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실한 준비로 백제와 고구려 무릎 꿇린 신라, 2단계로 당나라와 전쟁 이겨 삼국통일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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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산책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58) 신라의 삼국통일 과정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58) 신라의 삼국통일 과정
국가적 위기는 대부분 대혼란과 체제 붕괴로 이어진다. 고비를 넘겨 극복하는 건 극히 일부일 뿐이다. 평가가 엇갈리지만 신라의 삼국통일이 그렇다. 신라는 6세기 초까지 약소국이었는데 약 150년 후인 668년 삼국을 통일했다. 거기까지는 1단계로 볼 수 있다. 백제와 고구려를 무릎 꿇리는 수준이었다. ‘일통삼한(一統三韓)’의 진정한 실현은 2단계인, 8년에 걸친 나당(羅唐)전쟁에서 승리하고 내부 안정을 완성했을 때다.
결국 당나라의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은 성공했고, 신라는 당나라 관복을 차용했으며, 고종이 즉위하자 연호를 폐기한 뒤 당의 연호를 사용했다(문정창, 《한국고대사》). 귀국 도중 고구려 수군에게 붙잡힌 김춘추가 탈출에 실패했다면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신라는 663년 백제·왜 연합군을 백강전투에서 물리친 뒤 국력이 강화됐다. 666년 연개소문의 아우 연정토가 귀순하자 문무왕은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고구려를 멸(滅)하는 군대를 파견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어 문무왕은 친정군을 이끌고 황해도까지 북상해 당군의 평양성 도착을 기다렸으나, 당군이 패퇴하자 회군했다. 668년 당고종은 문무왕에게 대장군의 깃발을 주면서 고구려 공격에 참여할 것을 요구했고, 신라는 대군을 파견했다. 평양성이 함락되면서 삼국통일전쟁은 2단계로 접어들었다.
나당 연합군의 주도권은 항상 당나라가 가졌다. 660년 백제를 공격할 때도 무열왕은 군사편제상에서 소정방의 지휘를 받았다. 당고종은 백제의 항복을 받고 귀국한 소정방에게 왜 신라를 치지(伐) 않았느냐고 힐난했다. 663년에는 계림대도독부를 설치하고, 문무왕을 계림주대도독으로 임명했으며(《삼국사기》), 전쟁준비를 했다. 신라는 영토의 보존과 자주를 택하는 강경정책을 썼고, 670년 8년간에 걸친 나당전쟁이 시작됐다.
왕권 강화와 선진 문물 수용
신라는 6세기 초에 이르러 대발전의 전기를 맞았다. 우산국 복속(512년)을 시작으로 전략지구를 체계적으로 장악해 외교망을 확장하고 경제 기반을 탄탄히 다지고 군사력과 해양활동을 강화했다. 또 기존 체제와 신앙을 고수하려는 세력과 이데올로기 투쟁을 벌인 끝에 불교를 공인하고 이를 왕권 강화, 새로운 인재 육성, 선진 문물 수용에 효율적으로 활용했다. 진흥왕 33년에 사찰을 세우고, 전사한 사졸(士卒)들을 위로하는 ‘팔관연회’를 열어 사상의 통일을 유도했다. 통일사업의 주체인 자장, 의상 등은 유학 승려였고, 전통신앙과 불교가 조화된 화랑도는 종교 갈등을 방지하는 역할을 했다.김춘추의 활발한 외교활동
신라의 통일정책 중 의미있는 것은 국제질서에 진입하고, 국제환경의 가치와 이용 가능성에 눈을 떴다는 것이다. 신라는 7세기 중반에 이르러 위기에 처했다. 642년 의자왕에게 40여 개 성을 빼앗기고, 이어 대야성을 공격당해 성주인 김춘추의 사위와 딸이 죽었다. 김춘추는 고구려에 원병을 청하러 갔으나, 죽령 서북의 땅을 돌려달라는 제의를 거부해 옥에 갇혔다가 탈출했다. 고립무원 신세인 신라는 643년 당나라에 출병을 원하는 ‘걸사표(乞師表)’를 보냈으며, 계속해서 사신과 공물을 보냈다. 고당(高唐)전쟁이 벌어질 때 군사 3만 명을 파병했고, 그 와중에 백제에 7개 성을 빼앗겼다. 김춘추는 아들과 함께 당나라를 방문해 태종에게 파병을 요청했고, 신라와 당은 각각 백제(평양 이남)와 고구려 영토를 갖기로 합의했다(《삼국사기》).결국 당나라의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은 성공했고, 신라는 당나라 관복을 차용했으며, 고종이 즉위하자 연호를 폐기한 뒤 당의 연호를 사용했다(문정창, 《한국고대사》). 귀국 도중 고구려 수군에게 붙잡힌 김춘추가 탈출에 실패했다면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평양성 함락 이후 2단계로 접어든 삼국통일전쟁
660년 여름(6월), 13만 명의 당나라군은 서해 중부를 횡단해 덕적도에 도착, 태자가 지휘한 신라함대 100척과 합세했다. 나당 연합수군은 황산벌 전투에서 간신히 승리한 김유신의 5만 군대와 합세해 기벌포 해전에서 승리하고, 사비성을 함락한 뒤에 웅진성으로 도피한 의자왕으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그해 말 당나라는 고구려를 공격하며 신라의 지원을 요구했다. 백제와 금마군(익산 일대)에서 전투하다 죽은 무열왕을 계승한 문무왕은 수레 2000여 대에 쌀과 벼 등을 실어 평양성으로 보냈다. 하지만 고구려군의 습격과 대풍·대설로 인해 군사와 말이 얼어죽는 바람에 실패로 끝났다.신라는 663년 백제·왜 연합군을 백강전투에서 물리친 뒤 국력이 강화됐다. 666년 연개소문의 아우 연정토가 귀순하자 문무왕은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고구려를 멸(滅)하는 군대를 파견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어 문무왕은 친정군을 이끌고 황해도까지 북상해 당군의 평양성 도착을 기다렸으나, 당군이 패퇴하자 회군했다. 668년 당고종은 문무왕에게 대장군의 깃발을 주면서 고구려 공격에 참여할 것을 요구했고, 신라는 대군을 파견했다. 평양성이 함락되면서 삼국통일전쟁은 2단계로 접어들었다.
나당 연합군의 주도권은 항상 당나라가 가졌다. 660년 백제를 공격할 때도 무열왕은 군사편제상에서 소정방의 지휘를 받았다. 당고종은 백제의 항복을 받고 귀국한 소정방에게 왜 신라를 치지(伐) 않았느냐고 힐난했다. 663년에는 계림대도독부를 설치하고, 문무왕을 계림주대도독으로 임명했으며(《삼국사기》), 전쟁준비를 했다. 신라는 영토의 보존과 자주를 택하는 강경정책을 썼고, 670년 8년간에 걸친 나당전쟁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