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미경 칼럼] 자성(自省)하며 나아가는 삶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한경닷컴 더 라이피스트
누군가는 세월이 자기 나이만큼의 속도로 간단다. 더 젊었을 때는 이해 못 한 말이 지금은 참으로 그런가 싶다. 뭐 그냥 그렇게 살아도 될 것이었다. 남들이 사는 것처럼 나 또한 별것 없는 삶이니 그렇게 남들처럼 살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나는 어쩌면 별것 없는 삶에 물음을 던졌다. 아니 던져졌다. 왜? 왜? 왜? 나이 60을 바라보는 지금 시점에서 나는 내 삶에 대해 왜? 라는 질문과 함께 멈췄다. 정지다. 더 나아가지 않았다. 답을 얻지 않고서는 한 발짝도 더 나아가고 싶지 않았다. 아니 나아가져지지 않았다. 그래서 멈췄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지금 이런 모습으로 여기 있는가? 나는 무엇이기에 그렇게 살았고 또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가? 나의 의지인 것 같지만 나의 의지가 아닌 그 어떤 실체에 의해 사는 것 같은 나, 나라고 생각했지만 때로는 내가 아닌 나, 돌이켜보면 때로는 숨 막히고, 가슴 아프고, 힘겨웠던 삶에서 지금도 그다지 변함없는 것 같은 내 삶의 실체가 궁금했다.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고 생각했으나 여전히 무엇인가에 붙잡혀있는 나, 내 의지와 상관없이 못난 모습에 휘둘리고 있는 나, 나는 누구이며 왜 지금 여기 이렇게 있는가?
긴 날을 기도했다. 알려달라고, 알고 싶다고 눈물을 흘리며 호소하고 애원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무엇엔가에 떠밀리듯 짐을 쌌다. 목적지도 없이 무작정 집을 나섰다. 일생에 처음이다. 생각나는 한 사람을 만나 맥락 없는 말을 던졌고 그 또한 무작정 길을 안내했다. 무엇이 두렵냐며 무조건 해 보란다. 5시간을 내 달렸다. 그곳이 어디며 어떤 곳인지, 어떤 사람이 있고 또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모를 길을 달렸다. 그냥 무엇인가에 이끌리듯 멈추지 않고 주저하지 않고 누군가가 부르듯이 그렇게 쉼 없이 달렸다. 그곳에 내 물음에 답이 있을 거라는 기대도 할 수 없었고, 그곳에서 내가 머물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길을 나선 것이다. 모든 길이 낯설고 어려웠다. 두렵고 주저되는 길 위에 겁도 없이 선 것이다. 5시간을, 음악도 그 어떤 소리도 듣지 않았고 들을 생각조차 없이 오직 한 가지 생각만으로 달렸다.
‘도대체 무슨 인연이기에 이리도 먼 곳으로 나를 이끄는가?
과연 내가 듣고자 하는 답을 얻을 수 있을까?’
전남 나주시 봉황면 덕곡리 342번지 ‘성덕사’ 주지 지훈스님
참 먼 길이었다. 서울에서 꼬박 달려 5시간이다. 좀 가까이 계셨다면 했지만 그리 먼 거리를 달려야 했던 이유도 분명 있었다. 간절함! 아마도 그것이었을 것이다.
세상에는 많은 말들이 있다. 이미 우리가 들었고 또 듣고 있는 수많은 이론과 논리들, 덕담과 속담들, 교훈과 가르침들이 있다. 그런데 나는 그 먼 길을 달려와 늘 들었고 나도 자주 했던 그 말을 또 들었다. 새로운 말도 아니고 처음 듣는 말도 아닌 그 말에 나는 놀랐다. 가슴을 울렸고 머리를 때렸다. 깨우침이다.
왜? 왜 지금에서야? 그동안 들었던 같은 말에서는 깨닫지 못하고 지금 이제야 깨닫는 걸까?
이 깨달음은 이성적인 깨달음이 아닌 영혼의 깨달음 같은 걸까? 인간에게는 영과 육이 있듯이 영의 깨달음과 육의 깨달음은 다르게 작용하는 걸까? 인간관계에서도 인연이 있듯이 깨달음에도 인연의 때가 있는 것일까? 놀라운 경험이었다. 간절함으로 달려갔고 3일 만에 얻은 답이다. 3일 밤낮을 울었다. 전생의 나와의 인연이 현생에 나와 다시 인연이 되어 살아가는 이 삶의 굴레에서 경험되어지는 수많은 일이 모두 ‘나로 인한 것’이었음을, 과거에는 듣고도 그냥 흘려버린 이야기가 지금 나에게는 왜 이리도 뼈아프게 다가오는지, 이 또한 분명 인식의 인연의 때가 되었음일 것이다.
삶의 변화에서 가장 크게 작용하는 것은 가치관의 변화로 인한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나는 분명 이날의 경험으로 인해 가치관이 변했음을 실감한다. 그날의 ‘5시간’을 기점으로 나의 가치관의 전과 후가 나뉜다.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 사회현상을 보는 관점이 달라졌다. 가족들이 달라진 나를 보며 놀라워한다. 나 자신도 스스로 달라진 나를 보며 놀랍다. 고마운 일이다. 사람으로 산다는 것 그것은 분명 놀라운 일이다. 오늘과 다른 내일을 산다는 것은 ‘나’를 새롭게 만나야만 가능한 일이다. 생각으로만 다른 나를 살기에는 많은 어려움과 불편함이 있다. 많은 경우가 자기기만이거나 속임에 자신이 속는 ‘자기최면’ 상태에 살게 된다. 가치관의 변화만이 완전히 달라진 ‘나’를 살 수 있다. 그것이 무엇으로 기인하는가는 사람마다 다르다. 그 과정이 어떠하든 그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지금보다 나은 ‘나’를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로 ‘나’다. 타인이 보는 ‘나’는 내가 보이고 싶은 것만 볼 수 있다. 타인이 아는 ‘나’는 나의 노력과 학습으로 만들어진 ‘나’다. 하지만 내가 아는 ‘나’는 은밀한 곳에 숨겨놓은 비밀스러운 무엇이기에 때로는 나도 ‘나’를 잘 모른다. ‘무의식’이다. 은밀한 곳에 숨겨진 ‘나’를 발견하고 그것을 제대로 ‘인식’하고 ‘수용’하는 것은 내가 원하는 ‘나’를 만들어가는 중요한 과정이다. 그것을 통해서만 참된 ‘나’를 만날 수 있다.
‘나’는 누구인가?
질문은 궁금증을 만들고 궁금증은 고민을, 고민은 고통을 동반한 괴로움을 만들었다. 내가 만난 ‘나’는 참으로 어리석은 중생이었다. 안다고 생각한 그 인식 자체가 잘못된 것이었음을, ‘알지 못한다’라고 생각한 그 생각조차도 잘못된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인간의 인식 너머에 있는 존재다. 인식 너머 존재인 ‘나’, 그런 ‘나’를 인정하고 수용하며 사는 삶은 언제나 조심스럽고 또 조심스러워야 했다. 왜냐하면 누구도 자신을 일컬어 이것이 ‘나’다 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자기도 자기를 모르기 때문이다. 안다고 말하는 ‘자기’는 참된 ‘자기’가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루하루를 반성하며 살 이유가 있다. 그릇된 눈으로, 잘못된 귀로, 어리석은 입으로, 불편한 몸짓을 하며 살지는 않았는지 살펴봐야 한다. ‘나’나 ‘너’나 할 것 없이 우리는 모두가 이생을 잘 살고 가야 할 중생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위로하고 응원하고 격려하는 마음으로 함께 더불어 손잡고 살고 갈 삶인 것이다. 누가 누구를 원망할 이유도 없고, 핀잔하거나 욕할 이유도 없다. 비방하고 저주하고 분노할 일도 없다. 모두가 자신의 죄 값을 사는 과정에 있기 때문이다. 다만 함께 가슴 아파할 일이다. 하루속히 모든 죄를 용서받고 평안해지기를 기도할 따름이다. 나무대비관세음
<한경닷컴 The Lifeist> 오미경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독자 문의 : thepen@hankyung.com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지금 이런 모습으로 여기 있는가? 나는 무엇이기에 그렇게 살았고 또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가? 나의 의지인 것 같지만 나의 의지가 아닌 그 어떤 실체에 의해 사는 것 같은 나, 나라고 생각했지만 때로는 내가 아닌 나, 돌이켜보면 때로는 숨 막히고, 가슴 아프고, 힘겨웠던 삶에서 지금도 그다지 변함없는 것 같은 내 삶의 실체가 궁금했다.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고 생각했으나 여전히 무엇인가에 붙잡혀있는 나, 내 의지와 상관없이 못난 모습에 휘둘리고 있는 나, 나는 누구이며 왜 지금 여기 이렇게 있는가?
긴 날을 기도했다. 알려달라고, 알고 싶다고 눈물을 흘리며 호소하고 애원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무엇엔가에 떠밀리듯 짐을 쌌다. 목적지도 없이 무작정 집을 나섰다. 일생에 처음이다. 생각나는 한 사람을 만나 맥락 없는 말을 던졌고 그 또한 무작정 길을 안내했다. 무엇이 두렵냐며 무조건 해 보란다. 5시간을 내 달렸다. 그곳이 어디며 어떤 곳인지, 어떤 사람이 있고 또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모를 길을 달렸다. 그냥 무엇인가에 이끌리듯 멈추지 않고 주저하지 않고 누군가가 부르듯이 그렇게 쉼 없이 달렸다. 그곳에 내 물음에 답이 있을 거라는 기대도 할 수 없었고, 그곳에서 내가 머물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길을 나선 것이다. 모든 길이 낯설고 어려웠다. 두렵고 주저되는 길 위에 겁도 없이 선 것이다. 5시간을, 음악도 그 어떤 소리도 듣지 않았고 들을 생각조차 없이 오직 한 가지 생각만으로 달렸다.
‘도대체 무슨 인연이기에 이리도 먼 곳으로 나를 이끄는가?
과연 내가 듣고자 하는 답을 얻을 수 있을까?’
전남 나주시 봉황면 덕곡리 342번지 ‘성덕사’ 주지 지훈스님
참 먼 길이었다. 서울에서 꼬박 달려 5시간이다. 좀 가까이 계셨다면 했지만 그리 먼 거리를 달려야 했던 이유도 분명 있었다. 간절함! 아마도 그것이었을 것이다.
세상에는 많은 말들이 있다. 이미 우리가 들었고 또 듣고 있는 수많은 이론과 논리들, 덕담과 속담들, 교훈과 가르침들이 있다. 그런데 나는 그 먼 길을 달려와 늘 들었고 나도 자주 했던 그 말을 또 들었다. 새로운 말도 아니고 처음 듣는 말도 아닌 그 말에 나는 놀랐다. 가슴을 울렸고 머리를 때렸다. 깨우침이다.
왜? 왜 지금에서야? 그동안 들었던 같은 말에서는 깨닫지 못하고 지금 이제야 깨닫는 걸까?
이 깨달음은 이성적인 깨달음이 아닌 영혼의 깨달음 같은 걸까? 인간에게는 영과 육이 있듯이 영의 깨달음과 육의 깨달음은 다르게 작용하는 걸까? 인간관계에서도 인연이 있듯이 깨달음에도 인연의 때가 있는 것일까? 놀라운 경험이었다. 간절함으로 달려갔고 3일 만에 얻은 답이다. 3일 밤낮을 울었다. 전생의 나와의 인연이 현생에 나와 다시 인연이 되어 살아가는 이 삶의 굴레에서 경험되어지는 수많은 일이 모두 ‘나로 인한 것’이었음을, 과거에는 듣고도 그냥 흘려버린 이야기가 지금 나에게는 왜 이리도 뼈아프게 다가오는지, 이 또한 분명 인식의 인연의 때가 되었음일 것이다.
삶의 변화에서 가장 크게 작용하는 것은 가치관의 변화로 인한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나는 분명 이날의 경험으로 인해 가치관이 변했음을 실감한다. 그날의 ‘5시간’을 기점으로 나의 가치관의 전과 후가 나뉜다.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 사회현상을 보는 관점이 달라졌다. 가족들이 달라진 나를 보며 놀라워한다. 나 자신도 스스로 달라진 나를 보며 놀랍다. 고마운 일이다. 사람으로 산다는 것 그것은 분명 놀라운 일이다. 오늘과 다른 내일을 산다는 것은 ‘나’를 새롭게 만나야만 가능한 일이다. 생각으로만 다른 나를 살기에는 많은 어려움과 불편함이 있다. 많은 경우가 자기기만이거나 속임에 자신이 속는 ‘자기최면’ 상태에 살게 된다. 가치관의 변화만이 완전히 달라진 ‘나’를 살 수 있다. 그것이 무엇으로 기인하는가는 사람마다 다르다. 그 과정이 어떠하든 그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지금보다 나은 ‘나’를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로 ‘나’다. 타인이 보는 ‘나’는 내가 보이고 싶은 것만 볼 수 있다. 타인이 아는 ‘나’는 나의 노력과 학습으로 만들어진 ‘나’다. 하지만 내가 아는 ‘나’는 은밀한 곳에 숨겨놓은 비밀스러운 무엇이기에 때로는 나도 ‘나’를 잘 모른다. ‘무의식’이다. 은밀한 곳에 숨겨진 ‘나’를 발견하고 그것을 제대로 ‘인식’하고 ‘수용’하는 것은 내가 원하는 ‘나’를 만들어가는 중요한 과정이다. 그것을 통해서만 참된 ‘나’를 만날 수 있다.
‘나’는 누구인가?
질문은 궁금증을 만들고 궁금증은 고민을, 고민은 고통을 동반한 괴로움을 만들었다. 내가 만난 ‘나’는 참으로 어리석은 중생이었다. 안다고 생각한 그 인식 자체가 잘못된 것이었음을, ‘알지 못한다’라고 생각한 그 생각조차도 잘못된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인간의 인식 너머에 있는 존재다. 인식 너머 존재인 ‘나’, 그런 ‘나’를 인정하고 수용하며 사는 삶은 언제나 조심스럽고 또 조심스러워야 했다. 왜냐하면 누구도 자신을 일컬어 이것이 ‘나’다 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자기도 자기를 모르기 때문이다. 안다고 말하는 ‘자기’는 참된 ‘자기’가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루하루를 반성하며 살 이유가 있다. 그릇된 눈으로, 잘못된 귀로, 어리석은 입으로, 불편한 몸짓을 하며 살지는 않았는지 살펴봐야 한다. ‘나’나 ‘너’나 할 것 없이 우리는 모두가 이생을 잘 살고 가야 할 중생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위로하고 응원하고 격려하는 마음으로 함께 더불어 손잡고 살고 갈 삶인 것이다. 누가 누구를 원망할 이유도 없고, 핀잔하거나 욕할 이유도 없다. 비방하고 저주하고 분노할 일도 없다. 모두가 자신의 죄 값을 사는 과정에 있기 때문이다. 다만 함께 가슴 아파할 일이다. 하루속히 모든 죄를 용서받고 평안해지기를 기도할 따름이다. 나무대비관세음
<한경닷컴 The Lifeist> 오미경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독자 문의 : thep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