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 최익현 유배지. 최익현은 을사조약 후 의병장으로 활동하다 일본에 붙잡혀 갔고 대마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다 단식 끝에 세상을 떠났다. 사진=한경 DB](https://img.hankyung.com/photo/202103/AA.10996501.1.jpg)
1910년에 멸망할 때까지 병인양요부터는 44년, 강화도 조약부터는 35년의 기간 이른바 강산이 3번 이상 변했다. 이 격렬한 역사의 전환기는 참여한 인물과 주요사건을 근거로 구분하면 총 3기로 나눌 수 있다. 1기는 1875년부터 1882년까지로 운양호 사건부터 임오군란까지다.
고종과 명성황후가 장악한 신정부는 국제관계의 대세와 일본의 군사적인 위력을 의식해 1876년 2월에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했다. 1811년에 통신사가 끊어진 후 65년 만에 교린 외교가 아닌 근대 외교가 시작됐다. 12조로 된 이 불평등조약은 문제점이 많았다. 제 5조는 ‘조선은 부산 이외에 두 항구(원산, 인천)를 20개월 이내에 개항해 통상을 허용한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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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제 1조인 ‘조선은 자주의 나라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는 내용은 매우 파격적인 것으로 500년 가까이 조공과 책봉체제에 묶인 중화적 질서를 탈피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만약 조선이 크게 반성하고 강력한 의지와 능력을 배양했다면 근대 문명의 혜택을 입을 수 있었다.
일본은 서양 열강들이 부과한 유사한 개항압력에 효율적으로 적응해 성공했다. 그들은 어떻게 성공했고, 우리는 왜 실패했을까를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규명하는 일이 필요하다.
조약을 체결한 신정권은 대원군과 차별성을 강조하면서 개방과 개혁을 성공시키는 정책들을 추진했다. 또한 조선의 능력과 현실을 자각하고, 불안과 충격, 혼란에 휩싸인 사람들은 3가지 부류로 나뉘어 대응했다.
![양화진에 세운 척화비. 사진=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https://img.hankyung.com/photo/202103/01.25865820.1.jpg)
둘째, 자생적인 개화주의자들과 개혁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신진 세력들이다. 훗날 갑신정변을 비롯해 개화를 주도한 서광범·박영효·김옥균·김홍집 등 젊은 청년은 북학의 전통을 계승했다. 지도자였던 오경석·유대치 등은 역관 출신이었고, 정신적인 지주인 박규수는 『열하일기』의 저자인 박지원의 손자였다. 임오군란 이후 정책 차이로 인해 사대당(수구당)인 온건 개혁파와 독립당(개화당)인 급진 개혁파로 분리됐고, 각각 청나라와 일본을 개혁의 모델로 삼았다. 역사의 주역으로 등장해 현실에서 실패했고, 후세까지 친일파라고 비판을 받았다. 물론 박영효 등의 반역자도 있지만, 대부분은 사회적·경제적 기득권층이면서도 개혁과 정의, 애국을 추구한 이상주의자들이었다.
셋째, 평민 출신의 농민들 대다수인 백성들이다. 신분적인 제약과 경제적인 빈곤으로 교육과 견문의 기회가 없었던 이들은 유교 정치의 영향으로 충·효·공동체 의식이 강했지만, 국가의식 등은 미약했고, 개혁과 개방에도 미온적이었다. 따라서 비판의식과 새로운 가치관을 갖고 사회개혁에 동참하는 ‘민중’으로 성장하는 데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이러한 동향 속에서 고종과 명성황후 세력들은 어떤 개혁정책을 어떤 방식으로 추진했을까?
집권 세력들은 위기의식을 가졌지만 멸망과 같은 극단적인 경우는 예상하지 않은 것 같다. 13년 정도 일찍 외세에 개방 당한 일본은 개혁의 혼란을 정리하지 못한 상태였고, 국제관계도 그레이트 게임의 주변부로 변하면서 변화무쌍했다. 그 때문에 조선은 반전의 시간과 기회는 충분히 있었고, 실제로 36년 후에야 일본에 합병당했다.
명성황후 정권의 외교정책과 외교관 등 외국인들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개혁과 구국의 노력을 기울였다고 판단된다. 1876년에 1차 수신사를 파견했다. 김기수는 일본의 급속한 발전을 목도하며 충격받아 『일동기유(日東記游)』를 써 정부에 보고했다. 1880년 6월에는 2차 수신사로 김홍집 일행을 파견했고, 12월에는 정부 조직으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해 외교·내정· 군정 등 개혁을 효율적으로 추진했다. 이어 1881년 4월에는 ‘조사 시찰단’이라는 이름의 ‘신사유람단’을 비밀리에 일본에 파견했다. 이 때 62명은 74일 동안 일본에 체류하면서 각 분야를 치밀하게 조사한 후에 100여 책의 보고서를 정부에 제출했다. 그 중간인 5월에는 장교를 양성하는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창설했다. 9월에는 ‘영선사’라는 이름으로 대규모 유학생을 파견해서 청나라의 양해하에 군수 공장 등에서 화약과 탄약 제조법을 비롯한 군사 분야의 기술과 외국어를 배우게 했다.
![병자수호조약가 체결된 강화도 연무당터 사진=강화군청](https://img.hankyung.com/photo/202103/01.25865819.1.jpg)
하지만 서양 풍속들과 천주교의 범람을 막는 일에 의미를 둔 유림들과 보수세력들은 ‘위정척사’라는 프레임으로 사회운동과 사상투쟁을 벌였다. 영남의 유생은 1만 여명의 서명을 받아 궁궐 앞에서 집단 상소했다. 이른바 ‘만인소’이다. 그리고 강경하게 탄압하는 정부에 대항해 백성들과 더불어 개화 정책을 추진하는 관료들의 처단까지 요구했다. 결국 1882년 5월에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됐다. 상대적으로 덜 불평등한 이 조약으로 관세제도가 도입되는 등 근대화에 필요한 조치들이 취해졌고, 근대 상업과 공업이 발달하는 계기도 만들어졌다.
그런데 1882년 6월에 임오군란이 발생했다. 개혁 정부는 별기군을 운영하는 재정이 부족해지자 구식 군대의 예산을 빼서 투입했다. 그러자 1년 이상 봉급을 받지 못한 데다가 처우에 불만을 가졌던 일부 군인들은 폭력을 행사하는 등 공권력에 도전했다. 초기에는 목적의식이 희박하고, 사적 이익과 연관된 군부가 우발적으로 일으킨 소요였다. 하지만 대원군 등의 책략과 보수세력의 지원으로 군사 쿠데타로 변질해 일본 공사관을 방화하고, 교관을 비롯한 일본 경찰들을 살해했다.
![양주 매곡리 명성왕후가 파난처로 삼기 위해 지은 집. 사진=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https://img.hankyung.com/photo/202103/01.25865821.1.jpg)
임오군란의 배경과 평가를 놓고 명성황후 세력의 부패라는 책임 전가론이 있으나 세도정치나 대원군 시대에도 부패상황은 심각했으며, 군도 부패하고 무책임한 집단이었다. 결국 임오군란은 청나라와 일본의 역학관계를 복잡하게 만들어서 조선의 자주적이고 능동적인 개혁을 좌절시켰다. 또한 청일 전쟁의 명분을 제공했으며, 개혁세력을 사대당과 독립당으로 분열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