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시, 한시로 만나다] 첫사랑, 민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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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닷컴 더 라이피스트
첫사랑
민영기
별을 보고 싶으냐
참아라
열다 보면 구겨지느니
아픈 기억도
세월 속에 묻어두면
꽃이 된다는데, 내게
너만 한 꽃이 또 있을라고
너보다
더 붉은 꽃 또 있을라고……
[태헌의 한역]
初戀(초련)
願看星辰否(원간성진부)
忍矣啓則皺(인의계즉추)
若埋傷憶歲月裏(약매상억세월리)
聞說爲花心中處(문설위화심중처)
於我何有如汝花(어아하유여여화)
世上何花紅於汝(세상하화홍어여)
[주석]
* 初戀(초련) : 첫사랑.
願看(원간) : ~을 보기를 원하다, ~을 보고 싶다. / 星辰(성진) : 별. / 否(부) : 시구(詩句) 말미에 쓰이는 부정(否定) 부사 ‘否’, ‘不(불)’, ‘未(미)’, ‘非(비)’ 등은 시구 전체를 의문형으로 만들어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願看星辰否”는 “별이 보고 싶으냐?”의 뜻이 된다.
忍矣(인의) : 참아라. ‘矣’는 명령형 문말(文末)에 쓰는 어기사(語氣詞)이다. / 啓則皺(계즉추) : 열면 구겨진다. ‘啓’는 ‘開(개)’와 뜻이 같다. ‘則’은 가정형에 쓰여 앞말이나 앞 문장을 가정의 의미로 만들어주는 일종의 연사(連詞:접속사)이다. ‘皺’는 ‘주름’, ‘주름이 지다’는 뜻인데 ‘구겨진다’는 뜻도 여기에 포함된다.
若(약) : 만약. / 埋(매) : ~을 묻다. / 傷憶(상억) : 아픈 기억. / 歲月裏(세월리) : 세월 속, 세월 속에.
聞說(문설) : 듣자니 ~라고 한다, ~라고 듣다. / 爲花(위화) : 꽃이 되다. / 心中處(심중처) : 마음속에 처하다, 마음속에 머물다. 한역(漢譯)의 편의를 위하여 원시에는 없는 말을 역자가 임의로 보탠 것이다.
於我(어아) : 나에게. / 焉有(언유) : 어찌 ~이 있겠는가? / 如汝花(여여화) : 너와 같은 꽃.
世上(세상) : 세상, 세상의. / 何花(하화) : 어느 꽃, 무슨 꽃. / 紅於汝(홍어여) : 너보다 붉다.
[한역의 직역]
첫사랑
별을 보고 싶으냐
참아라, 열면 구겨지느니
아픈 기억을 세월 속에 묻으면
꽃이 되어 마음에 머문다는데
내게 어찌 너 같은 꽃이 있을까
세상 무슨 꽃이 너보다 더 붉을까
[한역 노트]
첫사랑은 추억이라는 상자 속에 있는, 어리거나 젊은 시절의 보물이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시인은 그 상자를 열다 보면 보물이 구겨질 수 있다고 하였다. 추억을 추억으로 고이 두지 않고 거기에 모종의 생각을 더하고, 그 모종의 생각이 다시 모종의 액션(Action)을 불러오게 된다면, 그 보물이 빛바랠 수도 있다는 뜻일 게다. 첫사랑 내지 첫사랑의 추억을 ‘별’에 비유한 이 대목에서의 설문(設問)은, 전지적인 관점을 취하고는 있어도 시인이 자기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말이 분명해 보인다.
‘아픈 기억’이라는 말은 첫사랑이 끝내 마지막 사랑으로 매듭지어지지 않고 중간에서 끊어졌다는 뜻이다. 결별의 계기가 된 것이 무엇이었던 간에, 결별은 시인에게 아플 수밖에 없는 성장통을 수반했을 것이다. 끝나버린 첫사랑의 아픈 기억은 세월 속에 묻어둘 밖에 달리 뾰족한 방법이 없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세월이 약”이라는 슬픈 말에 기대 아픔이 이울기를 기다렸던 세월은 또 얼마나 길게 느껴졌을까?
그렇게 무던히 세월 속에 묻어왔을 첫사랑의 추억이 아픔 속에서도 자라 마침내 꽃으로 피어 있다. 추억 속에서 피어나는 아련한 사람들을 꽃에 견주어 본다면, 아마도 그 꽃들 가운데 첫사랑만큼 그립고 애틋한 꽃은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내게 / 너만 한 꽃이 또 있을라고”라 하였다. 대개 사춘기를 전후하여 홍역처럼 앓았을 그 순수의 열병이,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꽃으로 피어난다는 것을 그 임시에는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시인은 다시 “너보다 / 더 붉은 꽃 또 있을라고”라 하였다. 시인의 관점에서 보자면 시인의 첫사랑은, 시인이 알고 있었던 그 당시 소녀들이나 여인들 가운데 가장 사랑스러운 존재였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또 다른 각도에서는 첫사랑 자체를 꽃 가운데 가장 붉은 꽃으로 묘사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어떻게 보든 시인이 사랑의 빛깔을 붉은 색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사랑은 과연 무슨 색일까? 사랑의 상징이 된 지 오래인 하트 모양이 대개 붉게 그려지는 까닭에, 사랑은 붉은 색이라는 인식이 보편이 되었을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붉은 색이라고 단언할 수만은 없는 것은, 문화권이나 개인 취향에 따라 저마다 대답이 다르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여가수 끌로딘 롱제(Claudine longet)가 노래하고 폴 모리아(Paul Mauriat) 악단이 연주하여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곡인 “L'amour est bleu(Love is blue)”는 “사랑은 푸른 색”으로 번역이 되고, 그 곡의 가사가 사랑하는 사람이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린다는 내용으로 이루어진, 매우 밝고 감미로운 사랑의 노래이다. 그런데도 어인 일인지 우리나라에서는 "우울한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사랑은 당연히 붉은 색이어야 하는데, 기다리는 사랑을 노래했으므로 '푸른 사랑'은 곧 '우울한 사랑'이라고 생각한 때문은 아닐지 자못 궁금하다.
연 구분 없이 9행으로 이루어진 원시를 역자는 오언 2구와 칠언 4구가 결합된 6구의 고시로 한역하였다. 한역하는 과정에서 굳이 칠언구로 통일하지 않은 까닭은, 원시에 없는 내용을 필요 이상으로 덧보태야 하는 상황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오언 2구는 매구에 압운하였으며, 칠언 4구는 짝수 구에 압운하였다. 그러므로 이 시의 압운자는 ‘否(부)’·‘皺(추)’, ‘處(처)’·‘汝(여)’가 된다.
2021. 6. 29.
<한경닷컴 The Lifeist> 강성위(hanshi@naver.com)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독자 문의 : thepen@hankyung.com
민영기
별을 보고 싶으냐
참아라
열다 보면 구겨지느니
아픈 기억도
세월 속에 묻어두면
꽃이 된다는데, 내게
너만 한 꽃이 또 있을라고
너보다
더 붉은 꽃 또 있을라고……
[태헌의 한역]
初戀(초련)
願看星辰否(원간성진부)
忍矣啓則皺(인의계즉추)
若埋傷憶歲月裏(약매상억세월리)
聞說爲花心中處(문설위화심중처)
於我何有如汝花(어아하유여여화)
世上何花紅於汝(세상하화홍어여)
[주석]
* 初戀(초련) : 첫사랑.
願看(원간) : ~을 보기를 원하다, ~을 보고 싶다. / 星辰(성진) : 별. / 否(부) : 시구(詩句) 말미에 쓰이는 부정(否定) 부사 ‘否’, ‘不(불)’, ‘未(미)’, ‘非(비)’ 등은 시구 전체를 의문형으로 만들어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願看星辰否”는 “별이 보고 싶으냐?”의 뜻이 된다.
忍矣(인의) : 참아라. ‘矣’는 명령형 문말(文末)에 쓰는 어기사(語氣詞)이다. / 啓則皺(계즉추) : 열면 구겨진다. ‘啓’는 ‘開(개)’와 뜻이 같다. ‘則’은 가정형에 쓰여 앞말이나 앞 문장을 가정의 의미로 만들어주는 일종의 연사(連詞:접속사)이다. ‘皺’는 ‘주름’, ‘주름이 지다’는 뜻인데 ‘구겨진다’는 뜻도 여기에 포함된다.
若(약) : 만약. / 埋(매) : ~을 묻다. / 傷憶(상억) : 아픈 기억. / 歲月裏(세월리) : 세월 속, 세월 속에.
聞說(문설) : 듣자니 ~라고 한다, ~라고 듣다. / 爲花(위화) : 꽃이 되다. / 心中處(심중처) : 마음속에 처하다, 마음속에 머물다. 한역(漢譯)의 편의를 위하여 원시에는 없는 말을 역자가 임의로 보탠 것이다.
於我(어아) : 나에게. / 焉有(언유) : 어찌 ~이 있겠는가? / 如汝花(여여화) : 너와 같은 꽃.
世上(세상) : 세상, 세상의. / 何花(하화) : 어느 꽃, 무슨 꽃. / 紅於汝(홍어여) : 너보다 붉다.
[한역의 직역]
첫사랑
별을 보고 싶으냐
참아라, 열면 구겨지느니
아픈 기억을 세월 속에 묻으면
꽃이 되어 마음에 머문다는데
내게 어찌 너 같은 꽃이 있을까
세상 무슨 꽃이 너보다 더 붉을까
[한역 노트]
첫사랑은 추억이라는 상자 속에 있는, 어리거나 젊은 시절의 보물이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시인은 그 상자를 열다 보면 보물이 구겨질 수 있다고 하였다. 추억을 추억으로 고이 두지 않고 거기에 모종의 생각을 더하고, 그 모종의 생각이 다시 모종의 액션(Action)을 불러오게 된다면, 그 보물이 빛바랠 수도 있다는 뜻일 게다. 첫사랑 내지 첫사랑의 추억을 ‘별’에 비유한 이 대목에서의 설문(設問)은, 전지적인 관점을 취하고는 있어도 시인이 자기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말이 분명해 보인다.
‘아픈 기억’이라는 말은 첫사랑이 끝내 마지막 사랑으로 매듭지어지지 않고 중간에서 끊어졌다는 뜻이다. 결별의 계기가 된 것이 무엇이었던 간에, 결별은 시인에게 아플 수밖에 없는 성장통을 수반했을 것이다. 끝나버린 첫사랑의 아픈 기억은 세월 속에 묻어둘 밖에 달리 뾰족한 방법이 없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세월이 약”이라는 슬픈 말에 기대 아픔이 이울기를 기다렸던 세월은 또 얼마나 길게 느껴졌을까?
그렇게 무던히 세월 속에 묻어왔을 첫사랑의 추억이 아픔 속에서도 자라 마침내 꽃으로 피어 있다. 추억 속에서 피어나는 아련한 사람들을 꽃에 견주어 본다면, 아마도 그 꽃들 가운데 첫사랑만큼 그립고 애틋한 꽃은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내게 / 너만 한 꽃이 또 있을라고”라 하였다. 대개 사춘기를 전후하여 홍역처럼 앓았을 그 순수의 열병이,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꽃으로 피어난다는 것을 그 임시에는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시인은 다시 “너보다 / 더 붉은 꽃 또 있을라고”라 하였다. 시인의 관점에서 보자면 시인의 첫사랑은, 시인이 알고 있었던 그 당시 소녀들이나 여인들 가운데 가장 사랑스러운 존재였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또 다른 각도에서는 첫사랑 자체를 꽃 가운데 가장 붉은 꽃으로 묘사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어떻게 보든 시인이 사랑의 빛깔을 붉은 색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사랑은 과연 무슨 색일까? 사랑의 상징이 된 지 오래인 하트 모양이 대개 붉게 그려지는 까닭에, 사랑은 붉은 색이라는 인식이 보편이 되었을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붉은 색이라고 단언할 수만은 없는 것은, 문화권이나 개인 취향에 따라 저마다 대답이 다르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여가수 끌로딘 롱제(Claudine longet)가 노래하고 폴 모리아(Paul Mauriat) 악단이 연주하여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곡인 “L'amour est bleu(Love is blue)”
연 구분 없이 9행으로 이루어진 원시를 역자는 오언 2구와 칠언 4구가 결합된 6구의 고시로 한역하였다. 한역하는 과정에서 굳이 칠언구로 통일하지 않은 까닭은, 원시에 없는 내용을 필요 이상으로 덧보태야 하는 상황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오언 2구는 매구에 압운하였으며, 칠언 4구는 짝수 구에 압운하였다. 그러므로 이 시의 압운자는 ‘否(부)’·‘皺(추)’, ‘處(처)’·‘汝(여)’가 된다.
2021. 6. 29.
<한경닷컴 The Lifeist> 강성위(hansh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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