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초 반도체 대란이 본격화한 지 석 달이 지나서야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과 반도체산업협회 회장단이 어제 회의석상에 마주 앉았다. 미국에선 백악관까지 나서 12일 반도체 수급 대란의 대응책을 논의키로 한 마당에 한국 정부만 손놓고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기업들은 글로벌 반도체 패권전쟁의 한복판에 서 있는 고충을 토로하고, 정부에 건의문까지 제출했다.

건의문은 국내에 반도체 공장을 지을 때 정부의 인센티브 지원을 늘리고, 인재 공급에도 힘써달라는 게 요지다. 구체적으로 연구개발(R&D) 및 제조설비 투자비용의 50%까지 세액공제 확대, 수도권 대학 반도체학과 신설 및 증원, 공급망 안정화를 위한 생태계 구축, 탄력적인 통상정책 등의 요청이 담겼다.

반도체 업계가 이례적으로 정부에 호소하게 된 것은 그만큼 절박해서다. 주요국들이 자국 반도체기업 육성을 위해 파격적인 지원책을 앞다퉈 내놓는 마당이다. 미국은 2024년까지 반도체 설비투자액의 40%를 세액공제 해준다. 유럽연합(EU)은 투자액의 최대 40%를 보조금 형태로 지급한다. 대만도 R&D 투자액의 15% 한도 내에서 세금을 깎아준다. 반면 한국의 유효 법인세율은 해외 경쟁사들보다 훨씬 높을뿐더러 세액공제율도 겨우 3%에 불과하다. 인력수급 역시 한국 반도체산업이 초격차 유지를 위해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각각 연세대, 고려대와 손잡고 만든 학부과정 반도체학과가 올해 처음 신입생을 받았지만 인력은 여전히 태부족이다. 수도권 대학 정원 규제를 과감히 풀어서라도 경쟁력을 갖춘 인력의 절대수를 늘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한국 반도체산업은 이제 중국 추격만 따돌리면 그만인 처지가 아니다. 미국 EU 일본 대만 등이 모두 경쟁자다. 그런데도 국내 업계에는 과중한 세금 부담, 수도권 규제 등 다른 나라에 없는 ‘한국형 규제’의 족쇄가 채워져 있다. 산업부는 기업들의 건의를 반영해 ‘K-반도체 벨트 전략’을 내놓겠다고 한다. 하지만 산업부가 지원할 수 있는 대책은 얼마 안 된다. 기업이 공장 하나 지으려 해도 온갖 부처와 지자체를 쫓아다녀야 하는 게 현실이다. 세계대전으로 번진 반도체 패권경쟁에서 뒤처지지 않으려면 범정부 차원에서 발상의 전환이 시급하다. 그렇지 않으면 ‘K’자만 붙인 또 하나의 생색내기 대책에 그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