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대석칼럼] 친구의 죽음이 일깨워준 기꺼운 수고로움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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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닷컴 더 라이피스트
단풍나무 밑, 잘 가라 친구야!
단풍나무 밑, 잘 가라 친구야!
친구 대현이는 작은 나무상자에 재로 담겼습니다. 그리고 김포 어느 산자락 아버지 산소 옆에 새로 심은 단풍나무 한 그루 밑으로 묻히며 저 세상으로 돌아갔습니다.
아쉬운 듯 아들과 미망인이 삽을 든 인부들의 손에 노란 지폐를 몇 장 쥐여주며 ‘곧 장마가 오니 배수로를 잘 부탁한다.’라면서 몇 번이고 고개를 돌리면서 산 아래로 내려갔습니다.
그렇게 64년 동안의 인생은 단 3일 동안 많은 사람이 오가며 흘린 눈물과 울음, 탄식 그리고 아쉬움이 산의 고요한 정적에 묻히며 마무리되었습니다. 누구도 알지 못하는 저승길, 마지막 배웅에는 기꺼운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은 가족과 친구가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군인 가족인 대현이는 경기도 포천 일동으로 전학 왔습니다. 럭비 유니폼 같은 선명한 녹색과 노란색의 큰 줄무늬 셔츠를 입었습니다. 돼지 산소, 청계산 등 일동 여기저기를 같이 쏘다니며 놀았지요. 공부도 제법 했고 스케이트를 아주 잘 탔으며 씨름 기술이 녹여있는 힘도 좋아서 쌈에서 져 본 적이 없었습니다. 나로서는 든든한 친구 하나가 생긴 셈이었습니다.
중학교에 가서는 반장을 하는 상철이와 같이 어울려 다녔습니다. 어느 초여름 날 대현이 어머님이 장 달이기 용 싸리나무가 필요하다고 하시어 상철이랑 청계산에서 한 리어카를 해왔습니다. 너무 배가고파 거의 가마솥 크기의 하얀 밥을 모두 먹어치우기도 하였지요.
친구들과 기산3리 소방서 근처 대현이네 집에 우르르 모여 자주 놀러 갔고 대현이 어머님은 언제나 따듯한 밥 한 끼 해주시려 했고 아버지는 근엄한 편이시지만 상철이와 나에게는 다정하게 해 주시려고 노력(?)하신 모습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그 때는 사실 조금 무서웠습니다.
중3 때 명문대 출신 현역 군인이 대현이 과외공부 할 때 저도 같이 낄 수 있는 행운이 있었습니다. 공부도 공부지만 그 군인 선생님이 시내버스터미널 오뎅 집에서 사주는 하양 통계란 든 어묵과 국물 맛은 지금도 침이 넘어갑니다. 늘 그 집 유리에는 김이 하얗게 모락모락 올라갔습니다.
나는 동네에 있는 일동 상고로, 대현이는 부모님이 원하는 대로 춘천 제일고를 무난히 입학하였습니다. 대현이는 방학이 되면 일동에 왔고 상철이, 종엽이랑 기타 치고 노래하며, 축구, 탁구, 테니스 등 운동하며 산으로 들로 원 없이 놀러 다녔습니다.
누군가의 제안으로 젊은 날에 멋진 추억을 만들자며 고등학교 2학년 경 봄방학 때 운악산을 1박 2일로 가자는데 합의하였습니다. 넷이서 텐트용 마대(쌀포대), 김치, 쌀 등이 든 가방을 둘러메고 한겨울 얼어 죽지 않을 만큼 형들 옷 둘러 싸매니 무장공비도 웃고 갈 희한한 행색이었지만 눈들은 초롱초롱했습니다.
등산로도 없는 험한 산 길로 화현 삼불사로 거쳐서 운악산 정상에 올라가 하룻밤을 잤습니다. 정상 표지석 옆에 누런 마대를 덮고 잤는데 너무 춥고 무서워 소변을 보러 나갈 수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다음날 현등사로 하산하여 서파를 거쳐 서울 세검정 대현이 사촌형님 댁, 홍릉 나의 누님 댁까지 '거지' 차림으로 순례를 하였는데 당초 산행 의도 대로 평생 추억이 되었습니다.
신기한 것은 만나서 무모한 운악산 등산 이야기할 때마다 새로운 사실이 나오고 같은 기억이 반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늘 자기가 맞다고 싸움이지요. 수십 번을 회상해도 각자가 기억하고 싶은 일만을 과거의 창고에서 꺼내는 모양입니다.
성실하며 우직하고 유머가 있는 대현이는 육군 사병으로 입대하여 자대 단기하사로 차출되었습니다. 박격포 분대장을 할 때 동창 창원이랑 면회를 갔습니다. 부대 근처에 간판 없는 삼겹살 식당의 수십 병의 소주를 모두 마시고 쫓겨나다 시피했습니다. 없는 술을 계속 달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대현이가 군대생활이 얼마나 고달픈지 부대로 안 돌아간다고 하여 인근 구멍가게 고량주 등을 모두 바닥내고도, 대현이 선임을 불러내어(면회, 외출) 간신히 귀대시킬 수 있었습니다.
대현이는 귀대 한 다음날 새벽 비상 출동으로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나 역시 술 취한 창원이를 데리고 집에 돌아 가느라 별일이 많았습니다. 이 이야기도 아마 수십 번 이상을 모여하였는데 그때마다 버전이 조금씩 다릅니다. 함께 경험한 과거의 일이 세월이 지나면서 바뀔일이 전혀 없는데도 말이지요.
80년 초에 나는 한일은행에 대현이는 코카콜라, 상철이는 중앙대에 취업을 하였고 나중 같이 살자며 돈을 매월 모았는데 꿈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꽤 돈을 모아가고 있었지만 살다 보니 형편이 어려운 친구 지원에 야금야금 모은 돈을 썼기 때문입니다. 지금 다시 같은 상황이 된다면 아마 매년 조금씩이라도 살 터를 사놓을 겁니다.
84년 내가 연세 지점에 있을 때입니다. 대현이 거래처 한 여직원이 대현에게 마음 있었고 그 여직원은 대현이랑 월악산 등산을 하자고 하였습니다. 대현이는 비즈니스 차원에서 거절할 수 없었고 나랑 함께 가자고 하였습니다.
그때 거래처 여직원이 짝을 맞추기 위하여 고향 동창을 데리고 나왔는데 그 미인 친구가 대현이 평생 배필이 되었습니다. 거래처 여직원이 큰 실수를 한 셈입니다. 여자는 자기보다 이쁜 친구를 자기 남자 친구에게 소개하면 안 된다는 연애 원칙을 몰랐나 봅니다.
대현이는 아들 둘을 낳았고 큰 음료 회사 본부장으로 이직을 하였습니다. 경기 서부책임자로, 대현이는 관할직원 3백 여명이 모인 어느 행사에서 초청한 나를 소개하였고, 뒤 풀이 행사에서 내가 멋지게 노래를 3곡이나 불렀습니다. 대현이는 그날 엄청 기분 좋아하며 환하게 웃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대현이는 악기를 잘 다루었습니다. 기타는 물론이고 색소폰, 아코디언 등은 수준급입니다. 덕분에 상철이도 대현이에게 색소폰을 배웠고 지금 트럼펫을 익히고 있는 중입니다.
약 칠 년 전쯤입니다. 내가 의왕시 어느 공원에 있는 한옥집의 큰 남도식당을 10여 명의 손님들과 처음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앉아서 음식을 주문할 때쯤 멀리서 라노비아라는 색소폰 연주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좌중에게 저 연주는 틀림없이 내 친구 대현이가 부는 것이라고 말하자 전부 그럴리 없다며 웃었습니다. 나는 그중 한 손님과 약 200여미터 떨어진 소리 나는 공원 한 가운데로 가보니 무대에서 연주하는 대현이를 실제 본 일도 있습니다. 대현이도 너무나 반가워 했고, 그날 같이 있던 손님들도 신비로운 경험을 함께 했습니다.
최근까지 약 10여년 동안 대현이와 함께 상철이와 나는 사당역 12번 출구에서 부부동반 또는 남자끼리 한 달에 한 번 이상은 만났습니다. 먼저 식사를 하고 난 후, 당구를 한 게임 하였습니다. 그리고 차나 맥주집에서 애들 이야기, 부모님과 마누라님 이야기, 사는 이야기 등 소소하지만 중요한 삶의 이야기를 주고받습니다.
정치 이야기 등 논쟁이 치열할 때마다 대현이는 항상 중간에 있었습니다. 상철이와 나의 견해가 다른 부분이 있을 때마다 대현이는 100분 토론 진행자처럼 사회를 보듯이 발언 시간을 재며 중재자 역할을 하였습니다. 2분 발언, 1분 반박, 1분 재반박 등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대현이는 상철이와 나 양쪽 모두에게 '대현이 도대체 너의 의견은 뭔데'라며 공격을 당하는 것으로 결론이 나고는 합니다. 그럴 때마다 대현이는 나는 세상에서 친구가 너희 둘이야, 당연히 너희 둘이 싸우지 않게 내가 가운데 서야지 하면서 껄껄 웃었습니다.
대현이가 간에 암 초기 증상이 있다는 것은 2년 전부터 알았지만 가볍게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부터 체중이 줄었고 당구도 한 게임 이상은 치지 않았으며 술도 거의 안 마시거나 막걸리 한 병으로 줄었습니다. 그리고는 약 1년 전 부터 "야! 우리 셋이 어디 시골 가서 살자. 나는 너희랑 살고 싶다."라며 그냥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을 만날 때마다 하였습니다.
상철이도 지난 해에 시골 가서 살자는 말에 동의를 하였는데 조건이 중앙대 퇴직 후 새로 다니는 다른 대학 2년 계약직이 끝나면 가자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상철이가 계약이 연장되었고 내년 6월이나 되어야 갈 수 있다는 말을 기분 좋게 했습니다. 그러나 대현이는 조용히 축하한다고 화답해주었습니다.
한 달 반전쯤 몸에 이상을 느껴서인지 대현이는 양재동에서 하던 '꽃 '일을 잠시 쉬어야겠다며 정리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담당한 청와대 꽃 납품일 만은 조만간 돌아와 다시 할 것이라고 주변에 말하였다고 합니다. 대현이는 친구와 모여있을 때 뉴스에 나오는 청와대 행사장에 멋진 꽃을 설명해주며 뿌듯해하였습니다.
5월 4일 대현이가 온몸에 암이 퍼져 성모병원에 입원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코로나로 얼굴도 보지 못한 채 단옷날 세상을 떴습니다. 장례식장에 가자 아들 둘이 번듯한 대학 나와 좋은 직장에 다녀서인지 문상객이 참 많았습니다. 자식 농사는 제대로 지은 거지요. 나 역시 슬픔 중에도 기분이 괜찮았습니다. 이틀간 머물던 메트로 병원 영안실을 떠나 인덕원 성당에서 베드로 신분으로 장례미사는 장엄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그리고 인천 승화원에 도착하여 오후 1시 24분에 불꽃에 쌓여서 2시간여 만에 한 줌의 재로 작은 나무상자에 담겼습니다.
아들과 부인 그리고 자신과 아들의 친구들이 정성 들여 심은 단풍나무 밑에서 저승의 문을 열고 돌아갔습니다.
산을 내려오자니 뒤에서 “대석아, 인생은 말이야, 내 인생 마무리를 위해 '기꺼운 수고로움'을 주는 소중한 사람을 만드는 꿈같은 여정인 것 같다. 다음에 보자.”라는 소리가 들립니다.
대현아, 이제 아프지 말고 푹 쉬어라, 친구야 그리고 저 세상에서는 꼭 같이 살자.
<한경닷컴 The Lifeist> 박대석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독자 문의 : thepen@hankyung.com
아쉬운 듯 아들과 미망인이 삽을 든 인부들의 손에 노란 지폐를 몇 장 쥐여주며 ‘곧 장마가 오니 배수로를 잘 부탁한다.’라면서 몇 번이고 고개를 돌리면서 산 아래로 내려갔습니다.
그렇게 64년 동안의 인생은 단 3일 동안 많은 사람이 오가며 흘린 눈물과 울음, 탄식 그리고 아쉬움이 산의 고요한 정적에 묻히며 마무리되었습니다. 누구도 알지 못하는 저승길, 마지막 배웅에는 기꺼운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은 가족과 친구가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군인 가족인 대현이는 경기도 포천 일동으로 전학 왔습니다. 럭비 유니폼 같은 선명한 녹색과 노란색의 큰 줄무늬 셔츠를 입었습니다. 돼지 산소, 청계산 등 일동 여기저기를 같이 쏘다니며 놀았지요. 공부도 제법 했고 스케이트를 아주 잘 탔으며 씨름 기술이 녹여있는 힘도 좋아서 쌈에서 져 본 적이 없었습니다. 나로서는 든든한 친구 하나가 생긴 셈이었습니다.
중학교에 가서는 반장을 하는 상철이와 같이 어울려 다녔습니다. 어느 초여름 날 대현이 어머님이 장 달이기 용 싸리나무가 필요하다고 하시어 상철이랑 청계산에서 한 리어카를 해왔습니다. 너무 배가고파 거의 가마솥 크기의 하얀 밥을 모두 먹어치우기도 하였지요.
친구들과 기산3리 소방서 근처 대현이네 집에 우르르 모여 자주 놀러 갔고 대현이 어머님은 언제나 따듯한 밥 한 끼 해주시려 했고 아버지는 근엄한 편이시지만 상철이와 나에게는 다정하게 해 주시려고 노력(?)하신 모습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그 때는 사실 조금 무서웠습니다.
중3 때 명문대 출신 현역 군인이 대현이 과외공부 할 때 저도 같이 낄 수 있는 행운이 있었습니다. 공부도 공부지만 그 군인 선생님이 시내버스터미널 오뎅 집에서 사주는 하양 통계란 든 어묵과 국물 맛은 지금도 침이 넘어갑니다. 늘 그 집 유리에는 김이 하얗게 모락모락 올라갔습니다.
나는 동네에 있는 일동 상고로, 대현이는 부모님이 원하는 대로 춘천 제일고를 무난히 입학하였습니다. 대현이는 방학이 되면 일동에 왔고 상철이, 종엽이랑 기타 치고 노래하며, 축구, 탁구, 테니스 등 운동하며 산으로 들로 원 없이 놀러 다녔습니다.
누군가의 제안으로 젊은 날에 멋진 추억을 만들자며 고등학교 2학년 경 봄방학 때 운악산을 1박 2일로 가자는데 합의하였습니다. 넷이서 텐트용 마대(쌀포대), 김치, 쌀 등이 든 가방을 둘러메고 한겨울 얼어 죽지 않을 만큼 형들 옷 둘러 싸매니 무장공비도 웃고 갈 희한한 행색이었지만 눈들은 초롱초롱했습니다.
등산로도 없는 험한 산 길로 화현 삼불사로 거쳐서 운악산 정상에 올라가 하룻밤을 잤습니다. 정상 표지석 옆에 누런 마대를 덮고 잤는데 너무 춥고 무서워 소변을 보러 나갈 수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다음날 현등사로 하산하여 서파를 거쳐 서울 세검정 대현이 사촌형님 댁, 홍릉 나의 누님 댁까지 '거지' 차림으로 순례를 하였는데 당초 산행 의도 대로 평생 추억이 되었습니다.
신기한 것은 만나서 무모한 운악산 등산 이야기할 때마다 새로운 사실이 나오고 같은 기억이 반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늘 자기가 맞다고 싸움이지요. 수십 번을 회상해도 각자가 기억하고 싶은 일만을 과거의 창고에서 꺼내는 모양입니다.
성실하며 우직하고 유머가 있는 대현이는 육군 사병으로 입대하여 자대 단기하사로 차출되었습니다. 박격포 분대장을 할 때 동창 창원이랑 면회를 갔습니다. 부대 근처에 간판 없는 삼겹살 식당의 수십 병의 소주를 모두 마시고 쫓겨나다 시피했습니다. 없는 술을 계속 달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대현이가 군대생활이 얼마나 고달픈지 부대로 안 돌아간다고 하여 인근 구멍가게 고량주 등을 모두 바닥내고도, 대현이 선임을 불러내어(면회, 외출) 간신히 귀대시킬 수 있었습니다.
대현이는 귀대 한 다음날 새벽 비상 출동으로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나 역시 술 취한 창원이를 데리고 집에 돌아 가느라 별일이 많았습니다. 이 이야기도 아마 수십 번 이상을 모여하였는데 그때마다 버전이 조금씩 다릅니다. 함께 경험한 과거의 일이 세월이 지나면서 바뀔일이 전혀 없는데도 말이지요.
80년 초에 나는 한일은행에 대현이는 코카콜라, 상철이는 중앙대에 취업을 하였고 나중 같이 살자며 돈을 매월 모았는데 꿈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꽤 돈을 모아가고 있었지만 살다 보니 형편이 어려운 친구 지원에 야금야금 모은 돈을 썼기 때문입니다. 지금 다시 같은 상황이 된다면 아마 매년 조금씩이라도 살 터를 사놓을 겁니다.
84년 내가 연세 지점에 있을 때입니다. 대현이 거래처 한 여직원이 대현에게 마음 있었고 그 여직원은 대현이랑 월악산 등산을 하자고 하였습니다. 대현이는 비즈니스 차원에서 거절할 수 없었고 나랑 함께 가자고 하였습니다.
그때 거래처 여직원이 짝을 맞추기 위하여 고향 동창을 데리고 나왔는데 그 미인 친구가 대현이 평생 배필이 되었습니다. 거래처 여직원이 큰 실수를 한 셈입니다. 여자는 자기보다 이쁜 친구를 자기 남자 친구에게 소개하면 안 된다는 연애 원칙을 몰랐나 봅니다.
대현이는 아들 둘을 낳았고 큰 음료 회사 본부장으로 이직을 하였습니다. 경기 서부책임자로, 대현이는 관할직원 3백 여명이 모인 어느 행사에서 초청한 나를 소개하였고, 뒤 풀이 행사에서 내가 멋지게 노래를 3곡이나 불렀습니다. 대현이는 그날 엄청 기분 좋아하며 환하게 웃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대현이는 악기를 잘 다루었습니다. 기타는 물론이고 색소폰, 아코디언 등은 수준급입니다. 덕분에 상철이도 대현이에게 색소폰을 배웠고 지금 트럼펫을 익히고 있는 중입니다.
약 칠 년 전쯤입니다. 내가 의왕시 어느 공원에 있는 한옥집의 큰 남도식당을 10여 명의 손님들과 처음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앉아서 음식을 주문할 때쯤 멀리서 라노비아라는 색소폰 연주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좌중에게 저 연주는 틀림없이 내 친구 대현이가 부는 것이라고 말하자 전부 그럴리 없다며 웃었습니다. 나는 그중 한 손님과 약 200여미터 떨어진 소리 나는 공원 한 가운데로 가보니 무대에서 연주하는 대현이를 실제 본 일도 있습니다. 대현이도 너무나 반가워 했고, 그날 같이 있던 손님들도 신비로운 경험을 함께 했습니다.
최근까지 약 10여년 동안 대현이와 함께 상철이와 나는 사당역 12번 출구에서 부부동반 또는 남자끼리 한 달에 한 번 이상은 만났습니다. 먼저 식사를 하고 난 후, 당구를 한 게임 하였습니다. 그리고 차나 맥주집에서 애들 이야기, 부모님과 마누라님 이야기, 사는 이야기 등 소소하지만 중요한 삶의 이야기를 주고받습니다.
정치 이야기 등 논쟁이 치열할 때마다 대현이는 항상 중간에 있었습니다. 상철이와 나의 견해가 다른 부분이 있을 때마다 대현이는 100분 토론 진행자처럼 사회를 보듯이 발언 시간을 재며 중재자 역할을 하였습니다. 2분 발언, 1분 반박, 1분 재반박 등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대현이는 상철이와 나 양쪽 모두에게 '대현이 도대체 너의 의견은 뭔데'라며 공격을 당하는 것으로 결론이 나고는 합니다. 그럴 때마다 대현이는 나는 세상에서 친구가 너희 둘이야, 당연히 너희 둘이 싸우지 않게 내가 가운데 서야지 하면서 껄껄 웃었습니다.
대현이가 간에 암 초기 증상이 있다는 것은 2년 전부터 알았지만 가볍게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부터 체중이 줄었고 당구도 한 게임 이상은 치지 않았으며 술도 거의 안 마시거나 막걸리 한 병으로 줄었습니다. 그리고는 약 1년 전 부터 "야! 우리 셋이 어디 시골 가서 살자. 나는 너희랑 살고 싶다."라며 그냥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을 만날 때마다 하였습니다.
상철이도 지난 해에 시골 가서 살자는 말에 동의를 하였는데 조건이 중앙대 퇴직 후 새로 다니는 다른 대학 2년 계약직이 끝나면 가자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상철이가 계약이 연장되었고 내년 6월이나 되어야 갈 수 있다는 말을 기분 좋게 했습니다. 그러나 대현이는 조용히 축하한다고 화답해주었습니다.
한 달 반전쯤 몸에 이상을 느껴서인지 대현이는 양재동에서 하던 '꽃 '일을 잠시 쉬어야겠다며 정리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담당한 청와대 꽃 납품일 만은 조만간 돌아와 다시 할 것이라고 주변에 말하였다고 합니다. 대현이는 친구와 모여있을 때 뉴스에 나오는 청와대 행사장에 멋진 꽃을 설명해주며 뿌듯해하였습니다.
5월 4일 대현이가 온몸에 암이 퍼져 성모병원에 입원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코로나로 얼굴도 보지 못한 채 단옷날 세상을 떴습니다. 장례식장에 가자 아들 둘이 번듯한 대학 나와 좋은 직장에 다녀서인지 문상객이 참 많았습니다. 자식 농사는 제대로 지은 거지요. 나 역시 슬픔 중에도 기분이 괜찮았습니다. 이틀간 머물던 메트로 병원 영안실을 떠나 인덕원 성당에서 베드로 신분으로 장례미사는 장엄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그리고 인천 승화원에 도착하여 오후 1시 24분에 불꽃에 쌓여서 2시간여 만에 한 줌의 재로 작은 나무상자에 담겼습니다.
아들과 부인 그리고 자신과 아들의 친구들이 정성 들여 심은 단풍나무 밑에서 저승의 문을 열고 돌아갔습니다.
산을 내려오자니 뒤에서 “대석아, 인생은 말이야, 내 인생 마무리를 위해 '기꺼운 수고로움'을 주는 소중한 사람을 만드는 꿈같은 여정인 것 같다. 다음에 보자.”라는 소리가 들립니다.
대현아, 이제 아프지 말고 푹 쉬어라, 친구야 그리고 저 세상에서는 꼭 같이 살자.
<한경닷컴 The Lifeist> 박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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