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개발된 항암제 상당수는 적지 않은 부작용을 일으킨다. 탈모, 잦은 구토와 설사 등이 대표적이다. 심한 경우 심장, 폐, 간 등 다른 장기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항암제가 암세포만 공격하는 게 아니라 정상세포까지 죽이기 때문이다.

이런 부작용을 최소화하고 효능까지 높일 수 있는 기술로 주목받는 게 약물전달시스템(DDS)이다. 표적으로 하는 암세포에 정확히 찾아가 약물을 투하하는 기술이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환자마다 제각각인 암세포 주변 환경에 최적화된 약물 전달이 가능한 DDS가 개발됐다.

일본 도쿄이과대학 연구진은 최근 국제 학술지 ‘약물방출조절 저널’에 항암제를 암세포에서만 방출하는 DDS를 발표했다.

연구진이 개발한 DDS는 하이드로겔을 이용한다. 하이드로겔은 물이 주성분인 물컹물컹한 고분자 물질 덩어리다. DDS로 개발된 하이드로겔은 항암제를 잘 감싸고 있다가 암세포를 만나면 구조가 느슨해지면서 약물을 방출한다.

암세포 주변의 환경(종양미세환경)은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약산성(pH 5.5~6.5)이며, 산소가 적고 특정 단백질 및 효소의 발현이 많다. 연구진은 이런 종양미세환경의 특성을 고려해 하이드로겔의 구조를 설계했다.

세포 주변이 산성이라는 것은 수소 이온(H+)이 많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DDS 하이드로겔은 중성(pH7.4)인 정상 조직에서는 약물을 중심으로 잘 뭉쳐 있다. 하지만 수소 이온이 많은 종양미세환경에서는 서로 뭉쳐 있던 일부 원자가 수소와 강하게 결합하며 전체 구조가 느슨해진다. 그때를 틈타 하이드로겔에 엉겨 있던 약물들이 빠져나와 방출되는 원리다.

지금까지 pH, 온도 등 하나의 조건에 대해 반응하는 하이드로겔은 있었지만, 이번에 개발한 DDS 하이드로겔처럼 여러 조건에 따라 동시에 반응하는 경우는 없었다. 그만큼 종양미세환경에 선택적인 하이드로겔의 개발이 가능하다는 의미다. 기쿠치 아키히코 도쿄이과대학 교수는 “pH뿐만 아니라 온도, 화학 반응 등 종양미세환경을 최대한 반영해 구조를 설계했다”며 “향후 개인의 종양세포 환경이나 사용하는 약물 종류에 따라 맞춤형 DDS 하이드로겔을 설계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기쿠치 교수팀의 DDS 하이드로겔 외에 종양미세환경의 특징을 이용해 개발하는 자기조립체 연구도 있다. 자기조립이란 외부의 자극 없이 구성 요소들이 서로 간의 상호작용만으로 특정 구조를 만드는 현상을 말한다.

양왕 중국 난퉁대 교수팀은 2019년 pH 6.5인 환경에서 반응해 종양미세환경에서만 자가조립하는 물질을 개발했다. 왕 교수팀이 개발한 자기조립체는 약산성인 환경에서 끊어지는 시스-아코니틱언하이드라이드(CAA)와 세포사멸을 유도하는 물질인 KLAK 등이 연결돼 있다. 연구진은 이 물질이 종양미세환경을 만나면 CAA가 떨어져나가면서 자기조립체를 형성하는 것을 확인했다. 자기조립체는 세포 안으로 쉽게 침투해 암세포의 사멸을 유도했다.

기쿠치 교수는 “갈수록 암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이 다양하게, 또 맞춤형으로 개발되고 있다”며 “종양미세환경을 이용한 이런 연구가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지원 기자 jwcho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