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등 주요 국가와 백신 개발회사가 저개발국에 코로나19 백신을 지원키로 했다. 부자 나라로 코로나19 백신이 쏠리는 '백신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다. 유럽 국가들은 백신 지적재산권을 한시적으로 면제하는 것 대신 제3의 길을 제안키로 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이 올해 말까지 저개발국가를 위해 최소 1억 도즈의 백신을 기부키로 했다고 21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 등이 보도했다.

세계 보건정상회의에서 폰데어라이언 집행위원장은 "보건 민족주의에 반대한다"며 이런 백신 지원 계획을 밝혔다. 회의는 올해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의장국인 이탈리아와 EU가 코로나19 사태 극복을 위해 마련했다.

이날 발표한 EU의 지원 물량은 앞서 프랑스와 독일이 약속한 6000만 도즈의 백신을 포함한 것이다. EU는 세계보건기구(WHO)가 이끄는 코백스 퍼실리티를 통해 백신을 나눌 계획이다. 아프리카 지역에 백신 공장을 세우기 위해 10억 유로(약 1조4000억원)도 추가로 투입하기로 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도 3년 안에 30억 달러(약 3조4000억원)를 코로나19 공동 대응에 쓰겠다고 약속했다. 시 주석은 백신을 공정하게 배포하기 위한 국제 포럼도 제안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내년 말 세계 인구의 60%에게 백신을 접종한다는 목표에 따라 500억 달러(약 56조3000억원) 규모 기금 조성을 건의했다.

제약사들도 저개발 국가를 위해 백신을 원가 이하로 공급하겠다고 약속했다. 화이자-바이오엔테크는 올해와 내년 각각 10억 도즈의 백신을 저개발국 지원에 사용할 계획이다.

존슨앤드존슨도 자회사 얀센의 코로나19 백신 2억 도즈를 코박스에 공급하기로 했다. 3억 도즈를 추가로 내놓는 방안을 협의하고 있다. 모더나도 올해 9500도즈, 내년 9억 도즈 등 10억 도즈를 저개발국가에 지원할 계획이다.



이처럼 백신 지원에 앞다퉈 나선 것은 백신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해져서다. 세계 백신 투여량은 15억3000만 도즈에 이르지만 아프리카 백신 접종률은 1% 수준이다.

반면 미국은 인구의 40% 이상이, 유럽은 20% 이상이 백신을 맞았다. 선진국의 백신 접종에 속도가 붙으면서 백신 격차는 점차 벌어지고 있다. 극단적 인종차별 정책을 뜻하는 아파르트헤이트를 빗대 '백신 아파르트헤이트'라는 비판까지 일고 있다.

선진국과 제약사가 앞다퉈 백신 공급을 약속했지만 사태의 근본적 해결에는 한계가 크다는 지적도 나왔다.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 WHO 사무총장은 "앞으로 몇 달에 걸쳐 수억 회분의 백신이 추가로 필요할 것"이라고 했다.

회의에 참석한 시릴 라마포사 남아프리카 대통령은 "세계적으로 감염병과 전쟁을 하고 있다"며 "전쟁을 치르는 동맹국들은 이익 뒤에 숨어 생명을 희생하는 것 대신 모든 무기를 사용해야 한다"고 했다. 백신 특허권 면제 등에 반대하고 있는 일부 유럽 국가를 겨냥한 것이다.

하지만 이날 채택된 5쪽 분량의 로마선언에는 코로나19 백신 지적재산권을 한시적으로 중단하는 내용은 포함되지 않았다. 백신 기부를 확대하고 수출금지를 해제하는 방안 등 16개 원칙이 포함됐다. 백신 생산을 늘리기 위해 자발적으로 기술을 이전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포괄적인 조항만 포함됐다.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은 회의 종료 후 기자회견에서 "모든 참석자가 백신 지재권이 기술 발전을 이끌 수 있다는 점에 동의했다"며 "백신 지재권 문제에 대한 '제3의 길'을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안할 것"이라고 했다.

이지현 기자 blues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