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가 최근 외국인 투자자들을 대상으로 IR를 하면서 가장 강조하는 말은 ‘쇼핑 1등’이다. 한성숙 대표는 지난달 말 주주서한에서 “네이버가 지난해 거래액 28조원을 달성해 국내 e커머스(전자상거래) 시장 1위 지위를 확고히 했다”고 말했다. 규제에 대한 우려로 ‘1등 발언’을 자제해왔던 네이버의 기업 문화를 감안하면 이례적이라는 게 IT(정보기술) 업계의 평가다.
160조원 규모의 국내 e커머스 시장을 잡기 위한 네이버와 쿠팡의 다툼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 ‘네·쿠 전쟁’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사사건건 대립하는 양상이다. 국내 사업을 최대한 ‘캐시 카우’로 키워놔야 해외 진출 등 신규 영역 진출에도 속도를 낼 수 있다는 점에서 두 ‘디지털 공룡’들의 경쟁은 숙명에 가깝다는 평가가 나온다.
무섭게 성장한 디지털 쇼핑의 강자들
외형 면에선 네이버가 압도적이다. 공정거래법상 일찌감치 대기업집단에 지정됐다. 공정위에 따르면 네이버 소속회사는 43개이며, 작년 말 기준 자산 총액은 9조5000억원 가량이다. 일본, 중국(홍콩 포함), 베트남, 미국, 중국, 독일, 프랑스 등에 진출해 있다. 이에 비해 쿠팡의 지난해 자산 규모는 약 5조7000억원이다. 쿠팡 한국법인의 모회사로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된 쿠팡Inc는 한국 외에 미국, 중국, 싱가포르 법인을 자회사로 두고 있으며, 쿠팡 한국법인의 자회사는 9개다.실적 역시 네이버 우위다. 검색 광고 등이 핵심 수입원인 네이버의 지난해 영업수익은 5조3041억원으로 전년 대비 9479억원을 더 벌었다. 당기순이익은 2019년 3968억원에서 지난해 8449억원으로 2배 가량 증가했다. 네이버의 쇼핑 플랫폼인 스마트스토어의 거래액은 지난해 약 17조원 가량이지만, 네이버를 거쳐가는 모든 쇼핑 거래를 합한 금액은 약 28조원에 달한다.
쿠팡은 지난해 13조1940억원의 매출에 5042억원 가량의 영업적자를 기록했다. 매출은 전년 대비 93% 증가할 정도로 급성장했지만, 여전히 적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쿠팡의 연간 거래액은 지난해 약 24조원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미래 성장 가치를 보여주는 시가총액 측면에선 쿠팡이 앞서 있다. 21일 기준으로 쿠팡과 네이버의 시총은 각각 81조7250억원, 62조5022억원이다. 하지만 한때 100조원까지 치솟았던 쿠팡 주가가 하락 추세인데 비해 네이버는 웹툰 등 신규 사업에 성과를 내면서 주가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네이버의 핵심 고리 공격하는 쿠팡
현재 ‘스코어’로는 현격히 앞서 있음에도, 네이버가 쿠팡의 진격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검색-쇼핑-결제’로 이어지는 네이버의 핵심 사업 모델을 위협하고 있어서다. 이와 관련해선, 한 대표가 주주 서한에서 설명한 네이버의 BM(비즈니스 모델)을 살펴봐야 한다. “네이버는 커머스 분야에서 이용자의 구매 경험과 사업자의 판매 활동이 매끄럽게 이어지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성장해왔다”며 “상품 검색 시 가격을 비교해주는 서비스로 시작해 자체 솔루션으로 결제까지 완료하는 쇼핑 흐름을 만들어 왔다”쿠팡이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 분석을 동원해 ‘쇼핑 검색’을 강화하고 있는 것은 네이버 입장에선 BM의 첫 번째 고리를 끊기는 것과 같은 위협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쇼핑에 관한 정보 검색을 네이버가 아니라 쿠팡에서 할수록 네이버의 핵심 수입원인 검색 광고 수입이 줄어들 수 밖에 없다는 얘기다. 네이버는 소비자와 판매업체를 연결해주는 플랫폼 사업자다. 네이버 스마트스토어 입점업체는 약 42만개에 달한다.
인공지능, 빅데이터 기술의 대결
쿠팡은 검색 수요를 늘리기 위해 크게 세 가지 ‘무기’를 활용하고 있다. 솔직한 리뷰, SDP(Single Detail Page) 서비스를 통한 개인 맞춤형 상품 추천, 쿠팡의 PB 브랜드 ‘탐사’를 활용한 가격 경쟁력 등이다. 약 500만 종의 상품을 직접 매입해 이용자 집 앞까지 배송해주는 쿠팡만이 할 수 있는 서비스다. 상품 판매 통로를 제공할 뿐, 판매자의 영업 방식 등에 개입하기 어려운 네이버의 단점을 십분 파고든 전략이다.리뷰(상품평)가 대표적이다. 쿠팡과 경쟁 관계인 e커머스 업체 상품본부장은 “네이버에 비해 쿠팡의 최대 강점은 상품 페이지에 클릭 유도형 장치들이 없어 매우 간명한 데다 소비자들이 상품평을 마치 블로그를 작성하듯이 자신의 경험담을 솔직히 적는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네이버의 리뷰들이 ‘좋아요’ 같은 단답형 위주인 것과 대조적이다.
쿠팡은 소비자들이 가격 만큼이나 다른 사람들의 소비 경험을 구매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다는 데 주목했다. 이를 위해 상품을 구매한 소비자만 평가를 남길 수 있도록 해놨다. ‘댓글 알바’를 고용한 상품평을 원천 차단했다. 실명으로 리뷰를 단 소비자에겐 인센티브를 부여함으로써 솔직한 평가를 남기도록 유도하고 있다. 긍정 상품평 베스트와 비판 상품평 베스트를 나란히 보여줘 소비자들로 하여금 균형된 판단을 하도록 도와주고 있는 것도 쿠팡 리뷰의 특징이다.
쿠팡 관계자는 “‘리뷰어신뢰도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며 “머신러닝으로 학습한 인공지능이 구매자로 가장해 댓글을 남기는 이들을 최대한 사전에 걸러낸다”고 설명했다. 쿠팡은 상품 정보에다 상품평 데이터들을 결합해 개인에게 최적화된 상품을 추천하는 서비스를 고도화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수많은 상품평을 일일이 읽어보지 않아도 ‘스마트 필터’ 기능을 활용해 관심 키워드를 등록해 놓으면 관련 콘텐츠만 자동검색 되도록 했다. 쿠팡의 상품 추천 시스템은 소비자들의 사용 유형 데이터를 AI가 학습해 매일 3억건 이상의 검색 결과를 고객에게 맞춤형으로 제공하는 방식이다. 넘쳐나는 검색 결과 탓에 선택 장애에 빠진 이용자들을 위해 같은 상품 중 가격, 품질, 배송 등을 비교해 이 중 가장 좋은 상품을 노출하는 SDP(Single Detail Page) 서비스가 쿠팡이 내세우는 경쟁력 중 하나다. 쿠팡 관계자는 “고객이 궁금한 상품이 있을 때 포털이 아닌 쿠팡에서 정보를 찾아보도록 하는 원동력”이라고 말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네이버는 상생에 초점
쿠팡이 소비자 편익에 집중하는 것에 비해 네이버는 소상공인를 지원하는 ‘상생’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빠른 정산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대표적이다. 네이버는 스마트스토어 판매자들을 대상으로 배송 완료 다음날 판매대금 전액을 지급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시작한 빠른 정산 서비스를 고도화하면서 지급 시기를 앞당기고, 정산 금액도 90%에서 100%로 확대했다. 약 4개월 간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위험 거래 및 판매자를 선별하는 위험감지시스템 덕분이라는 게 네이버의 설명이다.‘42만개의 스마트스토어’는 네이버가 수많은 소상공인들의 온라인 창업 통로임을 잘 보여주는 숫자다. 전자상거래 업체 관계자는 “쿠팡 오픈마켓을 비롯해 G마켓, 11번가 등은 어느 정도 규모가 되는 전문 업체들의 리그”라고 한다면 “네이버는 초기 창업자나 1인 창업자에 어울리는 플랫폼”이라고 말했다.
동네시장의 디지털화, 오프라인 SME들의 글로벌 진출 지원 등은 네이버가 ‘프로젝트 꽃 2.0’이라는 이름으로 시행 중인 소상공인 지원책이다. 이와 관련, 한 대표는 “올해는 반드시 국내 동대문 스마트 물류의 글로벌 연결을 성사시킬 것”이라며 “다양한 글로벌 노력들이 모여 SME들을 위한 든든한 글로벌 진출 환경이 조성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유통업체 관계자는 “판매업체 입장에선 쿠팡은 플랫폼 파워가 워낙 강해 입점을 안할 수 없을 것”이라며 “쿠팡이 소비자 편익을 내세워 판매상 간 치열한 경쟁을 유도하다보니 원성이 나오기 마련”이라고 지적했다. 쿠팡은 자사 브랜드(PB)를 메기처럼 활용해 판매업체들의 가격 담합 등에 개입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관팀 쿠팡이 네이버의 10배 규모
서로의 약점을 파고들다보니, 쿠팡과 네이버는 수면 아래에서도 치열한 암투를 벌이고 있다. 김범석 쿠팡 이사회 의장에 대한 총수(동일인, 사실상 그룹을 지배하는 자) 지정 논란과 관련해 네이버가 형평성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는 것으로 알려졌다. 2017년 네이버는 대기업집단으로 지정되면서 이해진 창업자가 동일인으로 특정됐다.
당시 네이버는 이사회 중심으로 경영이 이뤄지며, 네이버의 최대 주주는 국민연금이라고 항변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현재까지 공정위 직권으로 동일인을 지정한 사례는 네이버가 유일하다. 이와 관련, 공정위는 송재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의 질의에 지난 21일 “(김범석 의장과 같은) 외국인에 대한 규제집행 가능성, 제재 실효성, 타 기업집단과의 형평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검토하는 과정에 있다”고 설명했다. 쿠팡이 대관팀을 40여 명으로 확충하는 등 규제 리스크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 데엔 네이버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는 것으로 해석된다.
네이버가 미래에셋, CJ, 신세계그룹과 잇따라 ‘혈맹’을 맺고 있는 것도 쿠팡에 대항하기 위해서라는 게 유통업계의 공통된 지적이다. 재계 관계자는 “각각의 분야에서 1위 사업자끼리 손을 잡은 것인데 과거 같았으면 공정위로부터 담합 조사를 받았을 것”이라며 “네이버는 소프트뱅크그룹, 그린옥스 등 글로벌 자본이 투입된 쿠팡에 맞선다는 프레임을 만들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네·쿠 전쟁’은 앞으로 더욱 치열해질 전망이다. 쿠팡은 상장으로 들어온 약 5조원의 자금을 물류센터 신설 등 투자로 집행 중이다. 상장 직후에만 벌써 완주, 창원 물류센터 신설에 약 5000억원을 투입한다고 발표했다. 올 1분기 실적은 역대 사상 최고치를 기록한 것으로 알려졌다. 쿠팡이 벌어들인 돈을 계속 재투자함으로써 미래 시장을 선점하는 아마존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김범석 의장은 미 증권거래위원회에 제출한 상장 신청서에서 소비자가 지금껏 겪어왔던 온라인 쇼핑에서의 ‘트레이드 오프(trade off, 어느 것을 얻으려면 다른 것을 희생해야하는 관계)’를 없애겠다고 말한 바 있다. 최저가, 빠른 배송, 조건없는 환불 등 모든 것을 쿠팡에서 제공하겠다는 의미다. 경쟁사들을 고사시키겠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두 기업 모두 국내 e커머스 시장에서 살아남아야 해외 진출 등에도 속도가 붙을 수 있기 때문이다. 네이버만 해도 스마트스토어 플랫폼을 일본에 선보일 예정이다.
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