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엔 신사, 얼굴엔 사과···그림 그리는 철학자, 마그리트[김희경의 7과 3의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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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매트릭스', 가수 제리 할리웰의 노래 'It's Rainning Men', 애니메이션 '하울의 움직이는 성', 김영하 작가의 소설 <빛의 제국>···.
많은 분들이 즐기고 사랑한 작품들입니다. 이 작품들엔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모두 벨기에 출신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1898~1967)의 그림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매트릭스'와 'It's Rainning Men'은 마그리트의 '골콩드'란 그림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골콩드'는 하늘에서 비처럼 내리는 신사들로 유명한 작품입니다. '매트릭스' 두 번째 시리즈에서 주인공 네오가 검은 양복을 입고 선글라스를 쓴 악당들과 비를 맞으며 싸우는 장면은 이 그림에서 영감을 받은 것입니다. "하늘에서 남자들이 비처럼 내려와"라고 노래하는 'It's Rainning Men'도 마찬가지죠.
또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하늘 위에 커다랗게 떠 있는 바위 성을 그린 '피레네의 성'으로부터, <빛의 제국>은 낮과 밤이 한 화폭에 공존하는 마그리트의 동명의 작품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이뿐만 아닙니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장르를 불문하고 많은 예술가들이 마그리트의 그림에서 영감을 얻고 자신의 작품에 접목하고 있습니다. 그는 생전에도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창의적인 사고방식과 새로운 도전들로 화제를 몰고 다녔죠.
그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그림 그리는 철학자'로 불렸습니다. 스스로도 이를 즐겼습니다. "나를 화가라 부르지 말라. 나는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림은 내가 세상과 교류하는 하나의 방식일 뿐이다." 마그리트는 사고력과 상상력이 뛰어났습니다. 늘 책을 가까이했던 덕분입니다. 어릴 땐 추리 소설 등을 즐겨 봤고, 어른이 되어선 철학자들의 책을 좋아했죠.
독특한 경험들도 영향을 미쳤던 것 같습니다. 그는 유년 시절을 떠올릴 때면 특이한 몇 가지 기억들을 풀어놓곤 했습니다. 사람들이 탄 열기구가 자신의 집에 불시착했던 것, 요람 근처에 거대한 나무 상자가 이상한 형태로 서 있었다는 것 등입니다. 아마도 현실과 상상이 뒤섞인 기억들이 아니었을까 싶네요.
그가 그림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어릴 때 종종 놀러 갔던 공동묘지에서 그림을 그리는 화가를 봤기 때문입니다. 그가 마술사처럼 화폭에 멋진 세상을 구현하는 것을 본 마그리트는 그림에 눈 뜨게 됩니다. 아버지가 양복 재단사, 어머니가 모자 상인이었던 덕분에 미적 감각도 타고났었죠.
안타깝게도 충격적인 일도 겪었습니다. 그가 14살이 되던 해, 어머니가 강에 뛰어들어 자살한 겁니다. 어머니가 발견됐을 당시의 모습은 깊이 각인돼 오랫동안 그를 괴롭혔습니다.
이후 그는 아버지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브뤼셀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했습니다. 이곳에서 인상파·입체파 등 다양한 양식의 회화를 배웠죠. 이를 바탕으로 포스터나 광고 디자인 등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이탈리아 화가 조르조 데 키리코의 '사랑의 노래'를 본 이후였습니다. 마그리트는 이 작품을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림 속 조각상과 빨간 장갑, 녹색 공에선 어떤 이유도 규칙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사랑의 노래'라는 제목과도 연결이 잘 되지 않습니다. 현실인 듯 현실이 아닌 듯한 그림. 마그리트는 여기서 새로운 아이디어들을 얻어 초현실주의 화가의 길을 가게 됩니다.
마그리트는 '데페이즈망' 기법을 통해 자신만의 초현실주의 작품들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데페이즈망은 '추방'을 의미합니다. 뭘 추방한다는 걸까요. 일상에 있던 사물들을 뚝 떼어내 엉뚱한 자리나 맥락에 배치하거나, 그 자리에 전혀 상관없는 사물을 가져다 놓는 겁니다. '인간의 아들'이란 작품을 한번 보실까요. 신사의 얼굴에 눈 코 입 대신 초록 사과가 있습니다. 그 자리에 있어야 할 것들을 없애고 새로운 것으로 대체함으로써 생소한 느낌을 주죠. 일종의 '낯설게 하기'입니다.
총 27점에 달하는 '빛의 제국' 연작도 낯설게 하기에 해당합니다. 언뜻 봐선 평범한 풍경처럼 보이지만, 하늘은 낮처럼 밝고 땅 위엔 어둠이 내려앉았습니다. 공존할 수 없는 것이 하나의 시공간에 공존하고 있는 것이죠.
그런 마그리트의 작품들을 보다 보면 '대체 무슨 의미일까' 궁금해집니다. 그런데 그는 '의미'에 의미를 두지 말라고 강조합니다. "내 작품에서 의미를 찾지 말라. 그림에서 원하는 것을 찾으려고 한다면, 당신은 당신이 좋아하는 것 이상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나아가 그는 우리가 갖고 있는 고정관념마저 깨부숩니다. '이미지의 반역'이란 작품은 그런 점에서 많은 화제가 됐습니다. 작품엔 파이프가 하나 그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아래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파이프를 그려놓고 파이프가 아니라니, 무슨 얘기일까요.
우리는 그 사물을 '파이프'라고 부르기로 사회적 약속을 했을 뿐입니다. 이는 단지 그 대상을 지칭하기 위한 것이며 사물의 본질을 내포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 파이프와 파이프라는 단어 사이엔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것이죠.
누구보다 독창적인 사고방식을 가졌던 마그리트. 그를 중심으로 초현실주의는 빠르게 확산됐는데요. 일부 초현실주의 작가들은 사생활로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작품처럼 특이하게, 때론 기이하게 행동했던 것이죠.
그런데 마그리트는 달랐습니다. 오히려 정말 평범하면서도 소박한 삶을 살아 더 주목받았습니다. 미국 유럽 등 다양한 곳에서 꾸준히 전시를 하며 이름을 알렸고, 어린 시절 소꿉친구였던 조제트 베르제와 결혼해 행복한 가정생활을 이어갔습니다.
그럼에도 훗날 많은 사람들과 예술가들이 마그리트와 그의 작품들을 기억하고 열광하는 것은, 일상의 일탈보다 더 폭발적인 힘을 가졌던 '내면의 일탈' 덕분이 아니었을까요. "내게 있어서 세상은 상식에 대한 도전장이다. 규칙은 없다. 순서도 없다. 선악도 없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
많은 분들이 즐기고 사랑한 작품들입니다. 이 작품들엔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모두 벨기에 출신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1898~1967)의 그림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매트릭스'와 'It's Rainning Men'은 마그리트의 '골콩드'란 그림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골콩드'는 하늘에서 비처럼 내리는 신사들로 유명한 작품입니다. '매트릭스' 두 번째 시리즈에서 주인공 네오가 검은 양복을 입고 선글라스를 쓴 악당들과 비를 맞으며 싸우는 장면은 이 그림에서 영감을 받은 것입니다. "하늘에서 남자들이 비처럼 내려와"라고 노래하는 'It's Rainning Men'도 마찬가지죠.
또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하늘 위에 커다랗게 떠 있는 바위 성을 그린 '피레네의 성'으로부터, <빛의 제국>은 낮과 밤이 한 화폭에 공존하는 마그리트의 동명의 작품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이뿐만 아닙니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장르를 불문하고 많은 예술가들이 마그리트의 그림에서 영감을 얻고 자신의 작품에 접목하고 있습니다. 그는 생전에도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창의적인 사고방식과 새로운 도전들로 화제를 몰고 다녔죠.
그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그림 그리는 철학자'로 불렸습니다. 스스로도 이를 즐겼습니다. "나를 화가라 부르지 말라. 나는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림은 내가 세상과 교류하는 하나의 방식일 뿐이다." 마그리트는 사고력과 상상력이 뛰어났습니다. 늘 책을 가까이했던 덕분입니다. 어릴 땐 추리 소설 등을 즐겨 봤고, 어른이 되어선 철학자들의 책을 좋아했죠.
독특한 경험들도 영향을 미쳤던 것 같습니다. 그는 유년 시절을 떠올릴 때면 특이한 몇 가지 기억들을 풀어놓곤 했습니다. 사람들이 탄 열기구가 자신의 집에 불시착했던 것, 요람 근처에 거대한 나무 상자가 이상한 형태로 서 있었다는 것 등입니다. 아마도 현실과 상상이 뒤섞인 기억들이 아니었을까 싶네요.
그가 그림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어릴 때 종종 놀러 갔던 공동묘지에서 그림을 그리는 화가를 봤기 때문입니다. 그가 마술사처럼 화폭에 멋진 세상을 구현하는 것을 본 마그리트는 그림에 눈 뜨게 됩니다. 아버지가 양복 재단사, 어머니가 모자 상인이었던 덕분에 미적 감각도 타고났었죠.
안타깝게도 충격적인 일도 겪었습니다. 그가 14살이 되던 해, 어머니가 강에 뛰어들어 자살한 겁니다. 어머니가 발견됐을 당시의 모습은 깊이 각인돼 오랫동안 그를 괴롭혔습니다.
이후 그는 아버지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브뤼셀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했습니다. 이곳에서 인상파·입체파 등 다양한 양식의 회화를 배웠죠. 이를 바탕으로 포스터나 광고 디자인 등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이탈리아 화가 조르조 데 키리코의 '사랑의 노래'를 본 이후였습니다. 마그리트는 이 작품을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림 속 조각상과 빨간 장갑, 녹색 공에선 어떤 이유도 규칙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사랑의 노래'라는 제목과도 연결이 잘 되지 않습니다. 현실인 듯 현실이 아닌 듯한 그림. 마그리트는 여기서 새로운 아이디어들을 얻어 초현실주의 화가의 길을 가게 됩니다.
마그리트는 '데페이즈망' 기법을 통해 자신만의 초현실주의 작품들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데페이즈망은 '추방'을 의미합니다. 뭘 추방한다는 걸까요. 일상에 있던 사물들을 뚝 떼어내 엉뚱한 자리나 맥락에 배치하거나, 그 자리에 전혀 상관없는 사물을 가져다 놓는 겁니다. '인간의 아들'이란 작품을 한번 보실까요. 신사의 얼굴에 눈 코 입 대신 초록 사과가 있습니다. 그 자리에 있어야 할 것들을 없애고 새로운 것으로 대체함으로써 생소한 느낌을 주죠. 일종의 '낯설게 하기'입니다.
총 27점에 달하는 '빛의 제국' 연작도 낯설게 하기에 해당합니다. 언뜻 봐선 평범한 풍경처럼 보이지만, 하늘은 낮처럼 밝고 땅 위엔 어둠이 내려앉았습니다. 공존할 수 없는 것이 하나의 시공간에 공존하고 있는 것이죠.
그런 마그리트의 작품들을 보다 보면 '대체 무슨 의미일까' 궁금해집니다. 그런데 그는 '의미'에 의미를 두지 말라고 강조합니다. "내 작품에서 의미를 찾지 말라. 그림에서 원하는 것을 찾으려고 한다면, 당신은 당신이 좋아하는 것 이상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나아가 그는 우리가 갖고 있는 고정관념마저 깨부숩니다. '이미지의 반역'이란 작품은 그런 점에서 많은 화제가 됐습니다. 작품엔 파이프가 하나 그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아래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파이프를 그려놓고 파이프가 아니라니, 무슨 얘기일까요.
우리는 그 사물을 '파이프'라고 부르기로 사회적 약속을 했을 뿐입니다. 이는 단지 그 대상을 지칭하기 위한 것이며 사물의 본질을 내포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 파이프와 파이프라는 단어 사이엔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것이죠.
누구보다 독창적인 사고방식을 가졌던 마그리트. 그를 중심으로 초현실주의는 빠르게 확산됐는데요. 일부 초현실주의 작가들은 사생활로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작품처럼 특이하게, 때론 기이하게 행동했던 것이죠.
그런데 마그리트는 달랐습니다. 오히려 정말 평범하면서도 소박한 삶을 살아 더 주목받았습니다. 미국 유럽 등 다양한 곳에서 꾸준히 전시를 하며 이름을 알렸고, 어린 시절 소꿉친구였던 조제트 베르제와 결혼해 행복한 가정생활을 이어갔습니다.
그럼에도 훗날 많은 사람들과 예술가들이 마그리트와 그의 작품들을 기억하고 열광하는 것은, 일상의 일탈보다 더 폭발적인 힘을 가졌던 '내면의 일탈' 덕분이 아니었을까요. "내게 있어서 세상은 상식에 대한 도전장이다. 규칙은 없다. 순서도 없다. 선악도 없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