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수칼럼 ] "네 이름이 무엇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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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다시 칼럼을 쓰기 시작하면서 SNS에 글을 올렸다. 필자 SNS 친구는 몇 명 안 된다. 그것도 대부분 남사친 <남자 사람 친구>들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현실에선 ‘여자 사람 친구’들이 필자를 매우 좋아하는데 SNS상에선 남성들이 필자를 좋아해 준다. 아마도 ‘셀카’를 기막히게 잘 찍는 필자 능력 때문일 게다.
다시 SNS활동을 하려니 뭐부터 먼저 올려야 할까? 그동안 몇 안 되는 친구들에게 충실하지 못했던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까? 이런 저런 궁리를 하다가 평상시 필자 모습 그대로 표현한 사진 한 장을 올렸다. 필자가 차린 저녁밥상. 그리고 이렇게 글을 올렸다.
“방금 들어온 삼식씨가 김치전이 먹고 싶대서 맨들었어요!”
첫 댓글이 올라왔다.
“아직도 삼식입니까?”
댓글을 보고 얼마나 크게 웃었는지 모른다. 진짜 삼식이인 남편이 웃고 아들도 웃었다. 아들은 “엄마, 이제 아버지 이름이 삼식이가 되버렸네요!”했다. 삼식이는 남편의 별칭이다. SNS에 남편 실명을 공개하는 게 불편해서 흔히 말하는 ‘삼 시 세 끼’ 집 밥 먹는 남편을 가리켜 ‘삼식이’로 표현한 것이다.
이름은 ‘성 아래에 붙여 다른 사람과 구별하는 명칭’이라고 한다. 부모가 지어 준 이름이 가장 많고 더러 개명한 이름도 있다. 그런데 이런 고유 이름 말고 붙여지는 별칭이나 애칭도 이름 효과를 주기도 한다. 하는 일 즉, 직업이 붙여지기도 하고 태명도 그렇다. 심지어 필자 남편처럼 밥 먹는 횟수가 이름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쉬운 예로 ‘골프 박세리’, 축구선수 이동국의 아들 ‘대박이’ 이시안 그리고 남편 ‘삼식이’.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를 소개하겠다. 어떤 여인이 중병에 걸려 한동안 무의식 상태에 빠져 있었다. 생사를 방황하고 있는데 갑자기 몸이 위로 오르는가 싶더니 하나님 앞에 서 있었다고 한다.
“너는 누구냐?”
“저는 삼식이의 부인입니다.”
“네 남편이 아니라 너는 누구냐?”
“저는 정우 엄마입니다.”
“네 자식이 아니라 너는 누구냐?”
“저는 강사입니다. 칼럼도 씁니다.”
“네 직업을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냐?”
“저는 기독교인입니다.”
“네 종교를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냐?”
“저는 교회에 열심히 다녔고 남편과 자식에게 충실했고 제 일도 열심히 했습니다.”
“나는 네가 무엇을 했는지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냐?”
결국 여인은 이 시험에 실패했다고 한다. 다시 이 세상으로 보내졌다고 한다. 병이 나은 후 여인의 삶은 많이 달라졌다고 한다.
필자는 암센터에서 갑상선 제거 수술을 했다. 4년간 추적 조사를 하던 중 갑상선 혹이 갑자기 커져 목 중간에 불록 튀어 나왔고 쉰 목소리가 났다. 당시 필자 몸 상태는 조금만 움직여도 피곤했고 원인을 알 수 없는 통증과 피부질환으로 매우 고통스러웠다. 그래서 의사의 권유로 암 확진을 받지 못한 채 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 암 여부를 확인, 판정하기로 한 것이다.
수술 대기실 안에는 필자 포함 여섯 명이 있었다. 간호사가 번호와 이름을 부른다.
“1234567. 홍길동님!”
“네, 폐암.”
“2234567 김삼순님!”
“네, 위암.”
“3334567, 이지수님!”
“네, 저는 갑상선..입니다. 아직 암이..”
그렇게 필자는 잠시 “갑상선!”이 되었다. 이 이름을 잠깐 사용(?)했지만 그때 필자가 느꼈던 감정을 지우는 데는 긴 시간이 걸렸다. ‘내 이름 뒤에 붙여진 나의 병명, 그리고 병명으로 답을 한다는 것!’ 만약 수술 중 세상을 떠난다면? 마지막으로 불러진 이름이 병명이 되는 것이 아닌가.
이제 필자는 ‘강한 정신력’이 몸을 이기는 나이는 아니다. 매일 아침 한 알의 약으로 몸을 일으키고 후유증을 이겨내면서 느낀다. ‘힘에 부치고 무거운 몸’이 ‘정신’을 지배하고 있는 것을. 그러나 필자 몸이 약해질수록 얻은 것이 더 많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태도에 ‘감사’하는 마음이 더해졌고, 이제 필자 ‘이름에 무엇을 붙일지’ 명쾌한 목표가 생겼다. ‘정우 엄마’가 아닌 ‘삼식이 부인’도 아닌 온전히 <나>를 표현하고 이 땅에 남길 수 있는 이름말이다.
필자가 믿는 하나님이 “너는 누구냐?”라고 물으실 때 필자는 무어라고 답을 할 수 있을까… Ⓒ이지수20190127
다시 SNS활동을 하려니 뭐부터 먼저 올려야 할까? 그동안 몇 안 되는 친구들에게 충실하지 못했던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까? 이런 저런 궁리를 하다가 평상시 필자 모습 그대로 표현한 사진 한 장을 올렸다. 필자가 차린 저녁밥상. 그리고 이렇게 글을 올렸다.
“방금 들어온 삼식씨가 김치전이 먹고 싶대서 맨들었어요!”
첫 댓글이 올라왔다.
“아직도 삼식입니까?”
댓글을 보고 얼마나 크게 웃었는지 모른다. 진짜 삼식이인 남편이 웃고 아들도 웃었다. 아들은 “엄마, 이제 아버지 이름이 삼식이가 되버렸네요!”했다. 삼식이는 남편의 별칭이다. SNS에 남편 실명을 공개하는 게 불편해서 흔히 말하는 ‘삼 시 세 끼’ 집 밥 먹는 남편을 가리켜 ‘삼식이’로 표현한 것이다.
이름은 ‘성 아래에 붙여 다른 사람과 구별하는 명칭’이라고 한다. 부모가 지어 준 이름이 가장 많고 더러 개명한 이름도 있다. 그런데 이런 고유 이름 말고 붙여지는 별칭이나 애칭도 이름 효과를 주기도 한다. 하는 일 즉, 직업이 붙여지기도 하고 태명도 그렇다. 심지어 필자 남편처럼 밥 먹는 횟수가 이름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쉬운 예로 ‘골프 박세리’, 축구선수 이동국의 아들 ‘대박이’ 이시안 그리고 남편 ‘삼식이’.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를 소개하겠다. 어떤 여인이 중병에 걸려 한동안 무의식 상태에 빠져 있었다. 생사를 방황하고 있는데 갑자기 몸이 위로 오르는가 싶더니 하나님 앞에 서 있었다고 한다.
“너는 누구냐?”
“저는 삼식이의 부인입니다.”
“네 남편이 아니라 너는 누구냐?”
“저는 정우 엄마입니다.”
“네 자식이 아니라 너는 누구냐?”
“저는 강사입니다. 칼럼도 씁니다.”
“네 직업을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냐?”
“저는 기독교인입니다.”
“네 종교를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냐?”
“저는 교회에 열심히 다녔고 남편과 자식에게 충실했고 제 일도 열심히 했습니다.”
“나는 네가 무엇을 했는지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냐?”
결국 여인은 이 시험에 실패했다고 한다. 다시 이 세상으로 보내졌다고 한다. 병이 나은 후 여인의 삶은 많이 달라졌다고 한다.
필자는 암센터에서 갑상선 제거 수술을 했다. 4년간 추적 조사를 하던 중 갑상선 혹이 갑자기 커져 목 중간에 불록 튀어 나왔고 쉰 목소리가 났다. 당시 필자 몸 상태는 조금만 움직여도 피곤했고 원인을 알 수 없는 통증과 피부질환으로 매우 고통스러웠다. 그래서 의사의 권유로 암 확진을 받지 못한 채 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 암 여부를 확인, 판정하기로 한 것이다.
수술 대기실 안에는 필자 포함 여섯 명이 있었다. 간호사가 번호와 이름을 부른다.
“1234567. 홍길동님!”
“네, 폐암.”
“2234567 김삼순님!”
“네, 위암.”
“3334567, 이지수님!”
“네, 저는 갑상선..입니다. 아직 암이..”
그렇게 필자는 잠시 “갑상선!”이 되었다. 이 이름을 잠깐 사용(?)했지만 그때 필자가 느꼈던 감정을 지우는 데는 긴 시간이 걸렸다. ‘내 이름 뒤에 붙여진 나의 병명, 그리고 병명으로 답을 한다는 것!’ 만약 수술 중 세상을 떠난다면? 마지막으로 불러진 이름이 병명이 되는 것이 아닌가.
이제 필자는 ‘강한 정신력’이 몸을 이기는 나이는 아니다. 매일 아침 한 알의 약으로 몸을 일으키고 후유증을 이겨내면서 느낀다. ‘힘에 부치고 무거운 몸’이 ‘정신’을 지배하고 있는 것을. 그러나 필자 몸이 약해질수록 얻은 것이 더 많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태도에 ‘감사’하는 마음이 더해졌고, 이제 필자 ‘이름에 무엇을 붙일지’ 명쾌한 목표가 생겼다. ‘정우 엄마’가 아닌 ‘삼식이 부인’도 아닌 온전히 <나>를 표현하고 이 땅에 남길 수 있는 이름말이다.
필자가 믿는 하나님이 “너는 누구냐?”라고 물으실 때 필자는 무어라고 답을 할 수 있을까… Ⓒ이지수20190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