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정씨는 성범죄가 의심된다며 수차례 탄원서를 제출했지만, 달서경찰서는 1998년 11월 무단횡단을 이유로 이 사건을 단순 교통사고로 처리했습니다. 다른 범죄 혐의는 없다고 수사 보고했습니다.
같은해 12월 대구지방검찰청은 교통사고는 혐의없음으로 종결하되 △아버지의 탄원 내용에 비춰 수사를 계속하고 내사 사건기록에 첨부할 것 △현장 사진 상세히 촬영 △약도 작성 △목격자 주변 탐문 △부검 후 검증결과를 기록에 편철 △정액 반응여부 조사 △정모양 친구들의 진술 검토 등을 경찰에 지적했습니다.
법원에 따르면 경찰은 1999년 3월 언론이 의혹을 제기하고 나서야 비로소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에 정액 반응 등을 의뢰했습니다. 그나마도 사건 현장에 정양의 속옷 등이 발견됐다는 사실도 정양의 친구들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달서경찰서는 그로부터 1년 3개월 뒤인 2000년 6월 국과수에 DNA 분석을 의뢰했습니다. 국과수는 정양의 속옷 등에서 남성 유전자를 확인했지만 덤프트럭 운전자의 유전자와는 다르다고 감정했습니다.
정양의 아버지는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재수사를 요청했습니다. 결국 2013년 검찰은 재수사에 착수해 당시 정양의 속옷에서 검출된 DNA가 스리랑카인 쿠모씨의 DNA와 일치한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특수강도강간 혐의로 그를 구속기소했습니다. 단순 강간 등은 이미 공소시효가 지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어진 1,2,3심에선 '특수강도강간' 혐의로는 증거가 부족하다는 등의 이유로 모두 무죄 결론이 났습니다.
法 "경찰 초동수사, 극히 부실"
지난 2일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합의25부 (부장판사 이관용)는 정씨 아버지 등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했습니다. 변호인의 말을 빌리자면 형사가 아닌 민사재판에서 유족들이 처음으로 위로를 받게 된 셈입니다.재판부는 "피고(국가)는 부모 각각에게 2000만원씩, 형제들에게는 각각 500만원씩의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주문을 읽었습니다. 지연이자까지 합치면 총 배상금액은 1억 3000여만원입니다.
이날 재판부는 판결을 선고하며 경찰의 부실 수사를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망인(정양)이 사건 당시 속옷을 입지 않은 채로 상의와 바지만 입고 있었고 집으로 가는 방향과 반대방향으로 7km 떨어진 고속도로에서 발견됐다면 단순히 무단횡단을 하려다가 이 사고를 당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망인의 아버지가 성범죄를 의심하고 수차례 진정했음에도 (경찰은) 현장에 망인의 속옷이 있었는지도 확인하지 않고 영안실 직원에게 전화로만 확인했을 뿐 기본적인 초동수사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사고 차량 사진도 열 달 뒤에 수리공에게 확인하는 정도였고 검찰의 수사지휘에 언급된 분비물 검사 등을 실시하지 않았으며 원고(유족)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현장에서 발견된 속옷이 망인의 것이 아니라고 단정지어 국과수 감정의뢰를 지연했습니다.
경찰은 이 사건 사고 발생 직후 단순한 교통사고로 성급히 판단해 현장조사와 증거 수집을 하지 않고, 증거물 감정을 지연하는 등 극히 부실하게 초동수사를 한 것은 현저히 불합리하게 경찰의 직무상 의무를 위반하여 위법한 것입니다. 피고는 국가배상법에 따라 원고들에게 이로 인한 손해를 배상할 의무가 있습니다."
-2021년 4월 2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25부 판결 중 일부
"나라에서 책임 인정해 줘 긍정적"
선고 직후 기자들과 만난 정양의 아버지는 "변호사님처럼 도와주신 분들이 많아서 (오늘 판결이) 가능했던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유족을 대리한 박연철 변호사는 "그간 진범이 잡혔음에도 불구하고 형사적으로는 아무 위로를 받지 못했다"며 "나라에서 책임을 인정한 점은 긍정적"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어 "재판부에서 국가의 배상책임을 인정해 준 것은 국민의 신체와 생명을 보호해야 한다는 국가의 책임과 관련해 예전보다 진전된, 심도있는 판결을 해준 것"이라며 "재판부에 감사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경찰의 부실했던 초동 수사에 대해서도 언급했습니다. 박 변호사는 "아주 엉망이었고 무책임했다"며 "앞으로 수사기관에서 자극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또 "물론 수사가 늘 쉬운 것은 아니지만 꼭 해야하는 수사만 했어도 사건이 이렇게까지 지연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남정민 기자 peux@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