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속 참사는 1999년 동인천의 한 호프집에서 일어났던 화재 사고로 고등학생 56명이 목숨을 잃었던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한다. 술값을 내기 전에는 학생들을 바깥으로 내 볼 수 없다는 호프집 사장의 탐욕과 소방점검에 소홀했던 행정당국의 부실한 행정의 대가는 죄 없는 56명의 어린 목숨이었다. 엄연한 사회적 타살이었고 이후에 이어진 세월호의 전주곡이나 다름없었다. 인천에서 성장한 작가는 이 사건이 ‘어른들의 세계’에 대한 입문이었다. “그때 10대에서 20대로 막 넘어가려던 시기였어요. 이토록 폭력적인 세계가 어른들의 세계인가, 그러면 나는 이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나도 어른이 되면 이렇게 되는 건가..‘ 작가 앞에 당도한 간절한 물음이 <경애의 마음> 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었다. 내 기억 속에도 ‘화재, 호프집, 노는 애들, 죽음’이라는, 논리적 연관성이 별로 없어 보이는 단어의 조합이 세트처럼 묶여서 떠올랐다.‘아버지’라는 낙하산 덕분에 취업했다는 의심의 눈초리를 받는 공상수는 사회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요령도 없는 미싱 회사 팀장 대리다. 팀원이 없는 팀장이 무슨 의미냐고 따지는 상수에게 배정된 사원은 노조 파업에 참여해 삭발까지 한 이력이 있는, 감정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만년 주임 경애다. 같은 회사에 다녔지만 서로에 대해 알 리가 없었던 두 사람은 뜻밖에도 오래전 한 사람을 사랑했던 기억을 공유하고 있었다. 화재사고로 친구 은총을 잃고 혼자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 괴로워하는 경애는 오랜 상흔을 가슴에 묻은 채 살아가고 있었다. 영화를 좋아했던 상수에게 은총은 유일한 친구였다. 함께 영화를 보고, 같이 영화를 찍었던 친구를 잃은 상수는 지난한 상실의 시간을 홀로 견뎌왔다. 경애와 상수에게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손을 잡는 방식은 아니었지만 ‘같은 마음’을 지닌 채 살아온 시간이 있었다. ‘마음’이라는 보이지 않는 공간 속을 함께 걸어가며 나눴던 공감대가 분명 있었다.
“학생들이 비행을 저지르면 다 그런 사고에 엮이는 거야” 경애는 비행, 불량, 노는 애들이라는 말들을 곱씹어 보다가 맥주를 마셨다는 이유만으로 죽은 56명의 아이들이 왜 추모의 대상에서 제외되어야 하는가 생각했다. 그런 이유가 어떤 존재의 죽음을 완전히 덮어버릴 정도로 대단한가‘
경애는 상실의 시간을 겪으며 무의미한 학창시절을 보낸 뒤 대학에 갔다. 대학에서 만난 산주와의 사랑은 이어졌다 끊어졌다를 반복하다 결국은 다른 여자를 향해 떠난 산주 뒤에 경애는 또다시 홀로 남겨졌다. 입사 후 부당 해고와 노조의 성폭력에 대응하다가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한 존재로 전락한 그녀는 텅 빈 창고를 지키며 담배 한 대에 의지해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남은 것은 몸과 마음을 할퀴고 간 모진 상처의 흔적뿐이었다. 상수의 유일한 피난처는 자신이 운영하는 상담 사이트 ‘언니는 죄가 없다’이다. 두 개의 정체성 사이를 오가며 불안하고 흔들리는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었다.
인사발령으로 만난 상수와 경애는 베트남으로 떠나고 그곳에서 새로운 일상이 펼쳐지지만 공간이 달라졌다고 바뀐 것은 없었다. 여전히 부조리와 부정의가 판을 치고 경애는 또다시 내부고발자로 몰려 강제 인사이동을 당해 상수를 떠나오게 된다. 폭력적인 세상에서 또다시 마음을 다치고 밀려난 경애는 무기력의 늪에 빠져들지만 결국 그녀는 깨닫게 된다. “자신을 부당하게 대하는 것들에 부당하다고 말하지 않는 한 경애는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구원은 그렇게 정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동적인 적극성을 통해서 오는 것”을. 스스로를 지켜내지 못하면 누구도 자신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버티고 견디는 대신 조롱과 멸시를 받더라도 치열하게 싸우는 쪽을 택하게 된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버틸 수 있었던 시간을 넘어서 이제 그녀는 무언가를 하기로 했다.
산주에게 받은 상처로 괴로워하는 경애에게 보낸 상수의 메시지는 “마음을 폐기하지 마세요. 우리는 조금 부스러지기는 했지만 파괴되지는 않았습니다”였다. 봄날이 가듯, 사랑도 그렇게 흘러가지만 그 시간을 통과한 사람에게는 어떻게든 흔적이 남는 법이다. 과거의 상처로 마음의 문을 닫은 경애와 상수는 현재의 시간을 다시 쓰는 과정 속에서 서로의 상처를 씻어주는 역할을 한다.
순간순간 폐기하고 싶은 마음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김금희 작가는 그 마음을 폐기하지 말라고 한다. 마음 때문에 아파하고 마음 때문에 파괴되기 싫어서 애써 마음을 쓰지 말자고 애쓴 적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폐기되지 않고 남은 마음이 폐기하고 싶은 마음을 안고 살아가는 누군가에게 닿는다면 조금 부스러지기는 하겠지만 그 마음 역시 파괴되지 않은 채 남을 것이다. 마음과 마음의 끈은 그렇게 이어진다. ‘한 번 써 본 마음’ 은 어떻게든 남아 있는 법이니까.
어쩌면 방금 내 곁을 스쳐 지나간 사람, 같은 회사에 근무하지만 눈인사만 겨우 주고받는 사람들과 우리가 알지 못했던 시간 속에서 ‘같은 마음’으로 존재했었던 시간들이 있었는지 모른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 생길 수 있는 공유의 영역을 생각하면 삶에 대해 ‘경애하는 마음’ 이 생긴다. 마음을 쓰는 일보다 외면하는 데 더 익숙한 우리들에게 <경애의 마음> 은 마음과 마음이 이어져 서로의 온도를 높여주는 상수와 경애의 마음에 대한 얘기다. 소설을 읽는 동안 내 마음의 온도도 조금은 상승했는지 모른다.
오래전 은총을 떠나보낸 상수와 경애의 마음, 사랑을 잃고 방황했던 경애의 마음과, 피켓을 들고 서 있는 경애의 마음, 세상의 모든 언니들을 응원했던 상수의 마음, 모두 행복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