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여름을 닮은 '탱고' 음악의 대가, 피아졸라[김희경의 7과 3의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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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나 공연에서 춤추는 장면이 나오면 마음이 꿈틀대곤 합니다. 그러다 그들의 동작에 맞춰 손과 발을 까딱이게 됩니다.
다들 이런 경험이 있으실 텐데요. 그중 가장 강렬하고 매혹적으로 다가왔던 춤은 무엇이었나요. 아마 많은 분들이 '탱고'를 꼽으실 것 같습니다.
영화 '여인의 향기' '해피투게더' '탱고 레슨' 등에서 탱고를 추는 장면이 인상적으로 다가왔죠. 여름처럼 뜨겁고 정열적인 탱고를 보고 있노라면 심장이 함께 쿵쾅대는 것 같습니다.
아르헨티나를 중심으로 남미에서 시작된 탱고는 이제 전 세계 사람들이 즐기고 사랑합니다. 춤뿐만 아니라 음악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상에선 춤보다 음악이 더욱 가깝고 친근하게 다가옵니다. 영화와 광고에서 자주 접하기도 하고, 국내에서 탱고 음악 공연을 쉽게 찾아볼 수도 있습니다.
올해는 특히 더 그렇습니다. '탱고 음악의 대가' 아스토르 피아졸라(1921~1992)가 탄생 100주년을 맞았기 때문이죠. 이를 기념해 반도네오니스트 고상지와 탱고 밴드가 오는 4일, 현대음악앙상블 '소리'는 다음 달 7일 피아졸라 음악으로 공연을 올린다고 합니다.
피아졸라의 이름이 생소하신 분들도 많으실 텐데요. 그의 음악을 감상하거나 작품 제목을 들으면 익숙하게 느껴지실 겁니다.
대표 탱고 음악으로 꼽히는 '리베르탱고', 김연아 선수의 뛰어난 피겨 솜씨와 함께 접할 수 있었던 ‘아디오스 노니노’와 '록산느의 탱고'가 모두 피아졸라의 작품입니다. 클래식 애호가들이 사랑하는 '망각', '탱고의 역사'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사계’ 등도 그가 만들었습니다.
피아졸라의 삶도 탱고와 닮은 점이 많은데요. 그 여정과 작품 세계로 함께 떠나보실까요. 피아졸라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태어났을 때부터 오른쪽 다리가 뒤틀려 있었습니다. 수차례 수술을 한 덕분에 많이 좋아졌지만 평생 걸음걸이가 불편했죠. 그러나 이는 그의 음악 인생에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못했습니다.
피아졸라가 쓴 작품 수는 2500여 곡에 달합니다. 그 숫자만으로 음악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고스란히 느껴지죠.
피아졸라는 4살 때 부모님을 따라 미국 뉴욕으로 이민을 가게 됐습니다. 부모님은 가난했지만 음악을 사랑했고, 아이의 음악 교육에도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자신의 숙명이 되는 악기를 만나게 됩니다. 아버지가 전당포에서 사준 중고 '반도네온'입니다. 사진 속에서 피아졸라가 연주하고 있는 악기입니다.
반도네온은 '탱고의 영혼'이라고 불릴 만큼 탱고 음악에 많이 쓰입니다. 연주를 하려면 먼저 악기를 양손에 쥐고 풀무를 여닫으며 공기를 주입해야 합니다. 그리고 버튼을 눌러 소리를 내죠.
아코디언과도 비슷하게 생겼지만 더 음폭이 넓고 정교합니다. 그는 이후 아르헨티나로 돌아와서도 반도네온 공부를 이어갔습니다. 덕분에 반도네오니스트로서도 이름을 떨쳤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호기롭고 용감했던 것 같습니다. 배움과 음악적 교류를 위해 유명인들을 서슴없이 찾아갔습니다. 영화 '여인의 향기'에 나왔던 '간발의 차이로(Por Una Cabeza)'라는 곡을 만든 카를로스 가르델도 직접 찾아갔죠. 가르델은 피아졸라 이전 탱고의 대중화를 이끈 인물입니다. 가르델은 자신을 찾아온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노래 반주 등을 맡겼습니다.
피아졸라는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이 아르헨티나를 방문했을 때도 불쑥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루빈스타인 밑에서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던 클래식 공부를 배웠습니다. 음악을 위해서라면 늘 과감히 용기를 내고 도전했기 때문에 거장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의 음악 여정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지금은 피아졸라의 음악이 탱고 음악의 정석처럼 여겨지지만, 당시엔 파격 그 자체였습니다. 전통 탱고 음악을 고집하는 사람들은 그의 음악을 격렬히 비난했죠.
피아졸라의 음악은 '누에보 탱고(Nuevo Tango)'라고 불렸는데요. '누에보'는 '새로운'이란 뜻을 가진 스페인어입니다. 이전과 다른 차원의 탱고 음악을 만들었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새롭다는 걸까요. 그는 탱고 음악과 클래식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다양한 요소들을 결합시켜 탱고 음악을 재탄생 시켰습니다.
사실 피아졸라는 어느 순간부터 탱고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습니다. 탱고는 원래 서유럽에서 아르헨티나로 이민 온 부둣가 노동자들이 향수를 달래기 위해 서로 껴안고 추던 춤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탱고 음악은 춤을 돋보이게 하는 반주곡의 성격이 강했죠. 춤이 우선시 되다 보니 다양한 음악적 시도를 하기도 어려웠습니다.
피아졸라는 제약이 많은 탱고 음악을 그만두고 클래식으로 재능을 펼치고 싶어 했습니다. 루빈스타인으로부터 음악을 배우며 이런 생각은 더욱 강해졌죠.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탱고 밴드 활동은 이어갔지만, 두 음악 사이의 갈림길에서 한동안 방황을 거듭했습니다.
그러다 프랑스에서 만난 작곡가 나디아 블랑제는 피아졸라의 새로운 음악 인생을 여는 결정적인 조언들을 해 줬습니다. 피아졸라가 쓴 악보들을 본 블랑제는 이렇게 말합니다. "잘 썼어. 그런데 여긴 스트라빈스키, 여긴 라벨이군. 피아졸라는 어딨지?"
탱고 음악에서 벗어나 멋진 클래식 음악을 만들 생각만 하다 보니, 자신만의 특색을 찾지 못하고 흉내 내기에 급급했던 겁니다. 오히려 블랑제는 피아졸라가 반도네온으로 연주한 탱고 음악을 들은 후 눈을 반짝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탱고를 절대 그만두지 말라고 합니다.
피아졸라는 그의 조언에 따라 탱고 음악을 하면서도,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 가기로 합니다. 대중적인 탱고 음악에 클래식의 뛰어난 예술성을 가미한 것이죠. 그의 곡들이 친근하면서도, 한 차원 높은 음악적 미학을 갖추고 있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그는 탱고 음악의 진화 과정을 직접 '탱고의 역사'라는 곡에 담아내기도 했습니다. 환락가에 울려 퍼졌던 탱고 음악을 다룬 1악장에서부터 탱고와 현대음악을 결합시킨 4악장에 이르기까지 한 곡 안에 그 변천사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집니다. 탱고 음악이 남미에 그치지 않고 전 세계로 확산되고, 나아가 오랜 시간 사랑받게 된 것은 이같은 피아졸라의 영향이 큽니다.
영화 '여인의 향기'의 주인공 프랭크(알 파치노)는 이런 말을 합니다. "탱고엔 실수가 없어요. 실수를 하고 스텝이 엉켜도, 그게 바로 탱고에요." 실제 탱고엔 실수가 없습니다. 실수가 곧 새로운 동작이 됩니다.
피아졸라의 음악 인생도 이런 탱고 특성과 쏙 빼닮은 것 같습니다. 탱고 음악의 거장이 오히려 그로부터 도망가고 싶어 방황했단 사실, 그러나 이 또한 새로운 탱고 음악을 만드는 또 다른 스텝이 됐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그의 뜨거운 탱고 음악과 춤에 흠뻑 취하고 싶어집니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