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 메인 테마곡 '정경'/메디치TV 유튜브 채널
고전 발레의 정수 '백조의 호수'. 이 작품을 떠올리면 어떤 것들이 생각나시나요. 새하얀 발레복을 입고 백조를 연기하는 발레리나들의 우아하고 섬세한 몸짓, 아름답고도 슬픈 러브 스토리가 머릿속을 스칩니다.
그리고 입가에 자연스럽게 한 멜로디가 맴도는데요. '백조의 호수'의 메인 테마곡 '정경'입니다. 서정적이면서도 웅장한 선율의 이 곡은 '백조의 호수'를 세계적인 명작으로 만들었습니다.
'백조의 호수'는 러시아 마린스키 극장의 매니저였던 블라디미르 베기체프가 쓴 작품입니다. 그는 표트르 일리치 차이코프스키(1840~1893)에게 작곡을 맡겼죠.
차이코프스키는 이를 통해 발레 음악에 처음 도전하게 됐습니다. 지금은 '백조의 호수'가 전 세계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데요. 초연 당시엔 엄청난 혹평에 시달렸습니다. 이 작품 뿐 아닙니다. 차이코프스키의 대표곡 '피아노 협주곡 1번'도 처음엔 냉대를 받았습니다.
여기서 짐작할 수 있듯 그의 삶은 결코 순탄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불굴의 의지로 영원히 기억될 선율을 만들어 내며 러시아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작곡가가 됐습니다. 굴곡진, 그러나 찬란하게 빛나는 차이코프스키의 삶과 음악 세계로 함께 떠나보실까요. 그는 러시아 광산촌 캄스코봇킨스크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광산 감독관이었는데요. 정부 관료였기 때문에 그는 풍족한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어릴 때부터 음악에 소질도 보였습니다.
그러나 잔병치레가 잦았으며 다소 예민했습니다. 유명한 일화도 있습니다. 어린 아이였던 그는 어느 날 "음악 소리가 계속 난다"며 울고 있었습니다. 가정교사는 그의 얘기를 듣고 주변을 살폈지만,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습니다. 차이코프스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머릿속에 음악 소리가 꽉 차서 나를 내버려 두지 않는다." 천재 음악가만이 느끼는 특별한 감정을 어릴 때부터 민감하고 예리하게 포착했던 것이 아닐까요.
차이코프스키의 갈 길은 열 살때부터 정해졌습니다. 음악가가 아닌 법률가였습니다. 아버지는 그가 법률가가 되길 바랐고, 그 뜻에 따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법률학교에 진학했습니다. 졸업 이후 19살이 되던 해엔 법무성의 서기가 됐습니다. 덕분에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지만, 그는 점점 고뇌에 빠졌습니다. 음악에 대한 끊임없는 갈망 때문이었죠.
그는 결국 관직 생활을 그만두고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했습니다. 늦게 음악을 시작했지만 다행히 실력을 인정받았습니다. 음악원장인 안톤 루빈스타인의 동생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으로부터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 자리도 제안 받았습니다.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라디오프랑스필하모니오케스트라와 연주한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 지휘는 정명훈. /조성진 유튜브 채널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은 우수에 깃든 것처럼 쓸쓸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 그리고 점차 확장해 가며 격정적인 감정 분출에까지 이르죠. 그의 음악을 들으면 벅찬 환희와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는 이유입니다. 이 변화와 확장은 예측하기 어렵지만, 자연스럽고 세련됐습니다.
그런데 그 시대엔 이런 음악이 낯설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러시아엔 민족주의적 색채가 강한 국민악파 5인의 작곡가(니콜라이 림스키고르사코프, 모데스트 무소르그스키, 알렉산드르 보로딘, 세자르 큐이, 밀리 발라키레프)의 음악이 큰 사랑을 받고 있었습니다.
차이코프스키도 초반엔 이들과 교류했으며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후 프란츠 리스트, 리하르트 바그너 등 서유럽 음악을 접하며 두 양식을 결합한 새로운 음악을 선보이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그의 음악 인생은 늘 시작이 순탄치 않았습니다. '피아노 협주곡 1번'은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에게 헌정하려 했지만, 루빈스타인은 이 곡에 대해 혹평을 쏟아냈습니다. 몇몇 소절을 제외하고는 아예 처음부터 다시 쓸 것을 제안했죠.
차이코프스키는 크게 낙담했지만, 자신만의 음악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제안을 거부하고, 리스트의 사위였던 피아니스트 한스 폰 뷜로에게 원곡 그대로 헌정했습니다. 뷜로는 미국에서 이 곡을 선보였고, 큰 성공을 거둡니다.
이를 알게 된 루빈스타인은 나중에 차이코프스키에게 연락을 해 용서를 구했다고 하네요. 외부의 시선에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음악을 끝까지 지키고자 했던 의지가 결국 승리한 것이 아닐까요.
이후 나온 그의 첫 발레 음악 '백조의 호수'의 초연도 크게 실패했습니다. 음악이 발레의 보조수단에 그치지 않고, 전면에 부각될 정도로 웅장하다는 점이 문제가 됐는데요. 그는 충격으로 "다시는 발레 음악을 작곡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포기하지 않고 '호두까기 인형' '잠자는 숲속의 미녀' 등 발레 음악을 잇달아 만들었죠. 이런 노력 덕분인지 그의 사후 '백조의 호수'도 재평가를 받게 됐습니다.
그러나 차이코프스키의 비극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동성애자였던 차이코프스키는 성 정체성으로 인해 많은 상처를 받게 됐습니다. 차가운 사회의 시선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성과 연애도 하고 결혼도 했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부인 안토니나 밀류코바는 그에게 끝없는 집착을 보였고 자살 협박을 하기도 했죠. 결국 두 사람은 이혼을 했습니다.
그는 이후 나데즈다 폰 메크 부인을 알게 되는데요. 메크 부인의 전폭적인 후원으로 재정적으로 여유도 찾고 정신적인 위로도 받았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 만나지도 않고, 14년간 1200여 통의 편지를 주고받으며 음악만으로 진심 어린 교류를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그와의 관계도 결국 종지부를 찍게 됐습니다. 메크 부인이 파산 위기에 놓였다며 갑자기 결별을 통보했는데요. 실은 그가 동성애자임을 알고 절교한 것이라는 추측이 나왔습니다.
차이코프스키는 콜레라에 걸려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를 두고도 소문이 무성했습니다. 한 귀족의 조카와 감정을 나눈 사실이 알려지며 자살했다는 소문도 있었죠.
차이코프스키의 굴곡지고 격정적인 삶이 애잔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는 어떤 아픔에도 꿋꿋이 의지와 열정을 갖고 자신만의 길을 걸었던 것 같습니다. 깊은 울림을 주는 그의 작품들을 감상하며 일상의 지친 마음을 달래 보시는 건 어떨까요.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