의 길을 걸었고, 영랑은 그 빈자리를 시로 채웠다. ‘찬란한 슬픔의 봄’은 해마다 그의 가슴을 아리게 했다.
그는 모란이 피는 5월이면 좋아하는 술도 끊고 노래도 멀리하면서 모란 옆을 지켰다. 가장 화려하게 피어나는 꽃을 보면서 그 진한 향기만큼 깊은 슬픔을 혼자 견디는 모습이 애잔하다. 그는 집 뜰에 300여 그루의 모란을 심어 정성껏 가꾸었다.
1930년 박용철과 함께 《시문학》지를 창간하면서 순수시의 시대를 연 영랑은 이후 20여 년간 향토적이고 미학적인 시를 잇달아 발표한 뒤 9·28 서울 수복 때 포탄 파편에 맞아 삶을 마감했다.
지금도 모란이 필 무렵이면 그의 생가에 사람들이 몰린다. 초가을엔 마당가 장독대 앞에서 ‘오-매 단풍 들것네’를 읊조리며 시향에 젖는 독자도 많다. 그 속에서 최승희와의 안타까운 사연을 되새기며 젊은 날의 영랑을 떠올리는 사람 또한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