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 피해자 인권, 가해자 인권
2016년 4월 미국에서 연수 중일 때 한국과는 상당히 다른 범죄 접근 방식에 놀란 적이 있다. 텍사스주립대 오스틴 캠퍼스의 작은 개울에서 여성 시신 한 구가 발견됐다. 무용을 전공하던 신입생 하루카 와이저였다.

1966년 이후 50년 만에 발생한 교내 살인 사건이어서 매스컴의 큰 관심을 끌었다. 경찰은 폐쇄회로TV(CCTV)를 샅샅이 뒤지며 단서를 찾았다. CCTV엔 와이저가 사망 전날 밤 무용 연습을 마친 뒤 기숙사를 향해 걷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 앳돼 보이는 남성이 자전거를 탄 채 와이저 뒤를 따라갔다. 그가 다시 CCTV에 얼굴을 드러낸 건 2시간 가까이 지난 뒤였다. 와이저 소유로 보이는 가방을 멘 채였다.

美선 미성년 살인 용의자 공개

경찰은 주저 없이 방송과 소셜미디어에 공개 수배령을 내렸다. 인상착의 외에 용의자를 특정할 만한 단서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를 알아본 사람이 등장했다. 지역 소방관이었다. 경찰은 노숙인 쉼터에서 17세의 미카엘 크라이너를 체포했다. 경찰 책임자는 즉각 기자회견을 열었다. 용의자 이름의 철자를 하나씩 부른 뒤 끝까지 책임을 묻겠다고 했다. 유가족에겐 깊은 애도를 표했다.

재판 과정은 생중계됐다. 크라이너는 미성년자여서 사형을 피했지만, 종신형에 처해진 뒤 여전히 복역 중이다. 범행 초기에 공개 수배하지 않았다면 자칫 놓쳤을지도 모를 일이다.

지난달엔 뉴욕 맨해튼의 한 거리에서 마주 오던 필리핀 여성을 폭행한 남성의 동영상이 화제를 모았다. 그는 아무 이유도 없이 피해자를 발로 걷어찬 뒤 머리를 짓밟았다. “당신은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You don’t belong here)”고 소리쳤다. 아시아계를 겨냥한 명백한 증오 범죄였다.

경찰은 현상금과 함께 CCTV에 찍힌 범인의 얼굴을 공개했다. 하루 반나절 만에 잡힌 범인은 38세의 브랜던 엘리엇이었다. 다른 범죄로 가석방을 받은 상태에서 노숙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뉴욕 검찰은 기자회견에서 증오 범죄에 대한 가중 처벌 조항을 들어 엘리엇이 최고 25년형에 처해질 수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피해자를 포함한 모든 아시아계 미국인은 분명히 미국의 일부분”이라고 달랬다.

한국에선 범인이나 용의자의 신상 공개 여부가 여전히 큰 관심사다. 범죄 행위를 저지른 게 99.9% 확실해도 얼굴 공개는 전혀 다른 이야기다.

국민 알권리·안전이 핵심 돼야

올해 2월 초 경북 구미의 한 빌라에서 숨진 채 발견된 3세 여아 사건을 놓고서도 그랬다. 피해 아동의 생전 얼굴이 방송에 노출됐지만, 국민은 여전히 용의자 얼굴을 모른다. 사망 전 아이의 행적을 온전히 아는 것이 더 쉽지 않다.

공분을 산 ‘정인이 사건’도 마찬가지였다. 아동 학대범인 양부모의 얼굴은 물론 이름도 공개되지 않았다. 범인들은 아직도 A씨·B씨일 뿐이다. 대한아동학대방지협회에 따르면 한국에서 아동학대 살인 사건과 관련해 가해자 신상이 공개된 적은 한 번도 없다.

한국은 ‘특정강력범죄의 처벌에 관한 특례법’ 제8조에 신상 공개의 근거를 두고 있다. 매우 드물게 열리는 신상정보 공개심의위원회가 범죄 수법이 특별히 흉악하다고 판단해야 한다. 공개 사례는 손에 꼽을 정도다. 공개 방식 역시 경찰 출두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노출하는 식이다. 전 남편을 살해하고 사체를 훼손한 고유정이 신상 공개 명령에도 긴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전부 가릴 수 있었던 배경이다.

국민의 알권리와 안전을 위해 가해자 신상 공개 원칙에 대한 재논의가 필요한 것 같다. 우리보다 ‘인권 역사’가 깊은 선진국 사례를 참고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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