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진수 한국신용평가 평가기준실장 / Jinsoo.Yang@kisrating.com
당사의 사례가 특이한 건 아닐까 싶어 다른 신용평가사의 부도율도 엿봤다. 금융감독원 공시자료로 추정컨대, 한국기업평가와 나이스신용평가의 부도율도 1%에 못 미쳤다. 회사채 시장이 주로 대기업 위주로 구성돼 있어 그런 게 아닐까. 대기업은 호황인데 중소기업은 어려운, 이른바 비대칭 회복(K-shaped recovery)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소규모 기업도 많이 이용하는 어음의 부도 상황을 찾아봤다. 어음의 씀씀이가 달라져 과거 수치와 직접 비교하기 어렵지만, 2020년 어음 부도 건수는 292건에 그쳤다. 전년의 414건보다 오히려 줄었다. 역대급 태풍이 지나갔는데 길거리에 잔해가 거의 없는 셈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사실 코로나19는 현재 진행형이다. 최근 실물 및 금융시장 회복세를 보면 아직 위기 속에 있다는 사실이 머쓱할 정도지만, 우리는 아직 코로나19라는 어둡고 긴 터널에서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1년도 채 지나지 않은 위기 상황을 평가하는 게 다소 성급할 수 있지만, 조심스럽게 낮은 부도율의 배경 요인을 다음과 같이 추정해본다.
우선 정부와 중앙은행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금융시장이 크게 출렁이지 않았다. 코로나 사태가 터진 후 금융시장이 잠시 위축되기도 했지만 △기준금리 인하 △환매조건부채권(RP) 매입 △회사채 신속인수 △대출 만기 연장 등 전방위적인 금융정책에 힘입어 금방 안정을 되찾았다. 기준금리는 역대 최저인 연 0.5%로 인하됐고, 위기 때마다 출렁였던 신용 스프레드(금리 격차)는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됐다. 보통 경기침체기에는 신용 경색 등으로 유동성 위기를 겪는 기업이 늘어난다. 사업이 견실한데도 부도에 이르는 기업이 많아진다. 이를 고려하면 금융시장 안정이 부도율을 낮추는데 적지 않은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본다.
자본시장의 성장도 한 요인이다. 외환위기나 글로벌 금융위기 때를 보면, 계열사 간 지급보증이나 우발채무가 부도의 주요 원인이었다. 즉, 옛날엔 일반 기업이 금융부문 역할까지 떠맡았다. 그러다 한두 개 계열사나 사업장 부실화하면, 부실이 확산해 연쇄 부도로 이어졌다. 지금은 이런 리스크가 상당 부분 금융부문으로 이관됐다. 금융부문이 주도적으로 위험자본을 공급해 리스크를 분산·흡수한 가운데, 누적 이익과 유상증자 등으로 자본을 확충하면서 충격에 대한 완충 역할을 했다.
기업 자체의 부도 위험이 낮아진 영향도 있다. 부도 위험은 크게 ‘사업 위험’과 ‘재무 위험’으로 구성된다. 사업 위험은 숫자로 표현하기 어려운 정성적인 평가 변수다. 과거와 쉽게 비교하기 어렵다. 그래도 매출액 등 규모변수를 보면 국내 기업의 경쟁력이 옛날보다 크게 높아졌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재무 위험은 비율 변수를 통해 상당 부분 유추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부채비율과 차입금의존도가 있다. 이 지표는 외환위기 때 각각 300%와 50%를 웃돌았다. 2019년에는 각각 100%와 25% 미만으로 크게 낮아졌다. 그만큼 위기 시 버틸 수 있는 기초체력이 강건해진 것이다.
코로나19로 인한 타격이 신용도 높은 업종에 집중됐던 점은 큰 행운이었다. 호텔, 영화, 유통 등 직격탄을 맞은 업종의 2020년 초 신용등급은 대체로 A급과 AA급에 분포했다. 위기를 견딜 재무 여력이 상대적으로 높은 기업들이었다. 다른 피해 업종인 항공 산업은 상대적으로 신용도가 낮았다. 그렇지만 소규모 개방경제 특성상 기간산업을 포기할 수 없었던 정부의 적극적인 구조조정 노력을 통해 최악의 상황을 벗어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정부가 적극적인 재정정책을 펼쳐 위축된 민간의 역할을 대신했던 점이 주효했다. 2020년 본예산 기준 정부의 통합재정 규모는 국내총생산(GDP)의 25%를 웃돌았다. 여기에 네 차례의 추경으로 약 67조원의 예산을 추가 편성했다. 2020년 경제성장률을 분해해 보면, 정부가 1.0%포인트 기여한 가운데 민간은 2.0%포인트 끌어내렸다. 대규모 예산을 바탕으로 정부가 민간의 역할을 대신하면서 경제가 회복할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이런 정부의 역할은 의지만으로는 불가능하다. 무디스나 S&P 등 국제 신용평가사로부터 AA급의 신용도를 부여받을 만큼 뛰어난 재정 건전성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했다.
결국 우리 기업의 기초체력이 좋아진 가운데 정부의 효과적인 정책 대응과 자본시장의 성장이 이번 위기를 견딜 수 있는 버팀목이 됐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코로나19 위기는 과연 이렇게 흔적 없이 마무리될 것인가. 혹시 정부의 재정정책 등으로 잠시 물 밑에 가라앉아 있을 뿐 멀지 않은 장래에 잠재된 부도가 수면 위로 드러나는 것은 아닐까.
만약 정부가 직접적인 소득 이전이나 차입금의 만기 연장 등을 통해 ‘단순히’ 시간을 번 것이라면 결국 부도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최근 해외에서는 좀비기업, 즉 경쟁력이 없어 진작 퇴출됐어야 하지만 정부 지원으로 연명하는 기업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좀비기업은 효율적인 자원 배분을 방해하면서 경제 활력을 저해한다. 그러나 한국은 국가와 기업의 기초체력이 강건한 점, 경쟁력이 낮은 기업에 대한 지원보다는 일시적 유동성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지원에 방점이 놓인 점 등을 고려할 때, 옛날처럼 높은 부도율을 보거나 좀비기업으로 인한 폐해를 크게 겪지는 않을 것으로 전망한다.
한편 자본시장으로 집중된 리스크를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로 금융회사들의 자본이 늘어난 가운데 위기를 맞았다는 천운(天運)도 무시할 수 없다. 특히 증권사들이 경쟁적으로 자본을 확충한 직후였던 데다 동학개미운동으로 위탁매매 수익이 많이 늘어나 코로나 위기로 촉발된 해외 대체투자 등에서의 손실을 벌충할 수 있었던 점은 곱씹어볼 대목이다. 만약 코로나19가 조금 더 늦게 나타났다면 금융사들이 충격 완충 역할을 하기보다 오히려 전체 시스템의 위기를 증폭시켰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결과적으로 위기를 넘기지 않았냐며 안심만 할 일은 아니다. 금융기관에 리스크가 집중되었던 것이 전 세계적인 금융위기의 빌미가 된 미국의 사례를 반면교사로 삼아 앞으로 우리 자본시장의 리스크를 효과적으로 관리할 묘안은 무엇인지 고민해야 할 것이다.
신용평가사라는 직업 특성상 보수적인 시각에 익숙하다. 매사 아무리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려 해도 스멀스멀 올라오는 ‘혹시나’하는 걱정을 피할 길이 없다. 일종의 직업병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신용평가의 기본적인 검증 과정이다. 그래도 이번만큼은 우려가 그저 우려로만 지나가기를 바란다. 코로나19라는 위기가 오히려 우리 가계와 기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계기가 되기를 기원해본다.
<본 칼럼의 내용은 한국신용평가의 공식 의견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