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북쪽 바스크 지역은 유럽의 선진 철강 지역이었다. 철강산업이 쇠퇴하면서 실직자가 대량 발생했다. 독일의 벤츠 트럭 공장과 한국 대우전자의 냉장고 공장 등 해외 첨단산업을 유치해 일자리를 만들었으나 쇠퇴한 지역 경제를 되살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인구 50만의 도시 빌바오가 구겐하임 미술관을 유치하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연 300만 명의 외국인 관광객이 몰려들기 시작해 지금은 세계적인 문화 도시로 탈바꿈했다. ‘빌바오 효과’라고 한다.

고(故) 이건희 회장은 삼성전자의 갤럭시 스마트폰을 세계적인 스마트폰으로 만들었다. 삼성전자는 메모리 반도체에서도 압도적인 세계 일등 기업이다. 삼성전자와 관련한 기업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이 협동한 결과지만, 그 출발점은 이 회장이었다. 10만 명의 삼성전자 임직원 그리고 관련 기업의 200만 종사자들이 같은 목표를 갖고 완벽한 제품을 생산판매하도록 이끈 이도 이 회장이었다. 그 덕분에 전자산업의 변방이었던 대한민국은 정보기술(IT)산업 강국으로 도약했다. ‘이건희 효과’인가?

이 회장의 유족이 엄청난 가치의 ‘이건희 컬렉션’을 우리 사회에 기부했다.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특별 전시를 계획하는 등 이건희 컬렉션은 한국 문화 예술계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과거 국립현대미술관장을 맡아 이끌며 절실히 느낀 것은, 세계인의 이목을 끄는 전시를 하기 위해서는 장소나 작품 배치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전시 스토리가 특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전시 스토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일련의 외국 미술관 소장품도 빌려와야 한다. 빌려 오는 것이 가능하려면 빌려줄 것도 있어야 한다. 세계 미술관 서클에 들어가야 한다. 희귀한 소장품을 갖고 있어야 교환 전시가 가능하다. 그리고 세계적으로 알려진 유능한 전시 기획자는 물론 보존과 전시를 할 수 있는 기술과 전문 인력, 시설이 뒷받침돼야 한다. 다행히 우리는 단계별로 조건을 갖춰 왔다.

이젠 예술이 기술과 융합하는 시대가 됐다. 로트레크의 파스텔화를 환한 방에서 보려면 LED 광(光) 기술이 필요하다. 세잔이 그린 정물화의 동적인 움직임을 보려면 움직이는 특수 효과 광원이 있어야 한다. 컴컴한 방안 유리창을 통해서 봤던 13~14세기 고려 불화의 배면(背面) 채색은 단색광으로 확인할 수 있다. 한국이 세계를 선도하고 있는 기술들이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의 조그만 방에 가면 세계에서 인증한 보존 연구원들이 일하고 있다. 이들은 국제 학술지에 논문을 발표해 국제적으로 알려지긴 했지만 워낙 인원이 적어 희귀 인재들이다. 이들이 있어 그나마 우리 미술관이 해외 문화재를 빌려오는 것이 가능했다.

이처럼 우리나라는 예술 작품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게 해 주는 첨단 기술과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보존 연구원들을 보유하고 있지만, ‘전시 스토리’를 만들 수 있는, 세계 미술관과 교환전시를 할 만한 소장품이 부족한 것이 늘 안타까웠다. 그런데 이건희 컬렉션 기증을 통해 ‘한국적 전시 스토리’를 구성할 수 있는 마지막 퍼즐이 맞춰졌다.

한국은 갓 경제 선진국이 됐다. 이에 걸맞은 예술 문화의 국격(國格)을 높여야 한다. 그래야 지속적인 경제 성장이 가능하다. 이건희 컬렉션은 그 자체의 시장 가치만으로도 요즘 추세로 10년 안에 열 배는 될 것이다. 이를 기반으로 우리 문화 예술계가 훌륭한 전시 스토리를 만들어 간다면, 그 가치가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하며 ‘한국판 빌바오 효과’로 이어질 것이다.

문화의 경제적 가치를 공급 측에서 보면 문화 활동에 종사하는 이들을 위한 양질의 일자리가 창출된다. 때론 목표의 크기가 결과의 크기를 좌우한다. 빌바오의 ‘300만 관광객’을 넘어 우리는 전시 기획자, 보존 기술자, 경영 관리자, 미술사 연구자, 미술 교육자, 디지털 전문가 등 다양한 연관 산업에서 억대 연봉의 연인원 300만 명 일자리를 마련하겠다는 목표에 도전하는 것은 어떤가? 문화 예술계에서도 ‘이건희 효과’가 일어나 경제와 문화 모든 측면에서 대한민국이 선진국으로 도약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