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경력 50년. 방송 3사의 연기 대상을 모두 받은 유일한 배우에게도 풀지 못한 한이 있었다.
영화 '빛나는 순간'에서 사랑에 빠진 70대 해녀 진옥을 연기한 배우 고두심(70)은 드디어 한을 풀었다는 듯 영화 속 진옥처럼 웃었다.
영화 개봉을 앞두고 21일 평창동 자택 근처 한 카페에서 만난 고두심은 "(멜로 주인공은) 젊을 때도 안 시켜줬는데 이 나이에 할 수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고 했다.
영화는 제주 해녀 진옥이 자신을 취재하러 서울에서 자신을 취재하러 온 다큐멘터리 PD 경훈(지현우)을 만나 서로의 깊은 상처를 보듬으며 온기를 나누는 특별한 로맨스를 담았다.
제주도 출신인 그는 '고두심하면 제주도고, 고두심의 얼굴이 제주의 풍광'이라는 소준문 감독의 말을 전하며 "그 말을 듣고도 못 하겠다고 할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며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막내아들뻘인 30대 배우와의 애정신에는 조금 망설이지 않았을까 싶었지만, 고두심은 호쾌하게 웃으며 전혀 그렇지 않았다고 했다.
"여배우로 50년을 살았지만 멜로를 못 해봐서 멜로물에 목말라 있던 사람이었어요.
갓난쟁이 아기 엄마로 시작해서 '전원일기' 큰 며느리로 20년을 살았으니 그렇게 된 것 같은데, 한이라면 한이었죠. 멜로 못 할 게 뭐 있나, 고민의 여지가 없었죠." 곶자왈 숲, 찬란하게 빛나는 햇살 아래서 진옥의 무릎을 베고 누운 경훈과의 애틋한 시간은 아름답게 담겼지만, 동백충에 물리는 바람에 온몸에 두드러기가 올라 2주나 고생하기도 했다고 그는 전했다.
2004년 영화 '인어 공주'에서도 제주 해녀 역을 맡긴 했지만, 상황과 마음가짐은 완전히 달랐다.
"중학교 때 바다에 빠져 물을 많이 먹은 뒤 물을 무서워하고 싫어했는데 그때까지도 극복을 못 했을 때였어요.
시나리오를 받아 보니 물에 들어가는 장면이 없어서 하기로 한 건데 나중에 물에 들어가는 딱 한 장면만 해줄 수 없냐고 해서 시간을 쪼개가며 어렵게 연습을 했죠. 촬영 때 제주도에 태풍이 와 그 한 장면 찍으러 동남아까지 갔지만 공포에 하얗게 질려서 결국 못했거든요.
이번에는 대역 써서 될 일이 아니니 이를 악물고 죽기 살기로 했지. 내가 나이가 몇이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지금 뒷걸음질 치면 눈 감을 때까지 못 하겠구나 싶었으니까.
"
그는 "고향 바다에 해녀 삼촌들이 다 제주 사람들이니 안도감이 커서 그랬는지 시키는 것 다 하고, 내가 성에 안 차면 한 번 더하겠다고 하면서 했다"며 "다른 바다에 가서 하라고 하면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고향 제주에 대한 그의 깊은 애정은 연기를 하는 자신뿐 아니라 촬영을 지켜보던 모든 스태프를 먹먹하게 만들기도 했다.
경훈의 카메라 앞에서 지나온 삶을 이야기하며 꺼낸 진옥의 깊은 상처는 4·3 사건이었다.
1948년 벌어진 끔찍한 일을 1951년생인 그가 직접 겪은 것은 아니지만, 기억도 하지 못하는 어린 시절부터 들어 온 이야기는 "뼈와 살에 새겨진 것 같았다"고 했다.
시나리오에 있던 짧은 대사는 그의 입을 통해 눈앞에서 총격이 벌어지고 사람들이 끌려 나가는 장면이 실타래가 풀리듯 절절하게 흘러나왔다.
"너무 먹먹했고, 지금도 어떻게 했지 싶은데 만족보다는 여전히 아쉬움이 남아요.
내가 그런다고 억울하게 가신 분들의 한이 풀릴 일은 아니지만, 조금이라도 위로가 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어요.
거기 있던 스태프들과 그 감정을 나눈 거지. 더 하라면 더 할 수도 있었지만 감독이 그만하라고 하더라고."
차기작은 다시 한번 제주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와 또 다른 영화를 준비하고 있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속에 지연되는 중이다.
그는 "어떤 역할이든 못할 게 없다"며 "나이 든 배우에게서 끄집어낼 수 있는 게 많다는 걸 작가들이 많이 써주시면 좋겠다"고 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