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과 연기는 비슷해…'몸이냐, 언어냐' 표현의 차이일 뿐
“저 배우 춤 잘 추네.” 올 상반기 최고 흥행작인 tvN 드라마 ‘빈센조’에 나온 댄스교습소 원장 래리 강을 보며 많은 시청자들이 이런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배우의 얼굴을 잘 아는 사람들이라면 고개를 끄덕였을 것 같다. 래리 강을 연기한 배우는 국내 대표 현대무용가이자 안무가인 김설진(40·사진). 2014년 방송된 엠넷의 댄스 오디션 프로그램 ‘댄싱 9’ 시즌2의 우승자다.

사진=김영우 기자
사진=김영우 기자
김설진의 ‘부캐’(주요 캐릭터 이외의 다른 캐릭터)는 이뿐 아니다. 2019년 tvN 드라마 ‘아스달 연대기’엔 ‘푸른 거미’ 역으로 출연했다. 지난해 12월 공개된 넷플릭스 드라마 ‘스위트홈’에선 연근 괴물을 연기하는 동시에 안무가로서 괴물들의 전체 움직임을 구상했다. 최근엔 연극배우로도 변신했다. 지난달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개막한 연극 ‘완벽한 타인’에서 비밀을 간직한 페페 역을 연기하고 있다. ‘본캐’와 ‘부캐’의 구분이 무색할 정도의 섬세한 연기로 호평받고 있다.

다재다능한 모습에 감탄이 나오지만 세종문화회관에서 만난 김설진은 재능보다 ‘오래달리기’의 힘을 강조했다. “어릴 때부터 낯도 많이 가리고 재능도 별로 없었어요. 그런데 오래달리기는 정말 잘했어요. 지금까지 해온 일들도 마찬가지예요. 꾸준히 해오던 일들일 뿐인데 시간이 점점 쌓이니 좋은 반응을 얻게 된 것 같습니다.”

제주도 출신인 김설진은 어린 시절부터 호기심이 많았다고 한다. “호기심 때문에 선생님들께 엄청 혼났어요. 저는 궁금해서 물어봤는데 말대답을 한다고 생각하셨던 거죠.”

호기심 많은 그는 열 살 때 처음 새로운 세상에 눈을 떴다. 춤이었다. 사촌 형과 동네 형들의 춤을 보고 함께 스트리트 댄스를 추게 된 것이다. 하지만 당시 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가족과 선생님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길에 모여서 춤을 추면 경찰 아저씨들조차 ‘모여 있지 말라’고 하셨죠. 먹고사는 것에 대한 걱정 때문에 우려 섞인 시선도 많았어요.”

그럼에도 그는 갈수록 춤에 깊이 빠졌고, 고2 땐 홀로 서울에 올라와 춤을 배웠다. 돈이 없어 라면 하나로 끼니를 때우다 쓰러지기도 했다. “집에 돈을 보내 달라고 하면 ‘내려오라’고 하실 것 같아 오기로 버텼어요. 하지만 힘들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어요.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 훨씬 컸던 거죠.”

그의 오기는 점차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에 들어갔고, 2008년부턴 벨기에 유명 무용단 피핑톰에서 활동하며 명실상부한 현대무용가로 성장했다. 현재는 창작그룹 무버의 예술감독으로도 활약하고 있다.

연기는 ‘인정사정 볼 것 없다’ 등을 만든 이명세 감독의 단편영화 ‘그대 없이는 못 살아’(2017)에 출연하며 시작했다. “처음엔 영상에 대한 호기심이 컸어요. 춤은 추는 순간 사라져 버리고, 무대도 올리는 순간 사라져 버리는데 이걸 어떻게 하면 잘 기록하고 보관할 수 있을까 고민했던 거죠. 영상이 가장 좋을 것 같아 시작했는데, 점점 연기에 더 관심이 생겼어요.”

춤과 연기는 많이 다를 것 같지만 그는 공통점이 많다고 했다. “넓은 의미로 보면 춤과 연기는 비슷한 것 같아요. 몸으로 표현하느냐, 언어로 표현하느냐의 차이일 뿐이죠. 제가 하는 모든 행위는 살아가는 것들에 대한 다양한 궁금증과 호기심을 풀기 위한 것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춤과 연기는 비슷해…'몸이냐, 언어냐' 표현의 차이일 뿐
유명 무용가인 만큼 배우로 활동할 때도 그에겐 늘 ‘춤’이 따라다녔다. “제가 캐스팅되면 춤을 추는 장면이 자꾸 늘어나요. 큰 무기가 큰 장애물이 될 수도 있는 것 같아 한동안 딜레마에 빠졌죠.” 하지만 현재 출연 중인 연극 ‘완벽한 타인’에선 춤을 추지 않는다. “제가 춤을 안 춰서 실망하실까봐 조심스럽기도 했죠. 하지만 춤만이 무기가 아니라는 것도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김설진은 앞으로도 다양한 모습으로 대중 앞에 선다. 국립현대무용단과의 공연, 피아니스트 손열음 등과의 협업도 진행하고 있다. 그가 출연한 단편영화 ‘풍경들’도 공개될 예정이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