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양반가의 기이한 사건, 원인은 상속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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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 권내현 교수가 쓴 신간 '유유의 귀향, 조선의 상속'
조선시대 문인 이항복(1556∼1618) 문집에 실린 글 중에 '유연전'(柳淵傳)이라는 작품이 있다.
주인공 유연(柳淵)이 억울하게 처형됐으나, 나중에 진실이 밝혀져 누명을 벗는다는 내용이다.
유연전은 흔히 고전소설이라고 하지만,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유연의 처형에 얽힌 기록이 존재한다.
역사학자인 권내현 고려대 교수는 신간 '유유의 귀향, 조선의 상속'(너머북스 펴냄)에서 유연전을 실화로 보고, 양반 가족이 파멸에 이르는 기이한 '막장 드라마' 같은 사건을 역사학과 문헌학 관점으로 분석한다.
저자가 생각하기에 유연전에 수록된 사건에서 핵심 키워드는 '상속'이다.
상속으로 인해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발생했고, 여러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사건 전개 과정은 매우 복잡하다.
대구에 유예원이란 인물이 살았다.
그에게는 아들 세 명, 딸 세 명이 있었다.
아들 이름은 유치, 유유, 유연이었다.
장남 유치는 일찍 죽었고, 자식이 없었다.
그런데 사실상 장남이 된 둘째 유유가 1556년 가출했다.
유유는 심질(心疾), 즉 정신병을 앓았다고 한다.
유유가 떠난 사이에 형수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고향에는 유유 부인과 유연 부부만 남았다.
1562년 어느 날 유유와 유연의 자형인 이지가 갑자기 해주에서 집 나간 유유를 찾았다고 했다.
이지는 조선 제4대 임금 세종의 고손이었고, 유유의 누나와 혼인했다.
누나가 일찍 눈을 감아 다른 여성과 재혼한 상태였다.
자신이 유유라고 주장하며 등장한 사람은 실제로는 다른 인물이었다.
이름은 채응규. 그는 첩과 아들을 데리고 왔다.
채응규는 얼굴과 몸매가 유유와 달라 실체가 의심스러웠다.
유연은 채응규가 형이라고 믿을 수 없어 진위를 가려 달라고 대구 부사에게 요청했다.
문제는 재판을 받던 채응규가 사라지면서 발생했다.
채응규의 첩은 유연이 형의 자리를 빼앗으려 했다며 고발했고 유유 부인도 이에 동조했다.
유연은 결국 의금부로 이송돼 처형됐다.
그러고 나서 1579년 평안도에 있던 진짜 유유가 나타났다.
이지와 공모해 유유 행세를 한 채응규는 자결했고, 이지도 신문을 받다 죽었다.
진짜 유유는 아버지 장례에 참여하지 않은 죄로 형벌을 받고 몇 해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저자는 엉킨 실뭉치 같은 사건을 상세히 들여다본 뒤 가짜 유유가 등장한 이유, 유유 부인이 가짜 유유인 채응규의 진위를 적극적으로 가리지 않은 까닭에 모두 상속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흔히 조선시대에 장자 상속분이 월등히 많았다고 인식되지만, 전기에는 형제가 균등하게 부모 재산을 나눠 갖는 경향이 있었다고 설명한다.
재산을 나눈 기록인 분재기(分財記)를 보면 남녀에 따른 차별도 거의 없었다.
딸이 죽으면 보통 남편이 그 상속분을 챙겼다.
이지가 가짜 유유를 내세우고, 가짜 유유의 첩이 유연을 고발한 데에는 자신의 상속분을 늘리려는 속셈이 있었다고 저자는 본다.
또 유유 부인이 가짜 유유의 아들을 받아들인 것도 가계 계승에서 불안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저자는 16세기를 균등 상속에서 장자 우대 상속으로 넘어가기 직전의 과도기로 규정하면서 조선 후기였으면 유유 집안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장자 중심 사회가 되는 17∼18세기였으면 유유와 유연 대신 유치의 양자가 가계를 계승했고, 유유·유연·이지는 상속에서도 유치의 양자에게 밀리는 한정적 위치에 있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저자는 조선 후기에 장자 우대 상속이 일반화된 원인으로 상속 재산의 축소, 유교 이념의 확산을 꼽는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형제가 균등 상속을 하는 것은 개별 가계의 경제력 증가, 가부장적 이데올로기 쇠퇴가 작용한 결과라고 이해한다.
352쪽. 2만3천 원.
/연합뉴스
주인공 유연(柳淵)이 억울하게 처형됐으나, 나중에 진실이 밝혀져 누명을 벗는다는 내용이다.
유연전은 흔히 고전소설이라고 하지만,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유연의 처형에 얽힌 기록이 존재한다.
역사학자인 권내현 고려대 교수는 신간 '유유의 귀향, 조선의 상속'(너머북스 펴냄)에서 유연전을 실화로 보고, 양반 가족이 파멸에 이르는 기이한 '막장 드라마' 같은 사건을 역사학과 문헌학 관점으로 분석한다.
저자가 생각하기에 유연전에 수록된 사건에서 핵심 키워드는 '상속'이다.
상속으로 인해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발생했고, 여러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사건 전개 과정은 매우 복잡하다.
대구에 유예원이란 인물이 살았다.
그에게는 아들 세 명, 딸 세 명이 있었다.
아들 이름은 유치, 유유, 유연이었다.
장남 유치는 일찍 죽었고, 자식이 없었다.
그런데 사실상 장남이 된 둘째 유유가 1556년 가출했다.
유유는 심질(心疾), 즉 정신병을 앓았다고 한다.
유유가 떠난 사이에 형수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고향에는 유유 부인과 유연 부부만 남았다.
1562년 어느 날 유유와 유연의 자형인 이지가 갑자기 해주에서 집 나간 유유를 찾았다고 했다.
이지는 조선 제4대 임금 세종의 고손이었고, 유유의 누나와 혼인했다.
누나가 일찍 눈을 감아 다른 여성과 재혼한 상태였다.
자신이 유유라고 주장하며 등장한 사람은 실제로는 다른 인물이었다.
이름은 채응규. 그는 첩과 아들을 데리고 왔다.
채응규는 얼굴과 몸매가 유유와 달라 실체가 의심스러웠다.
유연은 채응규가 형이라고 믿을 수 없어 진위를 가려 달라고 대구 부사에게 요청했다.
문제는 재판을 받던 채응규가 사라지면서 발생했다.
채응규의 첩은 유연이 형의 자리를 빼앗으려 했다며 고발했고 유유 부인도 이에 동조했다.
유연은 결국 의금부로 이송돼 처형됐다.
그러고 나서 1579년 평안도에 있던 진짜 유유가 나타났다.
이지와 공모해 유유 행세를 한 채응규는 자결했고, 이지도 신문을 받다 죽었다.
진짜 유유는 아버지 장례에 참여하지 않은 죄로 형벌을 받고 몇 해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저자는 엉킨 실뭉치 같은 사건을 상세히 들여다본 뒤 가짜 유유가 등장한 이유, 유유 부인이 가짜 유유인 채응규의 진위를 적극적으로 가리지 않은 까닭에 모두 상속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흔히 조선시대에 장자 상속분이 월등히 많았다고 인식되지만, 전기에는 형제가 균등하게 부모 재산을 나눠 갖는 경향이 있었다고 설명한다.
재산을 나눈 기록인 분재기(分財記)를 보면 남녀에 따른 차별도 거의 없었다.
딸이 죽으면 보통 남편이 그 상속분을 챙겼다.
이지가 가짜 유유를 내세우고, 가짜 유유의 첩이 유연을 고발한 데에는 자신의 상속분을 늘리려는 속셈이 있었다고 저자는 본다.
또 유유 부인이 가짜 유유의 아들을 받아들인 것도 가계 계승에서 불안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저자는 16세기를 균등 상속에서 장자 우대 상속으로 넘어가기 직전의 과도기로 규정하면서 조선 후기였으면 유유 집안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장자 중심 사회가 되는 17∼18세기였으면 유유와 유연 대신 유치의 양자가 가계를 계승했고, 유유·유연·이지는 상속에서도 유치의 양자에게 밀리는 한정적 위치에 있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저자는 조선 후기에 장자 우대 상속이 일반화된 원인으로 상속 재산의 축소, 유교 이념의 확산을 꼽는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형제가 균등 상속을 하는 것은 개별 가계의 경제력 증가, 가부장적 이데올로기 쇠퇴가 작용한 결과라고 이해한다.
352쪽. 2만3천 원.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