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시] 물메기국 넘어가는 소리에 목이 메던 풍경이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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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빈 밥상
정독도서관 회화나무
가지 끝에 까치집 하나
삼십 년 전에도 그랬지
남해 금산 보리암 아래
토담집 까치둥지
어머니는 일하러 가고
집에 남은 아버지 물메기국 끓이셨지
겨우내 몸 말린 메기들 꼬득꼬득 맛 좋지만
밍밍한 껍질이 싫어 오물오물 눈치 보다
그릇 아래 슬그머니 뱉어 놓곤 했는데
잠깐씩 한눈팔 때 감쪽같이 없어졌지
얘야 어른 되면 껍질이 더 좋단다
맑은 물에 통무 한쪽
속 다 비치는 국그릇 행구며
평생 겉돌다 온 메기 껍질처럼
몸보다 마음 더 불편했을 아버지
나무 아래 둥그렇게 앉은 밥상
간간이 숟가락 사이로 먼 바다 소리 왔다 가고
늦은 점심, 물메기국 넘어가는 소리에
목이 메기도 하던 그런 풍경이 있었네
해 질 녘까지 그 모습 지켜봤을
까치집 때문인가, 정독도서관 앞길에서
오래도록 떠나지 못하고
서성이는 여름 한낮.
그날 정독도서관 앞 회화나무 아래에 한참 서 있었다. 수령 300년이 넘은 나무의 짙푸른 녹음 때문이었을까. 가지 위에 초가집처럼 얹힌 까치둥지 때문이었을까.
문득 어릴 적 밥상 풍경이 떠올랐다. 국민학교 5~6학년 무렵이었다. 그때 우리는 남해 금산 보리암 아래 토담집에 살았다. 집도 절도 없어서 오랫동안 절집에 얹혀살다가 계곡 옆에 작은 흙집을 마련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마당가 평상에 앉아 점심을 먹는데 키 큰 회화나무와 까치집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밥상은 대부분 아버지가 차렸다. 어머니는 몸이 좋지 않은 아버지를 대신해 절집이나 산 아래 마을로 일을 나가는 날이 많았다.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에 재산을 정리해서는 제법 큰 뜻을 품고 북간도로 갔다가 꿈은 하나도 이루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광복 이후 혼란기와 전쟁통에 몸까지 상했다. 세상과의 싸움에서 번번이 참패하고, 힘이 다 빠진 상태로 낙향했으니 낙심과 좌절이 오죽했을까. 그래서인지 아버지의 뒷모습에는 늘 알 수 없는 쓸쓸함이 묻어났다.
나는 아버지가 쉰이 다 되어서야 얻은 늦둥이였다. 아래로 여동생이 하나. 이렇게 네 식구가 절집에서 눈칫밥을 먹다가 어렵사리 토담집을 마련한 그 시절, 아버지는 가끔 물메기국을 끓여 우리 남매를 먹였다. 물메기는 남해 특산물로 겨우내 빨랫줄에 만국기처럼 걸어 말렸다가 국을 끓여 먹었다. 생김새는 볼품없었지만 맛은 아주 좋았다. 하지만 국물에 풀려 흐물흐물해진 껍질은 밍밍해서 영 맛이 없었다.
그날도 아버지가 물메기국을 끓였다. 나는 맛있는 살만 살살 골라 먹고, 껍질은 오물오물 눈치를 보다가 밥그릇 밑에 슬쩍 뱉어 감춰놓았다. 아버지가 알면 야단맞을까봐 짐짓 능청을 떨며 시야를 분산시키곤 했다.
그런데 잠깐씩 한눈을 팔 때마다 물메기 껍질이 감쪽같이 없어졌다. 오물거리던 입을 멈추고 아버지 표정을 조심스레 살폈다. 그러자 아버지가 “야야, 어른이 되믄 껍질이 더 좋단다”며 넌지시 먼 데를 보셨다.
그때 어렴풋이 보았다. 아버지의 깊은 눈빛 사이로 어른거리던 쓸쓸함의 그늘을. 맑은 물에 통무를 썰어 넣고 마른 메기를 잘라 국을 끓이는 동안 아버지는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을까. 일 나간 어미 대신 아이들 밥상을 챙기는 아비의 마음. 평생 세상을 겉돌다 온 메기 껍질처럼 몸보다 마음 더 불편했을 아버지의 슬픔이 거기에 녹아 있었다.
그날 밥상 위를 둥그렇게 보듬던 바람은 여느 때보다 습기를 더 머금은 듯했다. 달그락거리는 숟가락 사이로 간간이 먼 바다 소리가 들리는 듯도 했다. 한결 고요해진 풍경 속에서 물메기국 넘어가는 소리는 더 크게 들렸다. 그 애잔한 소리에 그만 목이 메었다. 그날 그 풍경은 나이 들고 철이 난 뒤에도 쉽게 잊히지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봤을 나무 위 까치집 때문이었을까. 어느 날 까치둥지를 이고 선 정독도서관 회화나무 앞길에서 오래도록 떠나지 못하고 서성거렸다. 그런 내 모습을 회화나무 너머 하늘에서 지켜봤을 아버지가 내게 시 한 편을 선물하셨다. 어쩌면 아버지가 대신 써 주셨을 그 시가 바로 ‘아버지의 빈 밥상’이다.
고두현
정독도서관 회화나무
가지 끝에 까치집 하나
삼십 년 전에도 그랬지
남해 금산 보리암 아래
토담집 까치둥지
어머니는 일하러 가고
집에 남은 아버지 물메기국 끓이셨지
겨우내 몸 말린 메기들 꼬득꼬득 맛 좋지만
밍밍한 껍질이 싫어 오물오물 눈치 보다
그릇 아래 슬그머니 뱉어 놓곤 했는데
잠깐씩 한눈팔 때 감쪽같이 없어졌지
얘야 어른 되면 껍질이 더 좋단다
맑은 물에 통무 한쪽
속 다 비치는 국그릇 행구며
평생 겉돌다 온 메기 껍질처럼
몸보다 마음 더 불편했을 아버지
나무 아래 둥그렇게 앉은 밥상
간간이 숟가락 사이로 먼 바다 소리 왔다 가고
늦은 점심, 물메기국 넘어가는 소리에
목이 메기도 하던 그런 풍경이 있었네
해 질 녘까지 그 모습 지켜봤을
까치집 때문인가, 정독도서관 앞길에서
오래도록 떠나지 못하고
서성이는 여름 한낮.
그날 정독도서관 앞 회화나무 아래에 한참 서 있었다. 수령 300년이 넘은 나무의 짙푸른 녹음 때문이었을까. 가지 위에 초가집처럼 얹힌 까치둥지 때문이었을까.
문득 어릴 적 밥상 풍경이 떠올랐다. 국민학교 5~6학년 무렵이었다. 그때 우리는 남해 금산 보리암 아래 토담집에 살았다. 집도 절도 없어서 오랫동안 절집에 얹혀살다가 계곡 옆에 작은 흙집을 마련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마당가 평상에 앉아 점심을 먹는데 키 큰 회화나무와 까치집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밥상은 대부분 아버지가 차렸다. 어머니는 몸이 좋지 않은 아버지를 대신해 절집이나 산 아래 마을로 일을 나가는 날이 많았다.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에 재산을 정리해서는 제법 큰 뜻을 품고 북간도로 갔다가 꿈은 하나도 이루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광복 이후 혼란기와 전쟁통에 몸까지 상했다. 세상과의 싸움에서 번번이 참패하고, 힘이 다 빠진 상태로 낙향했으니 낙심과 좌절이 오죽했을까. 그래서인지 아버지의 뒷모습에는 늘 알 수 없는 쓸쓸함이 묻어났다.
나는 아버지가 쉰이 다 되어서야 얻은 늦둥이였다. 아래로 여동생이 하나. 이렇게 네 식구가 절집에서 눈칫밥을 먹다가 어렵사리 토담집을 마련한 그 시절, 아버지는 가끔 물메기국을 끓여 우리 남매를 먹였다. 물메기는 남해 특산물로 겨우내 빨랫줄에 만국기처럼 걸어 말렸다가 국을 끓여 먹었다. 생김새는 볼품없었지만 맛은 아주 좋았다. 하지만 국물에 풀려 흐물흐물해진 껍질은 밍밍해서 영 맛이 없었다.
그날도 아버지가 물메기국을 끓였다. 나는 맛있는 살만 살살 골라 먹고, 껍질은 오물오물 눈치를 보다가 밥그릇 밑에 슬쩍 뱉어 감춰놓았다. 아버지가 알면 야단맞을까봐 짐짓 능청을 떨며 시야를 분산시키곤 했다.
그런데 잠깐씩 한눈을 팔 때마다 물메기 껍질이 감쪽같이 없어졌다. 오물거리던 입을 멈추고 아버지 표정을 조심스레 살폈다. 그러자 아버지가 “야야, 어른이 되믄 껍질이 더 좋단다”며 넌지시 먼 데를 보셨다.
그때 어렴풋이 보았다. 아버지의 깊은 눈빛 사이로 어른거리던 쓸쓸함의 그늘을. 맑은 물에 통무를 썰어 넣고 마른 메기를 잘라 국을 끓이는 동안 아버지는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을까. 일 나간 어미 대신 아이들 밥상을 챙기는 아비의 마음. 평생 세상을 겉돌다 온 메기 껍질처럼 몸보다 마음 더 불편했을 아버지의 슬픔이 거기에 녹아 있었다.
그날 밥상 위를 둥그렇게 보듬던 바람은 여느 때보다 습기를 더 머금은 듯했다. 달그락거리는 숟가락 사이로 간간이 먼 바다 소리가 들리는 듯도 했다. 한결 고요해진 풍경 속에서 물메기국 넘어가는 소리는 더 크게 들렸다. 그 애잔한 소리에 그만 목이 메었다. 그날 그 풍경은 나이 들고 철이 난 뒤에도 쉽게 잊히지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봤을 나무 위 까치집 때문이었을까. 어느 날 까치둥지를 이고 선 정독도서관 회화나무 앞길에서 오래도록 떠나지 못하고 서성거렸다. 그런 내 모습을 회화나무 너머 하늘에서 지켜봤을 아버지가 내게 시 한 편을 선물하셨다. 어쩌면 아버지가 대신 써 주셨을 그 시가 바로 ‘아버지의 빈 밥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