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의 시] 유통기한 - 이근화(1976~)
오늘은 검은 비닐봉지가 아름답게만 보인다
곧 구겨지겠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람
사물의 편에서 사물을 비추고
사물의 편에서 부풀어오르고
인정미 넘치게 국물이 흐르고
비명을 무명을 담는 비닐봉지여
오늘은 아무렇게나 구겨진 비닐봉지 앞에서
미안한 마음이 든다

시집 《내가 무엇을 쓴다 해도》(창작과비평) 中

물건 하나를 살 때 우리는 물건 하나보다 큰 비닐봉지를 갖게 되지요. 내가 산 물건이 검은 봉지 안에서 흔들리고 부풀어오르기도 하지만 우리는 봉지 속에 든 물건을 꺼내기 전까지 물건의 상태를 알 수 없어요. 봉지가 제 안에 든 것을 가장 잘 알게 되듯이 우리는 언제쯤 우리 마음에 들어 있는 것을 잘 알게 될까요? 언제쯤이면 비명처럼, 무명처럼 숨겨둔 우리의 진심을 꺼내 보일 날이 올까요? 우리에게 더 이상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도록 봉지가 필요 없는 날이 올 수 있기를 바라요.

이서하 시인 (2016 한경신춘문예 당선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