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만의 고유한 시선을 느낄 수 있는 전시회가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프랑크푸르터알게마이네차이퉁 등 주요 외신에 따르면 프랑스 파리 뤽상부르 박물관(Musée du Luxembourg)에선 계몽주의 시대부터 낭만주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40여 명의 뛰어난 여성 화가들의 작품 70여 점을 전시하는 '싸움의 탄생(Naissance d'un combat)'이라는 제목의 전시회가 개최되고 있습니다.
서양 미술사에선 오랫동안 여성 예술가들은 '잊힌 존재'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였습니다. '예술의 나라'라는 프랑스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전시회 측이 '싸움의 탄생'이란 제목을 건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프랑스에서도 '여성 화가'가 등장하고, 이름을 남기고, 사람들의 눈길을 끌 수 있었던 본격적인 계기는 프랑스 혁명이라고 합니다. 평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번져나간 덕입니다. 금녀의 공간이던 화실들은 여성들에게도 문호를 개방하기 시작했습니다.
정확하게는 앙시앙 레짐 말기부터 소수의 여성화가들에 물꼬가 트였습니다. 당시에는 왕립미술학교(Académie Royale de Peinture et de Sculpture)에 합격한 이들이 유명한 '살롱'에 참여해 작품을 의뢰받고, 자신의 작품을 판매할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 혁명 전인 1783년에 두 명의 여성 화가가 왕립미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중산층 출신인 아델레이드 라빌 기야드(Adélaïde Labille-Guiard·1749~1803)와 엘리자베스 루이스 비제 르브룅(Élisabeth-Louise Vigée Le Brun·1755~1842)이 그 주인공이었습니다. 이들은 당시 1급 화가들의 영역까지 들어올 정도로 실력이 출중했다고 합니다.
1791년 프랑스 국민의회는 미술 시장에 대한 왕립미술학교의 독점적인 통제권을 철회했습니다. 그리고 '자유와 보편(libre et universel)'이라는 이름의 살롱을 설립해 여성 예술가들의 참여를 허용했습니다. 프랑스 대혁명 기간 전체 참여 화가의 9%인 30명의 여성 화가의 작품이 살롱에 전시됐습니다. 세월이 흘러 1920년대가 되면 전체 참여작가의 15%인 200여 명이 여성 화가였습니다.
여성들이 남긴 회화 작품 중에서도 '소규모'작품 분야는 여성 화가들의 관심이 집중된 분야였다고 합니다. 여성 화가들이 여성의 그림을 많이 남긴 점도, 남성 화가들의 그림과는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점도 두드러지는 특징입니다. 하지만 당시에도 여성으로서의 한계는 분명했습니다. 여성화가인 마리니콜 베스티에(Marie-Nicole Vestier·1767~1846)의 '여성 작가는 자신의 직업이 있다'라는 제목의 작품에는 그림을 그리는 이젤 근처에 아기가 유아용 침대에서 자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한 손에는 아이를, 다른 한 손에는 붓과 팔레트를 쥐고 있는 모습에서 '출산과 육아'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여성 작가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입니다. 최근 들어 각종 사회문제에서 남녀 간 시각차가 두드러지는 일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여성 혐오', '남성폄하' 논란도 끊이지 않습니다. '화성 남자''금성 여자'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양성 간에는 가치관과 철학,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의견차를 좁히기 쉽지 않은 게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다르다고 하더라도, 타자의 시선을 이해하고 접하는 데서 이해가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코로나19로 갈 수 없는 먼 나라의 미술 전시회 소식 만큼이나 현대 한국사회의 남녀 간의 인식차도 거리가 먼 것 같습니다.
김동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