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호봉제·채용규준·노조 탓에…은행 "개발자 부족해도 못 뽑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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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들 '채용 가뭄'
금융업계 상위 39개社 분석
올 2619명 채용계획…43%↓
5대 은행 중 4곳 채용 불투명
신한 0명, 우리·국민 10명 안돼
노조 압박에 호봉제만 제시
성과보상 중시하는 고급인력 외면
비리 없앤다며 경직된 규준 집착
코딩능력보다 필기시험 중시
금융업계 상위 39개社 분석
올 2619명 채용계획…43%↓
5대 은행 중 4곳 채용 불투명
신한 0명, 우리·국민 10명 안돼
노조 압박에 호봉제만 제시
성과보상 중시하는 고급인력 외면
비리 없앤다며 경직된 규준 집착
코딩능력보다 필기시험 중시
삼성전자에서 비정형데이터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김모씨(36)는 지난해 한 시중은행으로부터 이직 제의를 받았다. 평소 금융에 관심이 많았던 김씨는 전문성을 살려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은 마음에 이직을 고려했지만, 결국 제안을 거절했다. 정규직이 아니라 안정성이 떨어지는 전문계약직으로 가야 한다는 점이 걸림돌이었다. 연공서열 중심의 호봉제 아래선 시장에서 몸값이 치솟는 디지털 전문인력을 ‘모셔오기’ 어려운 탓에 은행들은 대부분 1년 단위 계약직으로 이들을 뽑고 있다.
보수적인 조직 문화도 걱정됐다. 김씨는 “은행들이 디지털 전환을 강조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디지털 부서를 후방 지원 업무 정도로 치부하는 분위기가 강하다고 들었다”며 “‘코드 한두 줄 바꾸기 위해 보고서 수십 장을 쓴다’는 얘길 듣고 마음을 접었다”고 했다.
그중에서도 5대 은행의 올해 채용 규모는 2018년(3443명)의 10분의 1 수준으로 쪼그라든 389명으로 조사됐다. 채용 비리 구제 차원의 특별채용(20명)을 제외하면 올 들어 경력직만 10명 안팎 뽑은 국민·하나·우리은행은 하반기 채용 계획도 잡지 못했다. 디지털분야 수시 채용을 진행 중인 신한은행은 올해 확정된 채용 인원이 0명이다. 대형 은행 5곳 중 4곳의 올해 채용 계획이 불투명한 셈이다.
그렇다고 은행에 새 일자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디지털 시대의 핵심 인력인 프로그램 개발자와 인공지능(AI)·빅데이터 전문가 등은 은행이 뽑고 싶어도 채용을 못하는 게 현실이다. A은행 디지털 부문 관계자는 “예전에는 티오(TO)가 없어서 문제였는데 지금은 위에서 마음대로 뽑으라고 해도 사람이 없다”며 “얼마 없는 고급 인력은 금융권보다 빅테크와 플랫폼기업을 선호하고, 그쪽에서도 물량 공세를 하니 뺏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B은행의 고위관계자는 “내부적으로 파악한 디지털 인력 수요는 300명 이상이지만 공급 부족과 영입 경쟁 등으로 다 못 뽑을 게 뻔해 공표도 못 한다”고 했다.
은행들이 디지털 인재 채용 경쟁에서 뒤처지는 이유로 빠지지 않는 게 호봉제다. 능력과 성과에 따른 차등 대우가 불가능한 호봉제 아래선 고급 인력을 영입하기 어렵다. 능력에 맞는 연봉을 주려면 전문계약직으로 채용해야 하는데, 그러면 김씨처럼 오기를 꺼리는 경우가 태반이다. 일부 은행에서는 전문계약직으로 3년가량 근무하면 무기계약직 전환이 가능하지만 대부분은 이때도 노조 동의가 필요하다. 은행 고위관계자는 “핵심 인재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려는 데도 번번이 노사 합의를 거쳐야 한다는 것 자체가 소모적”이라고 말했다.
디지털 인력을 대폭 늘리려면 기존 인력 구조를 뜯어고쳐 채용 여력을 만들어야 하지만 이 또한 쉽지 않다. 점포를 없애고 기존 인력을 디지털 관련 업무에 재배치하는 것도 노조의 반발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한 은행 임원은 “디지털 전환의 가장 큰 장애물은 내부의 보수적인 분위기와 상호 견제”라고 말했다.
김상봉 한성대 교수는 “AI, 코딩 등을 필기로 얼마나 평가할 수 있느냐”고 꼬집었다. 윤 의원은 “비리를 막기 위한 채용 규준이 우수 인재의 스카우트까지 가로막는 모양새”라고 말했다.
개발자 업계에선 흔한 ‘신속 채용’도 은행에선 어렵다. 은행은 이 규준에 따라 전형 단계마다 감사부서가 절차를 점검하도록 하고 있다. 자연히 공고부터 최종 합격자 발표까지 최소 2~3주가 걸린다. 한 금융권 임원은 “최고기술경영자나 전문 리크루터가 코드 몇 줄만 보고 바로 채용을 제안하는 스타트업·빅테크와 어떻게 경쟁하겠느냐”고 말했다.
빈난새 기자 binthere@hankyung.com
보수적인 조직 문화도 걱정됐다. 김씨는 “은행들이 디지털 전환을 강조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디지털 부서를 후방 지원 업무 정도로 치부하는 분위기가 강하다고 들었다”며 “‘코드 한두 줄 바꾸기 위해 보고서 수십 장을 쓴다’는 얘길 듣고 마음을 접었다”고 했다.
은행 올해 채용계획 줄줄이 ‘미정’ ‘0’
금융권의 채용 가뭄이 심해지고 있다. 6일 윤창현 국민의힘 의원이 은행·보험·증권·저축은행·카드사·자산운용사 등 업계 상위 39곳 금융회사로부터 받은 연간 채용 실적과 계획에 따르면 이들 금융사의 올해 채용 인원(예정·미정 포함)은 2619명으로 집계됐다. 지난해(4524명)에 비하면 42%, 불과 3년 전인 2018년(7428명)에 비하면 65% 줄어든 규모다.그중에서도 5대 은행의 올해 채용 규모는 2018년(3443명)의 10분의 1 수준으로 쪼그라든 389명으로 조사됐다. 채용 비리 구제 차원의 특별채용(20명)을 제외하면 올 들어 경력직만 10명 안팎 뽑은 국민·하나·우리은행은 하반기 채용 계획도 잡지 못했다. 디지털분야 수시 채용을 진행 중인 신한은행은 올해 확정된 채용 인원이 0명이다. 대형 은행 5곳 중 4곳의 올해 채용 계획이 불투명한 셈이다.
“인재 뽑고 싶어도 수단이 없다”
은행들은 비대면 거래가 자리잡고 디지털 전환이 가속화하면서 수년째 몸집 줄이기에 몰두해왔다. 은행으로선 일반직 행원은 새로 뽑기보다 오히려 줄여야 할 대상이다.그렇다고 은행에 새 일자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디지털 시대의 핵심 인력인 프로그램 개발자와 인공지능(AI)·빅데이터 전문가 등은 은행이 뽑고 싶어도 채용을 못하는 게 현실이다. A은행 디지털 부문 관계자는 “예전에는 티오(TO)가 없어서 문제였는데 지금은 위에서 마음대로 뽑으라고 해도 사람이 없다”며 “얼마 없는 고급 인력은 금융권보다 빅테크와 플랫폼기업을 선호하고, 그쪽에서도 물량 공세를 하니 뺏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B은행의 고위관계자는 “내부적으로 파악한 디지털 인력 수요는 300명 이상이지만 공급 부족과 영입 경쟁 등으로 다 못 뽑을 게 뻔해 공표도 못 한다”고 했다.
은행들이 디지털 인재 채용 경쟁에서 뒤처지는 이유로 빠지지 않는 게 호봉제다. 능력과 성과에 따른 차등 대우가 불가능한 호봉제 아래선 고급 인력을 영입하기 어렵다. 능력에 맞는 연봉을 주려면 전문계약직으로 채용해야 하는데, 그러면 김씨처럼 오기를 꺼리는 경우가 태반이다. 일부 은행에서는 전문계약직으로 3년가량 근무하면 무기계약직 전환이 가능하지만 대부분은 이때도 노조 동의가 필요하다. 은행 고위관계자는 “핵심 인재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려는 데도 번번이 노사 합의를 거쳐야 한다는 것 자체가 소모적”이라고 말했다.
디지털 인력을 대폭 늘리려면 기존 인력 구조를 뜯어고쳐 채용 여력을 만들어야 하지만 이 또한 쉽지 않다. 점포를 없애고 기존 인력을 디지털 관련 업무에 재배치하는 것도 노조의 반발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한 은행 임원은 “디지털 전환의 가장 큰 장애물은 내부의 보수적인 분위기와 상호 견제”라고 말했다.
느린 절차…시대착오적 채용 규준
은행권이 신입 채용 때 공통적으로 적용하는 ‘은행권 모범채용규준’도 직무에 최적화된 채용을 어렵게 한다는 지적이 많다. 채용 비리 사태를 계기로 2018년 도입된 이 규준은 서류, 필기, 면접전형 등을 선발 단계마다 일일이 규정하고 있다. 은행이 디지털 인력을 뽑을 때도 일률적인 필기시험을 치르는 이유 중 하나다.김상봉 한성대 교수는 “AI, 코딩 등을 필기로 얼마나 평가할 수 있느냐”고 꼬집었다. 윤 의원은 “비리를 막기 위한 채용 규준이 우수 인재의 스카우트까지 가로막는 모양새”라고 말했다.
개발자 업계에선 흔한 ‘신속 채용’도 은행에선 어렵다. 은행은 이 규준에 따라 전형 단계마다 감사부서가 절차를 점검하도록 하고 있다. 자연히 공고부터 최종 합격자 발표까지 최소 2~3주가 걸린다. 한 금융권 임원은 “최고기술경영자나 전문 리크루터가 코드 몇 줄만 보고 바로 채용을 제안하는 스타트업·빅테크와 어떻게 경쟁하겠느냐”고 말했다.
빈난새 기자 binther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