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연물 유래 약물의 오랜 역사
기원전 1500년경 고대 이집트 파피루스 문서에는 버드나무 껍질을 달여 먹으면 관절염 통증이 없어진다는 내용이 있다. 또한 기원전 400년경 현대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는 산모에게 버드나무 잎으로 차를 끓여 먹게 하여 출산의 고통을 줄여줬다는 기록이 남아 있기도 하다.

그러나 실제로 천연물에서 약효 성분을 추출해내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는 19세기 이후 유기화학의 발달과 관련이 깊다. 1804년 독일의 약제사 프리드리히 제르튀르너가 양귀비 열매에서 진통 및 진정 효과가 있는 알칼로이드 성분의 추출에 성공했다. 이것이 최초의 현대의약품으로 기록된 모르핀이다. 1838년 이탈리아 화학자 라파엘 피리아는 해열진통효과를 내는 버드나무 껍질 속 성분 살리실산 추출에 성공했다. 그러나 살리실산은 해열작용은 뛰어났지만 구토나 위장장애를 일으키는 등 부작용이 심했다.

1853년 프랑스 화학자 샤를 프레데릭 게르하르트가 살리실산에 아세틸기를 붙이면 부작용이 줄어든다는 사실을 발견한 데 이어, 1897년 독일 바이엘사의 연구원 펠릭스 호프만이 순수하고 안정된 아세틸살리실산 합성에 성공하면서 현재의 아스피린이 만들어졌다. 고대 이집트에서 버드나무 껍질이 통증을 줄여준다는 사실을 알게된 지 3500여 년 만에 그 성분이 발견되어 약으로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아세틸살리실산이 진통효과를 내는 원리를 알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이다. 1971년 영국의 약리학자 존 베인은 통증 유발 물질인 프로스타글란딘의 합성 과정에서 아세틸살리실산이 클로옥시게나아제 효소의 활성을 저해함을 발견했다. 그는 이 공로로 1982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이 외에도 인류는 자연으로부터 약물을 찾고 약제를 개발하여 질병을 이겨낸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다. 1928년 영국 생물학자 알렉산더 플레밍이 푸른곰팡이에서 최초의 항생제인 페니실린을 발견했다. 이는 감염병으로부터 인류를 구해낸 위대한 발견으로 꼽힌다. 또 가깝게는 중국의 투유유가 개똥쑥에서 말라리아 치료제인 아르테미시닌을 찾아내기도 했다. 이 두 사람도 1945년과 2015년에 각각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도라지에서 발견한 코로나19 치료 후보물질
필자가 소속된 기초과학연구원 인지 및 사회성 연구단은 뇌를 주로 연구한다. 그러나 작년 코로나19 팬데믹 선언 무렵부터 코로나19 진단키트 개발 연구에 뛰어들었다. 이는 연구단을 이끄는 이창준 단장의 ‘이런 상황일수록 과학자들이 사회에 기여할 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지론 때문이었다.

필자도 비슷한 고민을 하던 중에 도라지 사포닌 성분 중 하나인 ‘플라티코딘 D’가 생각났다. 2016년부터 3년 동안 경희대 한의대에서 연구교수로 재직하면서 플라티코딘 D의 항고지혈증 및 항암효과에 대한 연구를 수행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세포에 플라티코딘 D를 처리하면 세포막에 발현하는 특정 단백질이 세포 안으로 들어가 소포에 격리되는 현상을 관찰했었다. 그때 찍어두었던 현미경 사진이 문득 떠오른 것이다.

혹시 플라티코딘 D를 처리하면 코로나19 수용체인 ACE2 단백질도 세포 안에 격리되지 않을까. 그러면 코로나19가 세포와 접촉하지 못해 코로나19 감염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가설을 실험적으로 증명해보고자 했다.

실험을 시작하기 전부터 여러 문제들과 직면해야 했다. 먼저 살아있는 코로나19를 구할 수 없었다. 더욱 큰 문제는 바이러스를 다룰 음압시설이 갖춰진 연구시설이 주위에 없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쩔 수 없이 살아있는 바이러스 대신 가짜 바이러스를 만들어 실험에 활용하기로 했다. 가짜 바이러스는 코로나19 감염에 필수적인 스파이크 단백질만을 발현하여 세포 내 증식 없이 세포침입 활성만을 모니터링할 수 있도록 제작한 것이다. 따라서 일반 실험실에서도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다.

실험 결과 플라티코딘 D가 코로나19의 세포감염을 차단하는 결과를 얻었다. 이와 더불어 도라지가 주성분인 ‘용각산’과 ‘도라지 청’에서도 항 코로나19 활성을 관찰했다. 이후 파스퇴르연구소의 김승택 박사 연구팀과의 공동연구를 통해 플라틴코딘 D가 살아있는 감염성 코로나19에 대해서도 동일한 효과를 보인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플라티코딘 D는 어떤 방식으로 코로나19의 세포감염을 막는 것일까. 우선 코로나19의 세포감염 메커니즘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코로나19는 외피에 발현하는 스파이크 단백질을 이용하여 인체세포 표면의 ACE2 단백질에 결합한다. 다음으로 ACE2에 결합된 스파이크 단백질의 일부가 인체세포의 단백질 분해효소에 의해 잘려 나가게 된다. 이후 절단되고 남은 부분이 실타래처럼 풀려나와 인체세포 세포막에 박히고, 이를 매개로 바이러스 외피와 세포 간의 막 융합이 일어난다.

이러한 막 융합을 통해 코로나19 유전물질인 게놈 RNA가 세포 안으로 들어와 인체세포의 여러 단백질을 이용해 자신을 복제 증식한다. 요컨대 코로나19는 ‘결합-절단-융합’의 세 단계를 거쳐 세포 안으로 침입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가운데 하나의 단계라도 막을 수 있다면 코로나19 감염을 차단할 수 있다.

이러한 배경지식을 기초로 플라티코딘 D가 표적하는 단계를 찾아보기로 했다. 여러 차례 반복 실험을 했만 플라티코딘 D가 결합 및 절단 단계에 미치는 뚜렷한 효과는 관찰할 수 없었다. 그러나 마지막 막 융합 단계를 저해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화학구조상 플라티코딘 D는 콜레스테롤과 유사한 구조의 중앙 부위 양쪽에 당이 붙어있는 형태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구조로 인해 중앙부분이 세포막 안쪽에 위치하게 되고 한쪽에 길게 붙어있는 당 부위가 세포막 밖으로 돌출되어 코로나19와의 막 융합을 저해한다는 모델도 제시했다.

플라티코딘 D의 코로나19 치료제 가능성은?
도라지 및 주요 활성 성분인 플라티코딘 D가 폐 손상을 유발하는 호흡기증후군인 코로나19의 치료제가 될 수 있을까. 지금까지 우리는 실험실 환경의 배양세포 단계에서 가능성을 확인했을 뿐이다. 따라서 실제 개발까지는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다.

현재 백신 보급으로 인해 주요 선진국을 중심으로 코로나19가 진정국면에 들어서고 있지만 오히려 확진자 수가 급증하는 국가도 있고, 코로나19가 앞으로 풍토병으로 토착화할 가능성이 높아져, 백신은 물론 치료제도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미국 국립보건원의 골든 크래그는 2020년 발표한 리뷰 논문에서 지난 40년 동안 만들어진 신약의 65%가 천연물 혹은 천연물에서 유래했다는 통계를 공개했다. 여전히 많은 사람이 합성신약을 대세로 여기면서 천연물 신약을 구시대의 유물로 치부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과연 팬데믹으로부터 인류를 구할 강력한 항바이러스제가 천연물에서 나올 수 있을까.

버드나무 껍질에서 아스피린이 탄생하기까지 수천 년의 시간과 수많은 과학자의 노력이 필요했음을 다시 한 번 상기해보자. 어쩌면 우리는 그 긴 여정의 출발점에 있는 것인지 모른다.
<저자 소개>

김태영 기초과학연구원(IBS) 인지 및 사회성 연구단 선임연구원
종양생물학 전공자로 뇌암을 포함한 암의 발생원인 및 치료약 개발 연구를 하고 있다. 코로나19 발생을 계기로 만들어진 인지 및 사회성연구단 내 코로나연구그룹을 이끌며 천연물 항바이러스 제제 발굴 연구도 병행 수행하고 있다. 현재 IBS 인지 및 사회성 연구단 선임연구위원으로 재직 중이다.

*이 글은 <한경바이오인사이트> 매거진 2021년 6월호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