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언 기자
김병언 기자
등자에 왼쪽 발을 걸고 갈기와 고삐를 쥔 채 안장에 올라탔다. 허리를 곧추세우고 ‘생명줄’이라는 고삐를 양손에 잡았다. 주위를 둘러보고 든 첫 생각은 ‘생각보다 높다’. 어른 말의 평균 어깨 높이는 1.6m다. 안장 등의 높이까지 더하면 말에 올라탄 사람의 눈높이가 3m는 되는 셈이다.

기계가 아니라 살아 있는 생명체 위에 앉아 있음도 실감하게 된다. 말은 가만히 서 있다가도 다른 말이 움직이면 본능대로 걸음을 내디뎠다. ‘멈추라’고 고삐를 잡아당기면 푸드덕거리며 싫은 티를 내기도 했다.

인간이 말 위에 앉아 세상을 내려다보게 되면서 인류 문명은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인간이 말을 길들인 것은 신석기시대 끝 무렵인 기원전 4000~5000년이다. 소나 돼지, 양보다 가축화가 늦었다. 식용으로 길렀지만 말의 속도와 지구력을 알아챈 인간은 말을 운송 수단으로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바퀴 달린 수레를 매달아 짐을 옮겼다. 말 위에 올라타는 기마술이 보급되면서 초원 지대를 옮겨 다니며 목축하는 유목민이 생겨났다. 전쟁의 양상도 바꿔놨다. 수백㎏에 달하는 말을 타고 커다란 창을 든 채 전속력으로 달려오는 기마병은 위세만으로 전장의 분위기를 뒤집는 힘이 있었다.

말이 인간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은 기동성이다. 인류의 문명이 세계 각지로 퍼져 나갈 수 있었던 것도 말 덕분이다. 《말의 세계사》를 쓴 멕시코의 인류학자 피타 켈레크나는 말을 길들였던 유라시아·아프리카 ‘구세계’와 일찌감치 말이 멸종한 북남미 대륙 ‘신세계’를 비교했다. 마야문명은 인도보다 500년 앞서 ‘0’의 개념을 만들었지만 말이 없었던 탓에 확산되지 못했다. 종교와 언어 역시 말의 움직임을 따라 퍼져 나갈 수 있었다. “‘지구상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원거리를 달리는 네 발 짐승’ 덕분에 지금의 인류 문명이 가능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수천 년 동안 인류의 문명과 함께했던 말의 시대는 갑작스럽게 끝을 맺었다. 증기기관이 등장하면서 말의 자리는 자동차, 기차가 대신하게 됐다. 전장에서도 전차가 기마병을 대신했다. 일부 유목민을 제외하면 이제 누구도 이동·운송 수단으로 말을 쓰지 않는다. 승마라는 레저스포츠의 탈 것으로만 남았다.

‘쯧쯧쯧’하는 소리와 함께 말의 배를 살짝 치자 말이 걷기 시작했다. 말과 함께 걷다 보니, 과거 말을 타고 초원을 달렸을 사람들과의 유대감마저 생겨났다. ‘인류 역사에 한 발짝이나마 발을 걸쳤다’는 그런 기분 말이다.

이승우 기자 leesw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