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이야기 한 편 소개한다.

 구두쇠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 있었다. 하루는 구두쇠마을에서도 구두쇠 집안으로 유명한 허 씨네 며느리가 쫓겨났다는 소문이 났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허 씨네 며느리를 불러놓고 자초지종을 듣게 된다. 며느리의 설명이다.

“제가 장날에 찹쌀 팔러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고기집 주인이 고깃덩이 하나가 남았으니 저보고 사라는 거예요!”

“그래서 샀니?”

“아니요. 제가 누굽니까? 고기만 만져 보고 얼른 집에 와서 냄비에 손을 씻어 국을 끓여 아버님께 드렸다가 쫓겨났어요!”

“뭐라고 하면서 쫓겨 난건데?”

“가마솥에 손을 씻었다면 온 식구가 먹을 거라고 하면서 쫓겨났어요!”

“그래! 쫓겨나도 싸다 싸!”

“왜요?”

“우물에 손을 씻었다면 온 동네 사람들이 먹을 것 아니야!”

“네?”

한 번 듣고 웃어넘길 이야기지만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라는 메시지다.

 지난 설 연휴 기간에 뮤지컬 ‘라이언 킹’을 보러 갔다. 오페라극장에 도착했는데 공연 시간이 남아 점심을 먹기 위해 극장 옆 카페에 들렀다. 그런데 사람들이 많아서 주문 대기 줄이 길었고 빈 테이블이 없어 보였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들은 주문을 하고 자리를 둘러보기로 했다. 간혹 빈자리가 보여 가까이 가보면 가방이나 옷이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었다.

그 때 뒤에서 누군가 말했다.

“저기… 여기 앉으시면 됩니다.”

 40대로 보이는 한 남성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의자와 테이블을 옮기는 것이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이렇다. 그는 초등학생 딸과 아들이 함께 세 사람이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들이 앉은 테이블은 2인 테이블 두 개가 붙여진 4인 테이블이었다. 그런데 필자가 자리를 찾아다니는 모습을 보고 테이블을 분리해 비켜주는 것이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기다렸다가 자리가 나면 앉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여기 앉으세요! 저는 거의 다 먹었습니다.”

 몇 번을 사양했지만 오히려 그는 공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서둘러 식사하라고 말했다. 보답할 게 없어서 준비해 간 과일도시락으로 고마움을 표현했다. 다행히 아이들이 좋아하며 잘 먹어 주었다. 그 때 그가 아주 작지만(필자가 듣고 미안해 할까봐) 힘 있는 목소리로 두 자녀에게 말했다.
“아빠는 서서 먹어도 돼! 아빠는 다른 사람이 자리가 없어서 힘들 때 양보하는 게 더 좋아!”

“응, 알아. 아빠!”

그는 자녀들에게 ‘양보’라고 표현했지만 필자가 받은 것은 ‘최고의 배려’ 였다.

 ‘양보’는 사전적 의미로 길이나 자리 그리고 물건 따위를 사양하여 남에게 미루어 주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자리 양보다. 달리 말하면 양보는 상대방에게 물리적 행동을 하는 것인데 이를 받는 입장에서는 행동보다 마음이 먼저 느껴지는 것이다. 바로 ‘배려’다. 배려는 ‘도와주거나 보살펴 주려고 마음을 쓰는 것’이라고 사전에 나온다. 또 배려(配慮) 한자풀이는 ‘짝처럼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것’으로 더 쉽고 재밌다.

 자녀를 키우는 부모 입장에서 말로만 “양보하고 배려해라!”가 아니라 행동하는 그의 모습에 감동했다. 더구나 처음 보는 사람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음식을 서서 먹는 아버지. 이를 안타까워하는 아이들에게 “양보하는 게 더 좋아!”라고 말하는 모습은 결코 어떤 교육의도를 가지고 하는 행동이 아니었다. 누가 보아도 그에게는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 있었다.

 “농작물은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말이 있다.농작물이 잘 성장하려면 농부의 잦은 발걸음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여기서 발은 오고가며 움직이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행동’을 상징한다.

 그렇다면 자식은 부모의 무엇을 듣고 자라겠는가. 당연한 말이지만 백 번의 말보다 행동하는 ‘몸소 실천’이야말로 가장 쉽고 빠르고 강력한(?) 가르침일 것이다.

“엄마, 아저씨가 우리 집 앞을 청소하고 있어요?”

“무슨 말이야?”

 아들 말에 창밖을 내다보니 정말 한 아저씨가 낙엽을 쓸고 있는 것이다. 이 아저씨는 우리 동네 도로변과 주위를 청소하는 일을 맡고 있다. 평소 같으면 고맙다고 말할 텐데 생각나는 일이 있어 선뜻 나가지 못했다.

“엄마! 왜 가만히 계세요?”

“아, 그게 말이야… 고맙다고 인사하면 다음에 또 청소해 주실 것 같아서.”

 아들에게 설명한 내용이다. 지난겨울 매섭게 추운 어느 날 일이다. 그 환경미화원 아저씨가 동네 주변을 다니며 쓰레기를 치우고 있었다. 마침 그 때 친정엄마가 보낸 택배가 왔는데 지인들과 나누어 먹으라는 시루떡 한 박스였다. 그래서 추위에 수고하는 아저씨를 보고 마음에 걸려 시루떡 한 장을 드린 일이다. 그러니 시루떡 한 장에 너무 후한(?) 표현을 받는 것이다.

“나는 무얼 바라고 드린 게 아닌데.”

“엄마! 그럼 쌤쌤(same! same!)이네.  엄마가 다른 사람을 배려했는데 또 다른 사람이  엄마를 배려하는 거네요!”

“호호호. 그게 그렇게 되나?”

 살면서 배려하는 이들을 더러 만난다. 이들은 열이면 열이 참 선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런 게 일상이 주는 소소한 행복이 아닐까 한다. 삶이 갈수록 팍팍하지만 나부터, 작은 것부터, 지금부터 일상에 최고(?)의 배려를 담아봤으면 한다.

이렇게 일상은 일생이 된다.

Ⓒ20180310이지수(jslee3082@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