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20년간 사업을 하다 노년을 보내기 위해 몇 년 전 귀국한 J씨(75)는 최근 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의 상속세 관련 뉴스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12조원에 달하는 상속세 규모 때문이 아니다. 그만한 상속세를 낸 고인에게 집권 여당의 부대변인이 “당연히 내야 할 상속세를 내겠다는 게 그렇게 훌륭한 일인가”라며 비판하는 모습을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J씨는 “미국에서는 여야를 막론하고 입 밖에 내기 어려운 소리”라며 “미국은 고액 납세자를 ‘일자리 만들고 사회 유지에 기여하는 사람’으로 대접해주는데, 한국은 납세자를 너무 부정적으로만 바라보는 것 같다”고 말했다. J씨는 2000년대 초반까지 뉴욕에서 대형 햄버거 가게 네 개를 운영하며 매년 수억원의 소득을 올렸다. 고액 납세자였던 덕분에 J씨는 미국에서 사회적 존경을 받았던 경험이 많다.

한번은 운영하던 가게 근처에서 운전 부주의로 신호를 위반한 일이 있었다. J씨는 “경찰관에게 신분증을 보여주며 ‘내가 저 가게 주인인데, 가게를 운영해 열심히 세금 내려다 실수를 했다. 조금 봐줄 수 없느냐’고 했더니 경찰관이 그냥 가라고 하더라”고 전했다. J씨는 “한국보다 권위적인 미국 경찰의 태도만 봐도 고액 납세자를 대하는 미국 사회의 배려와 존경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고액 납세자에 대한 서구 사회의 존중은 뿌리 깊다. 고대 아테네에선 상위 1% 부자들만 내는 세금 ‘레이투르기아(leitourgia)’가 있었다. 아테네는 레이투르기아를 통해 해군력의 근간인 전함 건조 및 운영 비용을 조달했다. 그만큼 내는 입장에서 조세 부담이 컸지만 회피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레이투르기아 납세자는 건조된 전함의 함장으로 예우받는 등 사회적 지위와 존경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테네 부유층의 세금은 합창, 축제 등 지역 문화사업에도 중요한 재원으로 쓰였다.

김우철 서울시립대 세무학과 교수는 “1980년대까지만 해도 세금 부과 및 사용이 불투명해 ‘세금 다 내면 바보’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돌면서 지금까지도 한국의 고액 납세자에 대한 인식이 다른 나라에 비해 좋지 않은 측면이 있다”며 “이번 이건희 회장의 상속세 납부를 납세자에 대한 존경을 고양시키면서 납세 의식까지 전환할 좋은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정의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