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희 서원대 교수
김병희 서원대 교수
“듣는 사람들이 한 번도 웃지 않는다면 제 스피치가 실패했다고 생각해요. 십분 동안 말하든 일분 동안 말하든, 아무튼 재미나 유머 코드가 있어야 해요.”

친하게 지내는 한 미국인은 필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말하는 동안 어떻게든 웃음을 유발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

완전 공감할 수밖에. 세계적인 저명인사의 연설 장면을 보면 늘 재미있게 말하려고 노력한다. 그에 비해 우리나라 명사들의 연설은 너무 근엄한 편이다.

광고와 마케팅 현장에서도 재미있는 소비가 새로운 소비 코드로 부상했다. 제품 간에 기능적 차별화가 어려워지고 소비 의사결정에 대한 이성적 기준도 약화되자, 소비자들은 소비 활동에서도 재미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재미(Fun) 소비라는 용어가 등장한 배경이다.

듀렉스(Durex)의 콘돔 광고 ‘007’ 편(2004)을 보면 일단 재미있다. “007”이란 헤드라인에서 곧바로 영화 007 시리즈가 연상된다.

콘돔 회사답게 007에서 공(0) 두 숫자를 콘돔으로 표현했다. 바로 밑에 “로저 모어(Roger more)”라고 쓴 카피 한 줄에서 본격적인 반전이 일어난다. 007의 주연배우인 로저 무어가 저절로 연상될 수밖에.

잉글랜드의 영화배우 로저 무어(Roger Moore, 1927-2017)는 우리에게 친숙한 배우다. 그는 1973년의 007 8탄 《죽느냐 사느냐》(Live and Let Die)에서부터 1985년의 007 14탄 《뷰 투 어 킬》(A View to a Kill)에 이르기 까지, 무려 7개의 007 시리즈에서 제임스 본드 역을 맡았다. 007 시리즈에 가장 오랫동안 출연한 배우인 그는 이 영화를 통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카피는 분명히 “로저 모어(Roger more)”다. 하지만 사람들은 007 영화를 떠올리면서 로저 무어로 읽을 가능성이 높다. 배우 이름의 스펠링을 정확히 아는 사람도 많지는 않을 테니까.

재미있게도 영어의 로저(roger)는 사람 이름 외에도 여러 의미로 쓰인다. 군대의 명령이나 무선 통신에서는 알았다고 할 때 오케이라는 뜻에서 ‘로저’라고 말한다.

그리고 로저는 사랑을 나누는 ‘성교하다’라는 동사로도 쓰인다. 따라서 광고에서는 콘돔을 끼고 ‘더 한다(roger more)’는 뜻으로 쓰였다.

영국 정부는 로저 무어 경에 대한 모독으로 의심해 이 광고를 금지하기도 했다. 광고에서는 콘돔을 끼면 더 오래 할 수 있다는 메시지도 전달했지만, 007의 마지막 장면에서 임무를 완수한 로저 무어가 미녀와 잠자리하는 장면을 연상시킬 수도 있었다.

이런 연상 작용 때문에 영국 정부가 광고를 금지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광고는 2004년 ‘장미광고제(The Roses Advertising Awards)에서 최고의 타이포그래피 적용 부문에서 수상했다.
듀렉스 콘돔 광고 ‘007’ 편(2004)
듀렉스 콘돔 광고 ‘007’ 편(2004)
듀렉스의 콘돔 광고 ‘3’ 편(2021)을 보고 나서도 웃지 않는 사람은 아마도 꽤 무딘 사람일 것 같다.

이집트에서 집행된 이 광고에서는 우리의 상식을 뒤엎고 “1+1=3”이라고 주장했다. 청색 바탕에 흰색으로 수식을 크게 썼으니 더 두드러질 수밖에 없다.

무슨 뜻인가 싶어 수식의 아래쪽을 보니 이런 카피가 조그맣게 붙어있다. “만약 당신이 듀렉스 콘돔을 쓰지 않는다면(If you don’t use durex).”

사랑을 나눌 때 듀렉스 콘돔을 쓰지 않는다면 바로 임신하게 틸 테니 1+1은 2가 아닌 3이라는 뜻이다.

광고를 보고 있으면 빙그레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다. 광고에서 웃음을 유발한다면 공명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공명이 일어날 요인은 무엇인가? 카피와 비주얼이 함께 제시되고, 카피와 비주얼이 만나 재미를 유발해야 한다. 그리고 텍스트의 즐거움(pleasure of text)이라는 보상이 제공돼야 한다.

이 광고는 공명을 유발하는 세 가지 요인을 두루 갖췄다. 이처럼 제품의 특성을 단조롭게 전달하지 않고 재미있게 전달하는 광고를 펀 광고라고 한다.
듀렉스 콘돔 광고 ‘3’ 편(2021)
듀렉스 콘돔 광고 ‘3’ 편(2021)
두 광고에서 채굴한 경영의 스티커 메시지는 재미(Fun)다. 재미있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터.

광고와 마케팅 활동에서도 소비자의 재미를 자극하는 ‘펀 마케팅’ 기법이 인기다. 소비자의 관심을 끌어 모아 기업 이미지를 제고하는데 펀 마케팅이 도움이 된다.

기업이 애써 홍보 활동을 하지 않아도 소셜 미디어에서 펀 마케팅 메시지가 확산되면 효과를 배가할 수 있다. 여러 기업의 마케팅 활동에 재미가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미국의 제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은 깡마르고 볼품없는 외모 때문에 수모를 당한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원숭이를 닮았다는 지적도 자주 받았다.

“당신은 두 얼굴을 가진 이중인격자야!” 선거 유세 때 상대 후보가 외모를 공격하자 링컨은 이렇게 응수했다고 한다.

“내가 정말로 두 얼굴을 가졌다면 이 중요한 자리에 왜 하필 못생긴 얼굴을 가지고 나왔겠습니까?” 링컨은 이 유머 덕분에 그곳에 있는 많은 사람을 자기편으로 만들 수 있었다.

재미는 경영자의 말이나 글에서도 반드시 필요한 요소다. 최고 경영자의 연설이 지루하게 들리는 것은 판에 박힌 교훈적인 말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이때 연설 주제와 관련되는 재미있는 일화나 유머 코드를 하나씩만 넣어도 연설의 품격이 달라지지 않을까 싶다. 재미있게 말하는 화술과 유머 감각은 리더십에 가치를 더해준다.

재미있는 콘돔 광고가 저절로 흥미를 유발하듯이, 경영자들도 좀 더 재미있게 말하려고 노력한다면 저절로 환호를 받게 될 것이다. 언제나 무게만 잡는 근엄한 사람 곁에 어느 누가 오래 붙어있고 싶겠는가.

개그맨도 처음부터 개그맨은 아니었다. 후천적인 노력으로도 재미 본능을 얼마든지 키워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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