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시, 한시로 만나다] 낙화, 조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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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닷컴 더 라이피스트
낙화
조지훈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어하노니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태헌의 한역]
落花(낙화)
花落何恨風飄飄(화락하한풍표표)
簾外疏星一二消(염외소성일이소)
杜鵑鳴後遠山薄(두견명후원산박)
應滅燭火憐花落(응멸촉화련화락)
落花殘影照庭中(낙화잔영조정중)
白色推窓稀微紅(백색퇴창희미홍)
幽人傷心嫌見知(유인상심혐견지)
花落淸晨欲泣悲(화락청신욕읍비)
[주석]
* 落花(낙화) : 낙화, 지는 꽃, 진 꽃.
花落(화락) : 꽃이 (떨어)지다. / 何恨(하한) : 어찌 ~을 한스러워하랴! 어찌 ~을 탓하랴! / 風飄飄(풍표표) : 바람이 나부끼다.
簾外(염외) : 주렴 밖. / 疏星(소성) : 성긴 별. / 一二消(일이소) : 하나 둘씩 사라지다.
杜鵑(두견) : 귀촉도(歸蜀道), 소쩍새. / 鳴後(명후) : 울고 난 후. / 遠山薄(원산박) : 먼 산이 다가오다.
應(응) : 응당. / 滅燭火(멸촉화) : 촛불을 끄다. / 憐花落(연화락) : 꽃이 지는 것이 아깝다, 꽃이 지는 것을 안타까워하다. 역자는 원시의 “꽃이 지는데”를 “꽃이 지니까”, “꽃이 지는 것이 아까우니까” 정도로 이해하였다. 그리하여 이 대목을 한역하면서 당(唐)나라 시인 장구령(張九齡)의 <望月懷遠(망월회원)>에 보이는 시구(詩句) “滅燭憐光滿(멸촉련광만)”을 참고하였다. 인용한 시구는 “촛불을 꺼야하리, 달빛 가득한 게 아까우니”로 번역된다.
落花殘影(낙화잔영) : 지는 꽃의 (스러지는) 그림자. / 照庭中(조정중) : 뜰(안)에 비치다. 원시의 “어리어”의 원형 “어리다”는 빛이나 그림자, 모습 따위가 희미하게 비친다는 뜻이다.
白色(백색) : 흰빛, 흰빛의, 하얀. / 推窓(퇴창) : 미닫이 (창문). / 稀微紅(희미홍) : 희미하게 붉다. 원시의 “우련”은 “희미하게”라는 뜻이다.
幽人(유인) : 은자. 원시의 “묻혀서 사는 이”를 간략히 표현한 말이다. / 傷心(상심) : 애잔한 마음. 원시의 “고운 마음”을, 상황을 고려하여 역자가 임의로 바꾸어본 말이다. / 嫌見知(혐견지) : 알려지게 되는 것을 싫어하다, 알게 하기 싫다. 원시의 “아는 이 있을까 / 저어하노니”를 간략히 표현한 말이다.
淸晨(청신) : 맑은 새벽, 아침. / 欲(욕) : ~을 하고자 하다, ~을 하고 싶다. / 泣悲(읍비) : 울며 슬퍼하다, 울다.
[한역의 직역]
낙화
꽃이 진다고 어찌
나부끼는 바람 탓하랴
주렴 밖 성긴 별도
하나 둘 스러지고
소쩍새 울음 뒤에
먼 산이 다가서는데
촛불을 꺼야하리,
꽃 지는 게 아까우니…
지는 꽃 그림자
뜰에 비치어
하얀 미닫이가
희미하게 붉구나
은자의 애잔한 맘
알게 하기 싫나니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한역 노트]
애초에 역자는 이 시를 4월말이나 5월초에 소개할 계획이었는데, 계절의 시계 침이 너무도 빨리 돌아 부득이 4월 이즈음에 선보이게 되었다. 따지고 보면 계절의 눈금이 예전에 비해 얼추 한 달은 앞당겨진 듯하다. 2월과 3월 두 달 동안을 거의 외출도 하지 못한 역자 입장에서는 올 봄의 3분지 2나 놓쳐버리고 만 셈이다. 매화 향기를 맡거나 벚꽃 그늘에 앉아 쉬는 평범한 호사(好事)조차 누리지 못하고, 봄을 보낼 준비부터 해야 하게 생겼으니 그럴 수밖에……
오늘 소개하는 조지훈 시인의 이 <낙화>는 한 마디로 ‘낙화(落花)’라는, 사라지는 것의 아름다움에서 촉발된 삶의 비애를 노래한 시이다. 시에서, 별[星]도 스러지고 먼 산이 다가온다고 한 것은, 동이 트고 있음을 말한 것이다. 멀지 않아 세상이 환해지고, 뜰에 꽃이 지는 모습이 어릴 터라 시인은 이제 촛불마저 끈다. 생을 마감하는 낙화가 희미하게, 그러나 아름답게 미닫이에 비치며 은자인 시인에게 비애의 심사를 격발시킨다. 꽃이 지는 아침에 시인이 울고 싶게 된 까닭은 바로 이 때문이다. 아름답게 사라지는 것에서도 이렇게 비애가 묻어나니, 비애는 어쩌면 사라지는 것들이 남기는 여운(餘韻)이라고 할 수도 있을 듯하다.
비애를 그렇게 간주하더라도 이 시의 가장 핵심적인 화두(話頭)는 아무래도 “꽃이 지기로소니 / 바람을 탓하랴”로 보아야 한다. 바람이 조금 덜하면 꽃이 며칠 더 버틸 수 있을 것임에 바람을 탓함 직도 하지만, 시인은 그저 담담하게 받아들이기로 한다. 이런 달관적인 자세가 꽃이 질 때의 감회인 비애와 어우러져 빚어내는 풍경은, ‘처절한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어쩌면 시인은 우리네 인생 역시 저 꽃잎처럼 아름답게 스러져야 하는 것임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조지훈 시인보다 10 여년 후배가 되는 이형기 시인이 동일한 제목의 시에서,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라고 한 대목이, 조지훈 시인의 이 시와 훌륭한 짝이 된다고 할 수 있겠다. 사라짐이 설혹 비애를 여운으로 남기더라도, 그것이 모든 존재의 숙명인 이상, 아름다울 수 있다면 여기에 다시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역자는 시인이 구현한 달관의 자세를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탓하지 않음’이라는 말을 오래도록 마음속에 머물려두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크고 작게 토해내는 불평과 불만은, 따지고 보면 거개가 그 어떤 ‘탓’과 연결이 된다. 그리고 그 탓은 당연히 ‘나’가 아닌 ‘남’을 향하기 일쑤이다. 바로 여기에 우리 인격의 딜레마가 있다. 일찍이 공자(孔子)께서는, “군자는 자기에게서 찾고, 소인은 남에게서 찾는다.[군자구저기(君子求諸己) 소인구저인(小人求諸人)]”고 하였다. 누군가가 군자인지, 소인인지를 알려면 딱 한 가지만 보면 된다. 곧, 어떤 일에 대해 책임을 지는 자세 그 하나만 보면, 그가 군자인지 소인인지를 단번에 알 수 있다. 군자는 자신의 과오나 허물은 말할 것도 없고 아랫사람의 그것까지, 심지어는 윗사람의 그것까지도 자기 탓으로 돌린다. 이에 반해 소인은, 명백한 자신의 과오나 허물조차도 타인 탓으로 돌리며 궁색하고 누추한 모습을 보인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도자들이 군자가 아닌 나라는 불행하였다. 그리하여 예전의 훌륭한 지도자들은 심지어 천재지변까지도 본인의 부덕(不德)으로 여겼다. 꽃이 지듯, 권세(權勢)도 진다. 꽃이 지면 슬프듯, 권세가 져도 슬플 것이다. 그러나 제 할 일 다 한 꽃의 ‘사라짐’이 아름답듯, 소임을 다한 권세의 ‘사라짐’ 또한 아름다울 것이다. 인류의 역사가 이를 증명해 왔다. 초야의 서생일 뿐인 역자가 무엇 때문에 다시 허언(虛言)을 더하겠는가!
9연 18행으로 이루어진 원시를 역자는 8구의 칠언고시로 재구성하였다. 한역시는 매구에 압운하였으며, 2구마다 운을 달리 하였다. 그리하여 이 시의 압운자는 ‘飄(표)’·‘消(소)’, ‘薄(박)’·‘落(락)’, ‘中(중)’·‘紅(홍)’, ‘知(지)’·‘悲(비)’가 된다.
2021. 4. 12.
<한경닷컴 The Lifeist> 강성위(hanshi@naver.com)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독자 문의 : thepen@hankyung.com
조지훈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어하노니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태헌의 한역]
落花(낙화)
花落何恨風飄飄(화락하한풍표표)
簾外疏星一二消(염외소성일이소)
杜鵑鳴後遠山薄(두견명후원산박)
應滅燭火憐花落(응멸촉화련화락)
落花殘影照庭中(낙화잔영조정중)
白色推窓稀微紅(백색퇴창희미홍)
幽人傷心嫌見知(유인상심혐견지)
花落淸晨欲泣悲(화락청신욕읍비)
[주석]
* 落花(낙화) : 낙화, 지는 꽃, 진 꽃.
花落(화락) : 꽃이 (떨어)지다. / 何恨(하한) : 어찌 ~을 한스러워하랴! 어찌 ~을 탓하랴! / 風飄飄(풍표표) : 바람이 나부끼다.
簾外(염외) : 주렴 밖. / 疏星(소성) : 성긴 별. / 一二消(일이소) : 하나 둘씩 사라지다.
杜鵑(두견) : 귀촉도(歸蜀道), 소쩍새. / 鳴後(명후) : 울고 난 후. / 遠山薄(원산박) : 먼 산이 다가오다.
應(응) : 응당. / 滅燭火(멸촉화) : 촛불을 끄다. / 憐花落(연화락) : 꽃이 지는 것이 아깝다, 꽃이 지는 것을 안타까워하다. 역자는 원시의 “꽃이 지는데”를 “꽃이 지니까”, “꽃이 지는 것이 아까우니까” 정도로 이해하였다. 그리하여 이 대목을 한역하면서 당(唐)나라 시인 장구령(張九齡)의 <望月懷遠(망월회원)>에 보이는 시구(詩句) “滅燭憐光滿(멸촉련광만)”을 참고하였다. 인용한 시구는 “촛불을 꺼야하리, 달빛 가득한 게 아까우니”로 번역된다.
落花殘影(낙화잔영) : 지는 꽃의 (스러지는) 그림자. / 照庭中(조정중) : 뜰(안)에 비치다. 원시의 “어리어”의 원형 “어리다”는 빛이나 그림자, 모습 따위가 희미하게 비친다는 뜻이다.
白色(백색) : 흰빛, 흰빛의, 하얀. / 推窓(퇴창) : 미닫이 (창문). / 稀微紅(희미홍) : 희미하게 붉다. 원시의 “우련”은 “희미하게”라는 뜻이다.
幽人(유인) : 은자. 원시의 “묻혀서 사는 이”를 간략히 표현한 말이다. / 傷心(상심) : 애잔한 마음. 원시의 “고운 마음”을, 상황을 고려하여 역자가 임의로 바꾸어본 말이다. / 嫌見知(혐견지) : 알려지게 되는 것을 싫어하다, 알게 하기 싫다. 원시의 “아는 이 있을까 / 저어하노니”를 간략히 표현한 말이다.
淸晨(청신) : 맑은 새벽, 아침. / 欲(욕) : ~을 하고자 하다, ~을 하고 싶다. / 泣悲(읍비) : 울며 슬퍼하다, 울다.
[한역의 직역]
낙화
꽃이 진다고 어찌
나부끼는 바람 탓하랴
주렴 밖 성긴 별도
하나 둘 스러지고
소쩍새 울음 뒤에
먼 산이 다가서는데
촛불을 꺼야하리,
꽃 지는 게 아까우니…
지는 꽃 그림자
뜰에 비치어
하얀 미닫이가
희미하게 붉구나
은자의 애잔한 맘
알게 하기 싫나니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한역 노트]
애초에 역자는 이 시를 4월말이나 5월초에 소개할 계획이었는데, 계절의 시계 침이 너무도 빨리 돌아 부득이 4월 이즈음에 선보이게 되었다. 따지고 보면 계절의 눈금이 예전에 비해 얼추 한 달은 앞당겨진 듯하다. 2월과 3월 두 달 동안을 거의 외출도 하지 못한 역자 입장에서는 올 봄의 3분지 2나 놓쳐버리고 만 셈이다. 매화 향기를 맡거나 벚꽃 그늘에 앉아 쉬는 평범한 호사(好事)조차 누리지 못하고, 봄을 보낼 준비부터 해야 하게 생겼으니 그럴 수밖에……
오늘 소개하는 조지훈 시인의 이 <낙화>는 한 마디로 ‘낙화(落花)’라는, 사라지는 것의 아름다움에서 촉발된 삶의 비애를 노래한 시이다. 시에서, 별[星]도 스러지고 먼 산이 다가온다고 한 것은, 동이 트고 있음을 말한 것이다. 멀지 않아 세상이 환해지고, 뜰에 꽃이 지는 모습이 어릴 터라 시인은 이제 촛불마저 끈다. 생을 마감하는 낙화가 희미하게, 그러나 아름답게 미닫이에 비치며 은자인 시인에게 비애의 심사를 격발시킨다. 꽃이 지는 아침에 시인이 울고 싶게 된 까닭은 바로 이 때문이다. 아름답게 사라지는 것에서도 이렇게 비애가 묻어나니, 비애는 어쩌면 사라지는 것들이 남기는 여운(餘韻)이라고 할 수도 있을 듯하다.
비애를 그렇게 간주하더라도 이 시의 가장 핵심적인 화두(話頭)는 아무래도 “꽃이 지기로소니 / 바람을 탓하랴”로 보아야 한다. 바람이 조금 덜하면 꽃이 며칠 더 버틸 수 있을 것임에 바람을 탓함 직도 하지만, 시인은 그저 담담하게 받아들이기로 한다. 이런 달관적인 자세가 꽃이 질 때의 감회인 비애와 어우러져 빚어내는 풍경은, ‘처절한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어쩌면 시인은 우리네 인생 역시 저 꽃잎처럼 아름답게 스러져야 하는 것임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조지훈 시인보다 10 여년 후배가 되는 이형기 시인이 동일한 제목의 시에서,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라고 한 대목이, 조지훈 시인의 이 시와 훌륭한 짝이 된다고 할 수 있겠다. 사라짐이 설혹 비애를 여운으로 남기더라도, 그것이 모든 존재의 숙명인 이상, 아름다울 수 있다면 여기에 다시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역자는 시인이 구현한 달관의 자세를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탓하지 않음’이라는 말을 오래도록 마음속에 머물려두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크고 작게 토해내는 불평과 불만은, 따지고 보면 거개가 그 어떤 ‘탓’과 연결이 된다. 그리고 그 탓은 당연히 ‘나’가 아닌 ‘남’을 향하기 일쑤이다. 바로 여기에 우리 인격의 딜레마가 있다. 일찍이 공자(孔子)께서는, “군자는 자기에게서 찾고, 소인은 남에게서 찾는다.[군자구저기(君子求諸己) 소인구저인(小人求諸人)]”고 하였다. 누군가가 군자인지, 소인인지를 알려면 딱 한 가지만 보면 된다. 곧, 어떤 일에 대해 책임을 지는 자세 그 하나만 보면, 그가 군자인지 소인인지를 단번에 알 수 있다. 군자는 자신의 과오나 허물은 말할 것도 없고 아랫사람의 그것까지, 심지어는 윗사람의 그것까지도 자기 탓으로 돌린다. 이에 반해 소인은, 명백한 자신의 과오나 허물조차도 타인 탓으로 돌리며 궁색하고 누추한 모습을 보인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도자들이 군자가 아닌 나라는 불행하였다. 그리하여 예전의 훌륭한 지도자들은 심지어 천재지변까지도 본인의 부덕(不德)으로 여겼다. 꽃이 지듯, 권세(權勢)도 진다. 꽃이 지면 슬프듯, 권세가 져도 슬플 것이다. 그러나 제 할 일 다 한 꽃의 ‘사라짐’이 아름답듯, 소임을 다한 권세의 ‘사라짐’ 또한 아름다울 것이다. 인류의 역사가 이를 증명해 왔다. 초야의 서생일 뿐인 역자가 무엇 때문에 다시 허언(虛言)을 더하겠는가!
9연 18행으로 이루어진 원시를 역자는 8구의 칠언고시로 재구성하였다. 한역시는 매구에 압운하였으며, 2구마다 운을 달리 하였다. 그리하여 이 시의 압운자는 ‘飄(표)’·‘消(소)’, ‘薄(박)’·‘落(락)’, ‘中(중)’·‘紅(홍)’, ‘知(지)’·‘悲(비)’가 된다.
2021. 4. 12.
<한경닷컴 The Lifeist> 강성위(hansh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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