앱스틸라
앱스틸라
SK케미칼이 혈우병 치료제 개발에 나선 건 대한민국이 외환위기를 막 딛고 일어서기 시작한 2000년 무렵이었다. 세계 신약개발 트렌드가 화학약품에서 바이오의약품으로 전환되는 점을 감안해 바이오 신약 개발에 도전장을 내민 것이었다.

SK는 그렇게 9년을 공들여 후보물질을 개발했고, 비임상 단계를 앞둔 2009년 호주 제약사 CSL베링에 기술 수출했다. 국산 바이오 신약이 해외에 팔린 첫 사례였다. 이 물질(제품명 ‘앱스틸라’)은 2016년 국산 바이오 신약 중 처음으로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시판 허가를 받으며 미국 유럽 캐나다 호주 일본 등에 차례차례 데뷔했다.

‘기술수출에 성공한 1호 바이오 신약’ ‘FDA 승인을 받은 1호 바이오신약’ 등 2관왕 타이틀을 가진 앱스틸라가 국내에서 처방되기 시작했다. 2000년 개발에 들어간 지 21년 만이자 2009년 호주로 ‘시집’ 보낸 지 12년 만에 ‘고향’ 환자를 맞게 된 셈이다.

12년 만에 귀향한 1호 바이오신약

앱스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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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제약업계에 따르면 SK플라즈마는 전날부터 국내 주요 병원을 대상으로 앱스틸라 판매에 들어갔다. 2015년 설립된 SK플라즈마는 과거 SK케미칼이 맡았던 혈액제 관련 사업을 담당하는 회사다. 생산과 수입은 CSL베링이, 국내 영업과 판매는 SK플라즈마가 맡는다.

앱스틸라는 세계 최초이자 유일하게 ‘싱글 체인’(단일 사슬형) 기술로 설계된 A형 혈우병 치료제다. 혈우병은 선천적 요인으로 관련 유전자가 돌연변이를 일으켜 한 번 피가 나면 멈추지 않는 질환이다. A형 혈우병은 피를 굳게 하는 13가지 응고인자 중 여덟 번째 인자가 부족할 때 생긴다.

기존 치료제는 분리된 두 개의 단백질을 붙이는 방식이지만, 앱스틸라는 이를 하나로 결합했다. 안정성이 높아지면서 약효 지속 시간이 늘어난다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기존 치료제는 매주 3회 정도 주사를 맞아야 하지만 앱스틸라는 두 번이면 된다.

업계 관계자는 “표준치료에 비해 주사 맞는 횟수가 33% 줄어드는 만큼 앱스틸라를 찾는 환자가 상당할 것”이라며 “의사 처방을 받아 환자가 직접 구매해 가정에서 투약할 수 있는 만큼 앱스틸라의 인지도가 높아지면 매출도 따라 올라갈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 혈우병 치료제 시장 규모는 2000억원 수준이다. 현재 이 시장을 꽉 잡고 있는 녹십자가 새로운 도전자의 출현으로 어느 정도 타격을 받을 것으로 업계는 예상하고 있다.

SK플라즈마 관계자는 “입양 보냈던 자식이 돌아온 기분”이라며 “CSL베링 입장에선 한국의 시장 규모가 미국 유럽보다 훨씬 작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늦게 출시한 것”이라고 말했다.

제2도약에 나선 ‘SK 제약 삼총사’

SK 이름을 달고 제약·바이오사업을 하는 회사는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최태원 회장이 이끄는 SK㈜ 산하 SK바이오팜이다. 독자개발한 뇌전증 신약 ‘세노바메이트’로 국내외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사촌동생인 최창원 부회장이 챙기는 SK디스커버리 산하 ‘제약·바이오 삼총사’(SK케미칼·SK바이오사이언스·SK플라즈마)다.

SK케미칼은 국내 1호 신약(항암제 ‘선플라’)과 1호 천연물 신약(관절염 치료제 ‘조인스’)을 개발한 SK그룹 내 제약·바이오 사업의 ‘본류’다.

현재 ‘세계 최초 혁신신약’(first-in-class)을 목표로 비알코올성 지방간염 치료제를 개발하고 있다. 2년 전부터 스탠다임 디어젠 등 국내 빅데이터 및 인공지능(AI) 업체들과 AI를 기반으로 하는 신약 개발에 나서 류머티즘 관절염 치료제 후보물질을 도출하는 성과도 올렸다.

SK바이오사이언스도 아스트라제네카와 노바백스의 코로나19 백신을 위탁생산(CMO)해주는 것을 넘어 독자적인 코로나 백신을 개발하고 있다.

이 회사는 앞서 세계 최초로 세포배양 독감 백신 ‘스카이셀플루’도 개발했다. SK케미칼 관계자는 “오랜 기간 쌓은 경험과 기술을 앞세워 대한민국 대표 바이오기업으로 우뚝 서겠다”고 말했다.

오상헌 기자 ohye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