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지역 상장(IPO) 시장에서 일본증시의 존재감이 크게 줄어 지난해 공모자금 조달규모가 우리나라와 인도보다 뒤처졌다.

28일 금융 정보회사 리피니티브에 따르면 올들어 지난 14일까지 기업들이 일본증시에 상장해서 조달한 공모자금은 약 2000억엔(약 2조538억원)으로 아시아 전체(4조5700억엔)의 4.6%에 불과했다.

2000년까지만해도 아시아 공모자금의 약 30%를 빨아들인 일본증시는 홍콩에 이어 2위 시장이었지만 20년새 비중이 6분의 1로 줄었다. 그 사이 비중을 5%까지 늘린 한국과 인도가 일본을 제치고 3위 시장을 놓고 경쟁하고 있다.

홍콩과 중국 본토 시장은 올해 아시아 지역 공모자금의 40%와 30%를 조달해 독주 체제를 갖추고 있다.

올들어 홍콩증시에는 동영상 앱 콰이서우 테크놀로지와 중국 최대 검색엔진 바이두의 2차 상장 등 3000억~5000억엔 규모의 초대형 IPO가 줄을 이었다.

반면 일본의 올해 증시 최대어인 비저널은 상장규모가 680억엔에 불과하다. 주요국 거래소가 국경을 넘나들며 유력 스타트업(신흥 벤처기업)을 유치하기 위해 사활을 걸지만 일본증시는 쟁탈전에서 소외돼 있는 모습이다.

IPO 1건당 조달 규모도 아시아 평균이 160억엔인데 반해 일본은 40억~70억엔에 그쳤다. 건당 조달 규모가 2019년 우리나라에도 역전 당했다.

벤처캐피털(VC) 시장이 활성화되지 못한 점이 일본 IPO시장의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지적된다. 비상장 기업에 투자자금을 공급해 상장 예비군을 키우는 기능이 원활하지 못하다는 의미다.

미국 조사회사 피치북에 따르면 2020년 일본 VC 투자금액은 21억달러(약 2조3352억원)로 중국(593억달러)의 30분의 1 수준이다. 인도(116억달러)와 싱가포르(31억달러)보다 VC의 투자활동이 저조했다.

우리나라와 인도, 싱가포르 VC 시장에 미국과 중국의 풍부한 투자자금이 흘러 들어오는 반면 일본의 VC들에 출자되는 자금은 대부분 일본 국내자금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국제표준 회계기준을 채용한 VC가 적기 때문에 해외 VC와 실적 비교가 어렵다"며 "국내외 기관투자가가 자금을 맡기기 어려운 구조"라고 분석했다.

극도로 보수적인 공모가격 설정 관행도 일본의 IPO 시장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지적된다. 일본은 투자가들을 대상으로 수요조사를 실시하더라도 주관 증권사가 사전에 설정한 희망 공모가 범위 내에서 최종 공모가격을 결정하는 것이 관행이다.

반대로 미국은 수요예측조사 결과가 기대 이상이면 최종 공모가를 희망 공모가보다 높게 결정하는 경우가 많다.

수요보다 공모가격을 낮게 결정하는 경우가 많다보니 올해 일본증시에 상장한 기업의 주가는 거래 첫날 평균 200% 급등했다. 우리나라의 70%, 인도의 20%, 홍콩의 10% 보다 월등히 높았다.

거래 첫날 주가가 오르면 공모 물량을 배정받은 투자가들에게는 이득이지만 기업과 기존 투자가들에게는 마이너스다. 지난해 일본증시에 상장한 정보기술(IT) 기업 관계자는 "실제로는 훨씬 많은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던 것 아니냐"고 말했다.

스즈키 겐지 히토쓰바시대학원 교수는 2013~2019년 일본증시에 상장한 기업의 공모가와 상장 후 주가를 비교한 결과 보수적인 공모가 산정 관행으로 인해 기업과 기존 주주들이 평균 20억엔의 손실을 봤다고 분석했다.

일본 정부도 일본증시의 존재감이 줄어드는 상황을 우려하고 있다. IPO시장은 기업의 신진대사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지난 3월 성장전략회의를 열고 비상장기업에 대한 투자를 촉진하는 등 대책을 논의하기로 했다. 가토 가쓰노부 관방장관은 "공모가격의 결정 방식을 개선하는 등 대응책을 마련할 것"이라고 말했다.

도쿄=정영효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