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시, 한시로 만나다] 유안진 선생의 <들꽃 언덕에서> 시를 읽은 후에 - 향기의 크기, 강성위
[한국 현대시, 한시로 만나다] 유안진 선생의 <들꽃 언덕에서> 시를 읽은 후에 - 향기의 크기, 강성위
讀柳岸津先生之野花岸上詩後(독유안진선생지야화안상시후)
- 香之大小(향지대소)

姜聲尉(강성위)

人養花草香氣小(인양화초향기소)
花草與人去不遠(화초여인거불원)
天養野花香氣大(천양야화향기대)
野花與天去相遠(야화여천거상원)

[주석]
* 讀(독) : ~을 읽다, ~을 읽고서. / 柳岸津先生(유안진선생) : 유안진 선생. / 之(지) : ~의. 관형격 구조조사. / 野花岸上詩(야화안상시) : <들꽃 언덕에서>라는 시. / 後(후) : ~한 뒤에, ~한 후에. / 香之大小(향지대소) : 향기의 대소(大小), 향기의 크기.
人養花草(인양화초) : 사람이 화초를 기르다, 사람이 기른 화초. / 香氣(향기) : 향기. / 小(소) : ~이 작다.
花草與人(화초여인) : 화초와 사람. ‘與’는 ‘and’에 해당하는 접속사이다. / 去不遠(거불원) : (떨어진) 거리가 멀지 않다. ‘去不遠’ 앞에 ‘相’이 생략된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天養野花(천양야화) : 하늘이 들꽃을 기르다, 하늘이 기른 들꽃. / 大(대) : ~이 크다.
野花與天(야화여천) : 들꽃과 사람. / 去相遠(거상원) : (떨어진) 거리가 서로 멀다.

[번역]
유안진 선생의 <들꽃 언덕에서> 시를 읽은 후에
- 향기의 크기

사람이 기른 화초는 향기가 작다
화초와 사람 거리가 멀지 않으니
하늘이 기른 들꽃은 향기가 크다
들꽃과 하늘 거리가 서로 머니까

[시작 노트]
필자의 졸시는 한시로 작성한 일종의 독후감이다. 유안진 선생의 <들꽃 언덕에서>를 몇몇 지인들과 SNS 동호회에 소개한 후에 새삼스레 감상하다가 불현듯 시상이 일어 엮어보게 된 것이었다. <들꽃 언덕에서> 시가 퍼뜩 떠오르지 않는 독자들을 위하여 우선 작품을 여기에 소개하도록 한다.
들꽃 언덕에서

유안진

들꽃 언덕에서 알았다
값비싼 화초는 사람이 키우고
값없는 들꽃은 하느님이 키우시는 것을

그래서 들꽃 향기는 하늘의 향기인 것을

그래서 하늘의 눈금과 땅의 눈금은
언제나 다르고 달라야 한다는 것도
들꽃 언덕에서 알았다

필자가 유안진 선생의 이 시를 감상하면서 우선적으로 주목한 것은 두 가지였는데, 그 첫 번째가 ‘사람이 키우는 화초’와 ‘하느님이 키우는 들꽃’으로 나눈 것이었다. 그 두 번째는 “들꽃 향기는 하늘의 향기”라고 얘기한 부분이었다. 이를 곰곰이 생각하고 있자니 문득 ‘향기의 크기’라는 말이 필자도 모르는 사이에 튀어나왔다. 필자의 졸시는, 필자가 주목한 것에 이렇게 단상(斷想) 하나가 더해져 엮어지게 된 것이다.

개인이 키우는 화초의 향기는 대개 그 집이나 그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향기는 작은 것이다. 이에 반해 하늘이 키우는 들꽃은, 그 향기를 누구나가 맡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필자는 그 향기가 커야만 한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애완용 동물이 자기를 길러주는 사람을 위하여 재롱을 떨 듯, 자기를 사랑해주는 존재에게 보답하려고 하는 마음이 저 화초나 들꽃인들 없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집과 뜰은 하늘보다 낮고 사람에게 가까우며, 하늘은 집과 뜰보다 높고 땅으로부터 멀다. 그리하여 필자는 화초와 사람 사이의 거리 및 들꽃과 하늘 사이의 거리를 언급하게 되었다. 이 대목이 필자의 득의처(得意處)였다면, 필자가 향기를 옅은 향기와 짙은 향기로 나누지 않고 작은 향기와 큰 향기로 나눈 대목은 필자의 고심처(苦心處)였다고 할 수 있다. 솔직히 말해 전체 시를 엮는 데 소요된 시간보다 ‘小’와 ‘大’ 이 두 글자를 선택하는 데 소요된 시간이 두 배는 넘었던 듯하다. 작시(作詩)가 즐거움이면서 동시에 괴로움인 이유는 이러한 데에도 있다.

필자는 애초에 이 시의 부제(副題)를 “花以香報恩(화이향보은)[꽃은 향기로 은혜를 갚는다]”로 적어놓고 나름대로 흡족해 하다가 결국에는 처음 시상에 따라 “香之大小(향지대소)[향기의 크기]”로 고쳤다. 모든 꽃이 향기를 풍기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향기 없는 꽃이라 하여 어찌 은혜를 모르겠는가!

꽃은 모양이 아름다운 꽃도 있고, 향기가 아름다운 꽃도 있으며, 빛깔이 아름다운 꽃도 있다. 또 드물게는 맛이 아름다운 꽃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먹을 수 있는 꽃은 흔하지 않기 때문에 꽃의 척도로는 모양과 향기와 빛깔 정도를 얘기하는 것이 무난할 듯하다. 필자는 언제부턴가 꽃의 모양과 향기와 빛깔을 미녀선발대회에서 주로 사용하는 말인 진선미(眞善美)에 견주어왔다. 그러나 그 진·선·미라는 말 자체에 무슨 우열이 있는 것은 아니듯, 꽃의 모양과 향기와 빛깔이라는 말에도 우열이라는 것이 있지는 않을 것이다. 말이 났으니 말이지 이 세 가지 요소 가운데 어느 하나만 빼어나도 훌륭하지 않은가? 그런데 찬찬히 살피다 보면 이 세 가지 요소를 모두 갖춘 꽃 역시 없지는 않다. 물론 이러한 판단은 주관적인 것이겠지만 말이다.

어느 꽃이 모든 요소를 훌륭하게 갖추듯, 또 물 좋고 정자 좋고 바람 좋은 곳이 어딘가에 있듯, 외양 좋고 인품 좋고 재력 좋은 사람 역시 없지 않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그런 사람을 만나기는 결코 쉽지가 않다. 그런 사람을 만나기보다 더 어려운 일은, 바로 내가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외양은 주로 타고나거나 물려받는 것이고, 재력은 하늘이 관여하는 일이라 어쩔 수 없는 것이라 한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저 내게 주어지지 않은 것을 한탄하며 한 세상을 보내야 하는 걸까? 필자는 그렇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사람의 가치를 높여줄 ‘인품’만큼은 내 스스로가 얼마든지 가꾸고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기른 향기로 들꽃이 하늘에 응답하듯이 기른 인품으로 내가 하늘에 응답한다면, 외진 곳에 핀 들꽃처럼 세상 사람들은 나를 몰라준다 하여도 하늘만은 나를 알아주지 않겠는가!

이 한시는 4구로 구성된 칠언고시로 짝수 구에 같은 글자 ‘遠(원)’으로 압운하였다.

2021. 6. 8.

<한경닷컴 The Lifeist> 강성위(hansh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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