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믿을 놈(?)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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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저 죽고 싶어요.”
“이게 무슨 말이야. 왜 그래?”
“저는 진짜 돌대가리인가 봐요. 정말 열심히 했는데 시험을 또 망쳤어요.”
“정우야, 괜찮아. 네가 열심히 한 게 중요한 거지. 시험이 중요하지 않아.”
“그래도 잘하고 싶었는데.”
“잘 할 거야. 너는 대학 가서 잘할 애야. 네 공부 스타일이 그래.”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기억이다. 아들이 고3때 일이다. 당시 시험 스트레스를 받는 느낌은 알았다. 하지만 워낙 밝은 성격이다 보니 그로 인해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할 줄 몰랐다. 지금도 그 말을 들은 순간을 떠올리면 필자는 앞이 캄캄하고 하늘이 노래진다.
그런데 그렇게 자식에게 놀란 일이나 당시 필자가 생각하고 각오했던 일들을 금방 또 잊는 게 부모다.
“정우야, 누구 집 아들이 결혼한대.”
“네. 소식 들었어요.”
“근데 결혼해서 부모랑 같이 산대네.”
“아 그래요?”
“야, 너도 나중 결혼하면 엄마랑 같이 살 거야?”
“엄마, 그건 제가 결정할 일이 아니잖아요!”
자식을 키우다보면 기가 막히는(?) 일들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이번 일도 그렇다. 이럴 때 딱 “세상에 믿을 놈 하나도 없다”는 말이 어울리는 것 같다. 엄마인 ‘내가 낳아 먹이고 입히고 키웠는데’ 말이다. 스물 셋 아들이 아직 ‘미상’인 미래 여성에게 물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들 입장에서 지극히 현실적이고 사실 맞는 말이다. 그런데도 필자는 말이라도 “네!” 해주길 믿었고 바란 것이다.
최근 ‘부모가 자녀에게 추천하고 싶어 하는 직업’ 조사 결과가 나왔다. 한국고용정보원이 현직업의 발전 가능성, 급여만족도, 직업지속성, 근무조건, 사회적 평판, 수행 직무 총 6가지 세부 영역으로 나누어 현직자들의 직업 만족도를 분석 평가했다.
이 중 사회적 평판 조사는 ‘자녀에게 추천하고 싶은 직업 정도’가 포함되어 직업을 물려주고 싶은 부모 마음을 잘 알 수 있다. 1위가 초등학교 교장과 교감, 2위가 판사, 3위가 장학사이다. 뒤이어 목사, 대학교 총장이나 학장, 교수 순이다. 모두 절대량의 <공부>가 필요한 직업들이다.
이는 실제로 공부 혜택을 본 사람이 그 속을 더 잘 아는 것이다. 한마디로 “살아보니 그렇다”는 것이다. 그뿐인가. 우리나라는 매년 수능일이면 국민 전체가 자녀들 수능 시험을 배려(?)한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서 공부, 시험이 중요하다. 그러다보니 이미 사회를 겪고 살아온 부모는 자녀에게 <공부>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어 있다.
어르신들이 흔히 말하는 이야기 중 ‘품 안의 자식’ 이란 게 있다. 이 말은 부모와 자녀 입장에 따라 매번 해석이 달라진다. 자녀로부터 효도를 받느냐 마느냐에 따라 우스갯소리가 되고 긴 한숨이 담긴 푸념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말의 핵심은 딱 하나다. ‘언제까지나 자식이 부모 품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어리석게도 필자는 자녀 교육에 남다른 신경(?)을 썼다. 남들이 보내는 학원 수만큼 학원을 하나 더 보내기 위해 더 열심히 일했다. 필자 역시 사회적 평판이 좋은 직업을 갖게 하려던 욕심 때문이다. 그리고 그 욕심은 자녀가 성장할수록 더 커졌다. 다 잘 되는 것 같았다. 문제는 필자 아들은 힘에 부쳐 죽고 싶을 정도로 살맛이 나지 않을 지경이었는데도 말이다.
요사이 수능 결과에 일희일비하는 부모들을 더러 보게 된다. 곧 대입 합격, 불합격 여부가 판가름 날 것이다. 그리고 부모들 입에서 결과에 따라 “자녀를 믿었는데.. 아쉽다!” 라는 말이 나온다. 그만큼 자녀가 노력하고 부모가 지원(?)한만큼 좋은 결과가 나오길 기대한 것이다. 이쯤 필자가 미안하지만 그 <기대>를 잠시 <욕심>으로 생각을 바꾸면 어떨까 제안해 본다.
부모란 참 아이러니하다. 무한한 사랑을 주는 것 같지만 상황에 따라 무한한 기대를 채워주길 바라는(?) 마음도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부모들은 흔히 기대에 어긋난 자녀를 빗대어 ‘세상에 믿을 놈 없다’고 하지 않는가? 하지만 어떤 경우라도 자녀를 향한 <기대>나 <욕심>이 자녀에 대한 <믿음>이 되어선 안 될 것이다.
설사 그것이 자녀를 위한 좋은 뜻일지라도. 부모에게 자녀는 기대를 실현시켜 주는 믿음의 존재가 아니라 그냥 바라만 보아도 행복한 <사랑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믿을 놈은 없더라도 사랑할 놈은 있다!” Ⓒjslee3082
“이게 무슨 말이야. 왜 그래?”
“저는 진짜 돌대가리인가 봐요. 정말 열심히 했는데 시험을 또 망쳤어요.”
“정우야, 괜찮아. 네가 열심히 한 게 중요한 거지. 시험이 중요하지 않아.”
“그래도 잘하고 싶었는데.”
“잘 할 거야. 너는 대학 가서 잘할 애야. 네 공부 스타일이 그래.”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기억이다. 아들이 고3때 일이다. 당시 시험 스트레스를 받는 느낌은 알았다. 하지만 워낙 밝은 성격이다 보니 그로 인해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할 줄 몰랐다. 지금도 그 말을 들은 순간을 떠올리면 필자는 앞이 캄캄하고 하늘이 노래진다.
그런데 그렇게 자식에게 놀란 일이나 당시 필자가 생각하고 각오했던 일들을 금방 또 잊는 게 부모다.
“정우야, 누구 집 아들이 결혼한대.”
“네. 소식 들었어요.”
“근데 결혼해서 부모랑 같이 산대네.”
“아 그래요?”
“야, 너도 나중 결혼하면 엄마랑 같이 살 거야?”
“엄마, 그건 제가 결정할 일이 아니잖아요!”
자식을 키우다보면 기가 막히는(?) 일들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이번 일도 그렇다. 이럴 때 딱 “세상에 믿을 놈 하나도 없다”는 말이 어울리는 것 같다. 엄마인 ‘내가 낳아 먹이고 입히고 키웠는데’ 말이다. 스물 셋 아들이 아직 ‘미상’인 미래 여성에게 물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들 입장에서 지극히 현실적이고 사실 맞는 말이다. 그런데도 필자는 말이라도 “네!” 해주길 믿었고 바란 것이다.
최근 ‘부모가 자녀에게 추천하고 싶어 하는 직업’ 조사 결과가 나왔다. 한국고용정보원이 현직업의 발전 가능성, 급여만족도, 직업지속성, 근무조건, 사회적 평판, 수행 직무 총 6가지 세부 영역으로 나누어 현직자들의 직업 만족도를 분석 평가했다.
이 중 사회적 평판 조사는 ‘자녀에게 추천하고 싶은 직업 정도’가 포함되어 직업을 물려주고 싶은 부모 마음을 잘 알 수 있다. 1위가 초등학교 교장과 교감, 2위가 판사, 3위가 장학사이다. 뒤이어 목사, 대학교 총장이나 학장, 교수 순이다. 모두 절대량의 <공부>가 필요한 직업들이다.
이는 실제로 공부 혜택을 본 사람이 그 속을 더 잘 아는 것이다. 한마디로 “살아보니 그렇다”는 것이다. 그뿐인가. 우리나라는 매년 수능일이면 국민 전체가 자녀들 수능 시험을 배려(?)한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서 공부, 시험이 중요하다. 그러다보니 이미 사회를 겪고 살아온 부모는 자녀에게 <공부>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어 있다.
어르신들이 흔히 말하는 이야기 중 ‘품 안의 자식’ 이란 게 있다. 이 말은 부모와 자녀 입장에 따라 매번 해석이 달라진다. 자녀로부터 효도를 받느냐 마느냐에 따라 우스갯소리가 되고 긴 한숨이 담긴 푸념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말의 핵심은 딱 하나다. ‘언제까지나 자식이 부모 품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어리석게도 필자는 자녀 교육에 남다른 신경(?)을 썼다. 남들이 보내는 학원 수만큼 학원을 하나 더 보내기 위해 더 열심히 일했다. 필자 역시 사회적 평판이 좋은 직업을 갖게 하려던 욕심 때문이다. 그리고 그 욕심은 자녀가 성장할수록 더 커졌다. 다 잘 되는 것 같았다. 문제는 필자 아들은 힘에 부쳐 죽고 싶을 정도로 살맛이 나지 않을 지경이었는데도 말이다.
요사이 수능 결과에 일희일비하는 부모들을 더러 보게 된다. 곧 대입 합격, 불합격 여부가 판가름 날 것이다. 그리고 부모들 입에서 결과에 따라 “자녀를 믿었는데.. 아쉽다!” 라는 말이 나온다. 그만큼 자녀가 노력하고 부모가 지원(?)한만큼 좋은 결과가 나오길 기대한 것이다. 이쯤 필자가 미안하지만 그 <기대>를 잠시 <욕심>으로 생각을 바꾸면 어떨까 제안해 본다.
부모란 참 아이러니하다. 무한한 사랑을 주는 것 같지만 상황에 따라 무한한 기대를 채워주길 바라는(?) 마음도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부모들은 흔히 기대에 어긋난 자녀를 빗대어 ‘세상에 믿을 놈 없다’고 하지 않는가? 하지만 어떤 경우라도 자녀를 향한 <기대>나 <욕심>이 자녀에 대한 <믿음>이 되어선 안 될 것이다.
설사 그것이 자녀를 위한 좋은 뜻일지라도. 부모에게 자녀는 기대를 실현시켜 주는 믿음의 존재가 아니라 그냥 바라만 보아도 행복한 <사랑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믿을 놈은 없더라도 사랑할 놈은 있다!” Ⓒjslee30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