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연금 수요 잡자'…운용사들 현물형 ETF 출시 봇물
최근 자산운용사들이 퇴직연금 시장을 잡기 위해 현물형 상장지수펀드(ETF) 출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퇴직연금 계좌에선 선물형 ETF를 대부분 담을 수 없어서다. 일각에선 금융소비자보호법(금소법) 시행 이후 고난도 투자상품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면서 현물형 ETF를 출시하려는 움직임이 두드러지고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14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삼성자산운용은 지난 9일 'KODEX 미국S&P500TR' ETF와 'KODEX 미국나스닥100TR' ETF 등 2종을 출시했다. 각각 미국 S&P500 지수와 나스닥100 지수를 추종하는 ETF다. 삼성운용은 이미 같은 지수를 추종하는 'KODEX 미국S&P500선물(H)'과 'KODEX 미국나스닥100선물(H)'의 ETF를 운용중이었다. 선물로 운용하는 상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물을 직접 담는 방식의 ETF를 또 다시 상장시킨 것이다.

KB자산운용은 같은 날 'KBSTAR 미국 S&P500' ETF와 'KBSTAR 유로스탁스50(H)' ETF를 상장시켰다. 미래에셋자산운용 역시 이날 'TIGER 미국테크TOP10 INDXX' ETF와 'TIGER 미국필라델피아반도체나스닥' ETF를 상장시켰다. 한날 한시에 3곳의 자산운용사에서 일제히 현물을 담는 해외주식형 ETF를 선보인 것이다.

자산운용사 입장에선 선물형 ETF가 현물형 ETF보다 운용 편의성이 높다. 현물형 ETF를 운용한다면 지수 내 정해진 비중대로 종목들을 실제로 매수·매도해야 하지만, 선물형 ETF는 지수선물을 매수·매도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S&P500 지수의 ETF를 현물형으로 운용한다면 500개 종목의 유상증자와 상장폐지, 지수편출·입을 일일히 모니터링하며 추종해야 한다. 하지만 선물형 ETF를 운용한다면 선물 자체에 이같은 이벤트가 모두 반영이 되기 때문에 지수선물을 매수·매도하기만 하면 된다. 특히 해외지수형 ETF의 경우엔 각 종목에 대한 정보 반영이 국내보다 어려운 측면이 있기 때문에 선물로 운용하는 것이 편리한 측면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산운용사들이 잇따라 현물형 ETF를 출시하고 있는 것은 퇴직연금의 수요를 잡기 위한 것이라는 시각이 우세하다. 현재 퇴직연금 계좌로는 상당수의 선물형 ETF(파생상품의 위험평가액이 40%를 초과할 경우)는 담을 수 없게돼 있는 탓이다. 고용노동부·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퇴직연금의 총 적립금은 255조 5000억원으로 1년전(221조 2000억원)보다 34조 3000억원(15.5%) 증가했다. 지속적으로 커지고 있는 퇴직연금 시장에서 시장 지배력을 키우려면 현물형 ETF를 출시하는 것이 유리하다.

박수민 신영증권 연구원은 "퇴직연금 내 해외 상품 수요가 확대되고 이를 둘러싼 경쟁이 격화됨에 따라 동일한 기초 자산을 기반으로 하는 기존 상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물 운용 상품 상장이 이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달 말부터 시행된 금소법 역시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금소법 시행으로 고난도 투자상품에 대한 규제도 강화되면서 선물형 보다는 현물형 ETF를 출시하는 기조가 강해졌다는 것이다.

한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퇴직연금에서 선물형 ETF를 담을 수 없는 것도 문제지만 새로 금소법이 시행되면서 파생상품의 판매가 어려워진 것도 영향을 미친 것 같다"며 "현물 ETF는 운용이 복잡하지만 업계에선 되도록 선물이 아닌 현물운용 쪽으로 가자는 추세"라고 귀띔했다.

이슬기 기자 surug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