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만에 선보이는 '위험한' 사상가 마르크스의 '진짜 얼굴' [김동욱의 하이컬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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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마르크스는 오랫동안 이름조차 입에 올려서는 안 되는 사상가였습니다. 그의 책을 본다는 것은 큰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현실 사회주의가 무너지고, 한국 사회가 민주화된 이후에도 마르크스의 저술을 공공연히 접하고, 이를 공개하는 것은 왠지 부자연스런 일이었습니다.
1980년대 이후 번역된 그의 저술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하지만 과연 얼마나 정확하게 번역된 것인지 가늠할 방법이 마땅찮았습니다. 당연히 번역의 근간이 되는 저본의 정본(正本) 여부를 논할 수준도 안 됐습니다. 방대하고 난해한 마르크스의 사상 속에서 어떤 것이 그의 본모습인지 찾아볼 길도 막연했습니다. 그러다 세계가 급변했고, 어느덧 마르크스주의는 제대로 소개돼 보지도 못한 채 빛바랜 낡은 사상이 된듯한 모습입니다.
오랫동안 금단의 영역에 자리했고, 한때는 젊은 청년들의 열화같은 관심과 숭배의 대상이었으며, 지금은 지난 세대의 한때 관심 정도로 전락한 마르크스의 주요 저서들이 새로 번역돼 나오고 있습니다. 그것도 마르크스-엥겔스 문헌의 '유일 정본'으로 인정받는 전집인 'MEGA(Marx-Engels Gesamtausgabe)'판본을 번역한 그야말로 결정본을 선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인문·사회과학 전문 출판사인 길은 최근 MEGA 번역본의 첫 결실로 '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1861~63년 초고 제1분책'(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2)와 '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1861~63년 초고 제2분책'(잉여가치론 1)의 두 권을 선보였습니다. 유명한 마르크스의 주저인 '자본론'의 세 번째 초안으로 알려진 글 중 일부입니다.
출판사가 독일 데그루이터(De Gruyter)출판사와 정식으로 저작권 계약을 맺고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모든 지적 유산을 집대성한 MEGA를 번역 출간키로 결정한 지 9년 만에 나온 결과물입니다.
앞서 국내에선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들이 단행본이나 선집 형태로 소개됐습니다. 마르크스의 사상을 집대성한 '전집' 출간은 꿈처럼 머나먼 미래의 일이었습니다.
그나마도 마르크스 주요 저술이 독일어나 프랑스어로 쓰였지만, 번역본이 저본으로 삼은 책들은 영어나 일본어 번역본인 경우도 많았습니다. 독일어본을 저본으로 삼았더라도 냉전 시절 동독에서 출간된 마르크스-엥겔스 저작집(Marx Engels Werke·MEW)을 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동독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에서 1956~1990년 동안 총 43권으로 발간한 'MEW'판본은 당시까지 구할 수 있었던 가장 정확한 판본이긴 했지만, 사회주의권의 맹주였던 소련이 처했던 정치적 입장이 강하게 반영된 대중적 판본이라는 한계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문제를 고려해 마르크스-엥겔스의 모든 저작을 후대의 정치적 윤색을 벗겨내고 원의를 그대로 담은 판본으로 선보이자는 움직임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MEGA라는 이름이 붙은 움직임도 여러 차례 추진과 중단, 재개를 반복했습니다. 이번에 번역본의 근간이 된 MEGA 프로젝트는 스탈린 사후 소련에서 진행됐던 신MEGA를 복원한다는 인식하에 추진됐습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육필 원고들을 기초로 삼아 그들의 모든 지적 유산을 집대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은 것입니다. 1975~1990년 동안 43권의 마르크스-엥겔스의 주요 저작이 발간됐습니다. 냉전이 종식된 이후엔 1990년 설립된 '국제 마르크스-엥겔스 재단(IMES)'이 고증판 정본 수립 작업을 이어갔습니다. 2020년 말 현재 전체 발간 목표 114권(문헌 고증작업을 기록한 부속 자료 포함 시 228권) 가운데 69권이 발간됐습니다.
MEGA 프로젝트에 앞서 제대로 된 마르크스-엥겔스 전집을 만들려는 시도는 100여 년간 수차례 이어졌습니다. 지난 세기 세계의 절반을 지배한 사상이지만 정본 전집이 마련되지 못했던 데에는 유서 깊은 사연이 있습니다.
마르크스의 유고는 상속자인 셋째 딸이 자살하면서 엥겔스가 관리했습니다. 자녀가 없었던 엥겔스가 사망한 뒤 유고는 독일 사회민주당에 기증됐습니다. 하지만 이후 독일에서 나치가 집권하면서 사민당이 산산조각이 나다시피 했고 마르크스의 유고도 뿔뿔이 흩어지거나 사라졌습니다. 일부는 네덜란드 사회사연구소에 매각됐습니다.
설상가상 마르크스가 악필로 유명했고, 대다수 원고가 정리된 형태가 아닌 저술의 초기 단계 구상이 막연하게 적힌 경우가 많아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정리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주의 종주국 구소련에선 문헌적 혼란을 해소하기 위해 1921년 마르크스-엥겔스 연구소를 설립하고 전 세계에 흩어진 유고를 찾아 학술적 정본의 원칙을 갖춘 전집 발간을 추진했습니다. 구MEGA 작업입니다. 하지만 블라디미르 레닌 사망 이후 정치적 숙청 과정에서 이 작업은 1936년 중단됐습니다.
이후 구소련에서 스탈린 집권기 등에 두 차례에 걸쳐 소치네니야 판본이 나왔지만, 정치적 편향과 구성 및 편집의 결함이 지적됐습니다. 동독에서 발간된 MEW도 똑같은 태생적 한계가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의 사회주의 경제정책에 부합하는 내용만 담다 보니 '1844년 경제철학 초고'나 러시아 관련 문헌 등 일부 저작이 고의로 누락되고, 일부 유고의 경우 빠지는 부분이 발생했던 것입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쓴 모든 문장을 찾아, 편집하고, 출판하는 일은 그 규모도 방대할 뿐 아니라 사회주의 국가들에서도 정치적으로 위험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한계를 극복하고자 추진됐던 것이 구MEGA·신MEGA·MEGA 프로젝트인 것입니다. 이번 한국어판 정본 번역본은 이번에 나온 2권을 포함해 '공산당 선언' '헤겔 법철학 비판'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 등 1차분 8권이 우선 추진됩니다. 이어 2023년까지 17권을 발간할 계획입니다. 이후에도 중복 부분을 제외한 71권 77책(160여 권 분량)을 번역한다는 계획입니다. 출판사 측은 엄격한 잣대가 필요한 학술 분야에서 인용 출처의 근거가 대는 정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1차분 번역자 중 한 명인 강신준 동아대 명예교수는 "편견과 정치적 입장에 따른 왜곡을 제거한 학술 정본으로서 MEGA 번역본의 가치가 높다"고 말했습니다.
사회주의 사상의 유효성 여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학문적 연구를 위한 기초 작업이 이제서야 진행된 것은 늦은 감이 없지 않습니다. 방대한 작업을 과연 언제 끝마칠 수 있을지, 끝마치는 것이 가능할지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중요한 시도가 첫발을 내디뎠다는 것은 의미가 크다는 생각입니다.
앞으로 한 중견 출판사가 걸어 나갈 고되지만, 의미깊은 행보에 격려의 말씀을 전합니다.
김동욱 기자 kimdw@hankyung.com
1980년대 이후 번역된 그의 저술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하지만 과연 얼마나 정확하게 번역된 것인지 가늠할 방법이 마땅찮았습니다. 당연히 번역의 근간이 되는 저본의 정본(正本) 여부를 논할 수준도 안 됐습니다. 방대하고 난해한 마르크스의 사상 속에서 어떤 것이 그의 본모습인지 찾아볼 길도 막연했습니다. 그러다 세계가 급변했고, 어느덧 마르크스주의는 제대로 소개돼 보지도 못한 채 빛바랜 낡은 사상이 된듯한 모습입니다.
오랫동안 금단의 영역에 자리했고, 한때는 젊은 청년들의 열화같은 관심과 숭배의 대상이었으며, 지금은 지난 세대의 한때 관심 정도로 전락한 마르크스의 주요 저서들이 새로 번역돼 나오고 있습니다. 그것도 마르크스-엥겔스 문헌의 '유일 정본'으로 인정받는 전집인 'MEGA(Marx-Engels Gesamtausgabe)'판본을 번역한 그야말로 결정본을 선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인문·사회과학 전문 출판사인 길은 최근 MEGA 번역본의 첫 결실로 '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1861~63년 초고 제1분책'(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2)와 '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1861~63년 초고 제2분책'(잉여가치론 1)의 두 권을 선보였습니다. 유명한 마르크스의 주저인 '자본론'의 세 번째 초안으로 알려진 글 중 일부입니다.
출판사가 독일 데그루이터(De Gruyter)출판사와 정식으로 저작권 계약을 맺고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모든 지적 유산을 집대성한 MEGA를 번역 출간키로 결정한 지 9년 만에 나온 결과물입니다.
앞서 국내에선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들이 단행본이나 선집 형태로 소개됐습니다. 마르크스의 사상을 집대성한 '전집' 출간은 꿈처럼 머나먼 미래의 일이었습니다.
그나마도 마르크스 주요 저술이 독일어나 프랑스어로 쓰였지만, 번역본이 저본으로 삼은 책들은 영어나 일본어 번역본인 경우도 많았습니다. 독일어본을 저본으로 삼았더라도 냉전 시절 동독에서 출간된 마르크스-엥겔스 저작집(Marx Engels Werke·MEW)을 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동독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에서 1956~1990년 동안 총 43권으로 발간한 'MEW'판본은 당시까지 구할 수 있었던 가장 정확한 판본이긴 했지만, 사회주의권의 맹주였던 소련이 처했던 정치적 입장이 강하게 반영된 대중적 판본이라는 한계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문제를 고려해 마르크스-엥겔스의 모든 저작을 후대의 정치적 윤색을 벗겨내고 원의를 그대로 담은 판본으로 선보이자는 움직임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MEGA라는 이름이 붙은 움직임도 여러 차례 추진과 중단, 재개를 반복했습니다. 이번에 번역본의 근간이 된 MEGA 프로젝트는 스탈린 사후 소련에서 진행됐던 신MEGA를 복원한다는 인식하에 추진됐습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육필 원고들을 기초로 삼아 그들의 모든 지적 유산을 집대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은 것입니다. 1975~1990년 동안 43권의 마르크스-엥겔스의 주요 저작이 발간됐습니다. 냉전이 종식된 이후엔 1990년 설립된 '국제 마르크스-엥겔스 재단(IMES)'이 고증판 정본 수립 작업을 이어갔습니다. 2020년 말 현재 전체 발간 목표 114권(문헌 고증작업을 기록한 부속 자료 포함 시 228권) 가운데 69권이 발간됐습니다.
MEGA 프로젝트에 앞서 제대로 된 마르크스-엥겔스 전집을 만들려는 시도는 100여 년간 수차례 이어졌습니다. 지난 세기 세계의 절반을 지배한 사상이지만 정본 전집이 마련되지 못했던 데에는 유서 깊은 사연이 있습니다.
마르크스의 유고는 상속자인 셋째 딸이 자살하면서 엥겔스가 관리했습니다. 자녀가 없었던 엥겔스가 사망한 뒤 유고는 독일 사회민주당에 기증됐습니다. 하지만 이후 독일에서 나치가 집권하면서 사민당이 산산조각이 나다시피 했고 마르크스의 유고도 뿔뿔이 흩어지거나 사라졌습니다. 일부는 네덜란드 사회사연구소에 매각됐습니다.
설상가상 마르크스가 악필로 유명했고, 대다수 원고가 정리된 형태가 아닌 저술의 초기 단계 구상이 막연하게 적힌 경우가 많아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정리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주의 종주국 구소련에선 문헌적 혼란을 해소하기 위해 1921년 마르크스-엥겔스 연구소를 설립하고 전 세계에 흩어진 유고를 찾아 학술적 정본의 원칙을 갖춘 전집 발간을 추진했습니다. 구MEGA 작업입니다. 하지만 블라디미르 레닌 사망 이후 정치적 숙청 과정에서 이 작업은 1936년 중단됐습니다.
이후 구소련에서 스탈린 집권기 등에 두 차례에 걸쳐 소치네니야 판본이 나왔지만, 정치적 편향과 구성 및 편집의 결함이 지적됐습니다. 동독에서 발간된 MEW도 똑같은 태생적 한계가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의 사회주의 경제정책에 부합하는 내용만 담다 보니 '1844년 경제철학 초고'나 러시아 관련 문헌 등 일부 저작이 고의로 누락되고, 일부 유고의 경우 빠지는 부분이 발생했던 것입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쓴 모든 문장을 찾아, 편집하고, 출판하는 일은 그 규모도 방대할 뿐 아니라 사회주의 국가들에서도 정치적으로 위험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한계를 극복하고자 추진됐던 것이 구MEGA·신MEGA·MEGA 프로젝트인 것입니다. 이번 한국어판 정본 번역본은 이번에 나온 2권을 포함해 '공산당 선언' '헤겔 법철학 비판'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 등 1차분 8권이 우선 추진됩니다. 이어 2023년까지 17권을 발간할 계획입니다. 이후에도 중복 부분을 제외한 71권 77책(160여 권 분량)을 번역한다는 계획입니다. 출판사 측은 엄격한 잣대가 필요한 학술 분야에서 인용 출처의 근거가 대는 정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1차분 번역자 중 한 명인 강신준 동아대 명예교수는 "편견과 정치적 입장에 따른 왜곡을 제거한 학술 정본으로서 MEGA 번역본의 가치가 높다"고 말했습니다.
사회주의 사상의 유효성 여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학문적 연구를 위한 기초 작업이 이제서야 진행된 것은 늦은 감이 없지 않습니다. 방대한 작업을 과연 언제 끝마칠 수 있을지, 끝마치는 것이 가능할지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중요한 시도가 첫발을 내디뎠다는 것은 의미가 크다는 생각입니다.
앞으로 한 중견 출판사가 걸어 나갈 고되지만, 의미깊은 행보에 격려의 말씀을 전합니다.
김동욱 기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