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3월 발생한 팬데믹(전염병의 세계적 대유행)을 계기로 수십 년간 이어져온 미국 내 ‘저(低)인플레이션’이 막을 내렸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미 노동부가 13일(현지시간) 발표한 6월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5.4% 오르며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13년 만에 가장 큰 상승폭을 기록했다. 최근의 물가 급등세는 일시적 현상에 그치지 않고 상당 기간 지속할 수 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보도했다.

20년 동안 누적 인플레 18% 그쳐

세계은행에 따르면 미 경제는 1980년대 초반부터 40년 가까이 3%(전년 대비) 안팎의 낮은 인플레이션을 보여왔다. 저물가 배경으로는 세계화와 근로 인구 증가, 전자상거래 활성화 등이 꼽힌다. 미국의 무역 총액은 1970년만 해도 국내총생산(GDP) 대비 11%에 불과했지만 2011년 31%로 급증했다. 무역 장벽이 속속 허물어지면서 미국 내 소비자가 해외에서 들여온 저렴한 상품을 쓸 수 있게 됐다는 의미다.
"美 40년 이어진 저물가 시대 끝났다"
1980년대 이후 중국이 글로벌 시장 경제로 편입되면서 값싼 노동력이 크게 늘어난 것도 물가를 낮추는 동력으로 작용했다. 변동성이 큰 에너지 및 식품을 제외한 미 근원 인플레이션이 1990년 이후 20년 동안 18% 오르는 데 그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반면 상품이 아닌 서비스 물가는 같은 기간 147% 급등했다. 미국에서 각종 서비스까지 수입하긴 어려웠기 때문이다. 투자은행 바클레이즈의 블러리나 우루치 수석이코노미스트는 “미국이 오랫동안 무역 상대국에서 디플레이션을 수입해온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설명했다.

전자상거래 발달도 가격 인하 경쟁을 유도한 일등공신으로 지목된다. 이른바 ‘아마존 효과’다. 2017년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는 아마존이 촉발한 온라인 가격 경쟁이 근원 물가상승률을 매년 최대 0.1%포인트 끌어내렸을 것으로 추정했다.

“50년 전처럼 고물가 시대 닥칠 수도”

저물가 기조가 바뀔 단초를 제공한 것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개시한 대중(對中) 무역전쟁이라고 WSJ는 분석했다. 중국과의 갈등이 본격화한 이후 미국이 중국산 상품에 매긴 관세율은 평균 19%에 달했다. 분쟁 이전과 비교하면 여섯 배 뛴 수치다. 2012~2017년 연평균 5.8%씩 하락했던 세탁기의 소비자 가격은 무역갈등 직후였던 2018년 상반기에만 12% 뛰었다.

가속화하고 있는 고령화도 물가엔 부정적 요인이다. 미국의 65세 이상 인구 비중은 작년 기준 16.6%로, 10년 전(13.0%)보다 3.6%포인트 상승했다. 유엔은 2030년엔 20.3%로 높아져 미국이 초고령사회로 진입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컨설팅 업체인 토킹헤드의 마노즈 프라단 창업자는 “고령자가 늘면 생산량이 줄어들고 소비가 증가하기 때문에 물가를 자극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결정타를 날린 건 팬데믹이다. 원자재 및 부품 공급난을 겪고 있는 기업이 일제히 가격 인상에 불을 댕기고 있다. 일각에선 1970년대와 같은 고물가 시대를 맞을 것이란 관측을 내놓고 있다. 6월 CPI 상승분(5.4%)은 2008년 8월 이후 가장 큰 폭이며 시장 추정치(다우존스 조사 기준 5%)를 웃돌았다. 빠른 수요 회복과 공급망 교란, 운송비 상승 등이 반영됐다.

미국 중앙은행(Fed) 내에서도 물가 상승세가 쉽게 꺾이지 않을 것이란 예측이 나왔다. 뉴욕연방은행은 앞으로 12개월간의 인플레이션 전망치를 4.8%로 집계했다. 2013년 조사를 시작한 이후 최고치다. 향후 3년간의 기대 물가상승률은 3.6%였다.

다만 현재의 물가 압력은 공급망 병목 때문에 빚어진 것이어서 머지않아 2%대 저물가 시대로 복귀할 것이란 게 Fed 내 지배적인 시각이다.

뉴욕=조재길 특파원 kd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