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46) 다시 피어오른 동아시아 전운
주변국 무릎 꿇리는 당나라
고·수(高·隋) 전쟁에서 대패한 수나라는 곧 자체 분열됐다. 수를 대체한 당나라는 종주권 회복, 중화중심의 체제 완결이라는 중국적인 숙명도 계승했다. 대운하를 이용해 남북을 하나의 상권과 경제권으로 발전시켰다. 수도인 장안에는 페르시아인들, 중앙아시아 상인들이 거주하면서 실크로드 무역망을 확장했고, 남쪽에서는 인도, 아라비아까지 해양 실크로드가 활성화됐다. 당 태종은 외교술로 북방 초원의 강국인 돌궐제국을 동서로 분열시켰고, 약화된 동돌궐을 복속시켰다(630년). 이어 서남쪽의 강국인 토번(티베트 지방)을 공격했고(639년), 문성공주를 시집보냈다.서쪽에서는 비잔틴제국까지 이어진 무역망을 확보할 목적으로 고창국(신강성의 투루판 지역)을 멸망시켰다(640년). 중앙아시아의 강국(康國, 사마르칸트시)은 627년부터 조공사절을 보냈고, 바르후만왕은 ‘강거도독’이 됐다. 석국(타슈켄트) 안국(부하라) 등 소국들도 당의 영향권으로 끌어들였다. 또 중간지역인 요서지역의 거란과 해(奚)를 복속시켜 고구려를 압박하게 했다. 놀랍게도 사할린의 ‘유귀’ 왕자가 세 번의 통역을 거쳐 당나라에 도착해 벼슬을 받았으며, 캄차카반도에 거주한 ‘야차’도 사신을 파견했다. 이처럼 유라시아 동쪽의 모든 나라와 종족들이 직접 또는 간접으로 당나라 편에서 전쟁에 참여하게 됐다. 어쩌면 이렇게도 후진타오의 ‘역사공정’, 시진핑의 ‘일대일로’ 정책과 비슷한지 모르겠다.
엇갈린 고구려·백제·신라의 외교전략
이 무렵 고구려, 백제, 신라는 어떤 상황을 맞이하며 어떤 정책을 취하고 있었을까? 고·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둔 고구려는 대당(對唐)정책을 놓고 요하전선 중심의 적극적인 대결을 주장하는 연개소문 세력과 해양방어, 수성전을 선호하는 영류왕 세력으로 나뉘어 권력쟁탈전을 벌였다. 그런데 고구려는 당나라의 총체적인 전력을 분산시키는 외교군사전략을 입체적으로 추진해야 했다. 즉 서부전선인 당나라와는 화해를 취하면서 해양을 통한 기습 가능성에 대비하고, 북부전선인 돌궐과 거란을 우호세력으로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다 실패로 돌아갔다. 다만 몽골고원의 설연타와 교섭해 당나라의 후방을 공격하게 했다. 남은 것은 남부에서 백제, 신라를 외교·군사적으로 압력을 가하면서 당과의 연결고리를 끊는 전략이었다.백제는 고구려와 화해를 시사하면서도 전쟁 발발 전까지 당나라에 사신을 무려 열일곱 번 보냈다. 신라도 당나라에 사신은 물론 유학생과 승려들을 자주 보냈고, 643년에는 군사 파견까지 요청했다. 하지만 백제는 번국(藩國, 제후의 나라), 신라는 번신(藩臣, 왕실을 지키는 중신)일 뿐이었다. 당나라는 결국 신라를 고구려의 대항세력으로 선택했고, 전쟁이 벌어지자 신라는 3만 명을 파견해 고구려를 남쪽에서 협공했다.
당나라의 파상공세
이렇게 광범위한 전선이 형성된 가운데 벌어진 고·당 전쟁은 고·수 전쟁을 계승해 동아시아 종주권을 장악하고, 북방의 유목민족을 포위하는 대응전선을 구축하는 ‘제2차 동아시아 국제대전’이었다.당나라는 선공을 하면서 해륙 양면작전을 개시했다. 645년 4월 육군은 요하를 건너 개모성(선양 외곽), 신성(무순 시내) 등을 점령하고, 별렀던 요동성을 공격했다. 수양제를 굴복시켰던 요동성은 주몽사당에 승리를 빌면서 치열하게 항전했지만 바람을 이용한 화공에 버티지 못하고 15일 만에 함락됐다. 병사 중 1만 명이 전사하고 1만 명이 포로가 됐으며, 백성 4만 명이 당나라에 끌려갔고 양곡 50만 석을 탈취당했다. 이어 당 태종은 남쪽으로 이동해 백암성에서 항복을 받았고, 안시성을 공격했다. 연개소문은 고구려와 말갈 혼성군인 15만 명을 파견했으나 주필산 전투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3만6800명이 포로로 잡히고 말갈병 3300명은 생매장당했다. 당나라는 말 5만 필, 소 5만 마리, 금빛 나는 갑옷인 명광개(明光鎧) 1만 벌을 노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