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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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루는 산업은 하루가 다르게 고도화하는데 기한에 쫓겨 예산안 짜느라 바빠 이해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이래도 되는 걸까’ 하는 회의감이 컸죠.”

중앙부처 5급 사무관으로 2016년 입직했다가 지난해 퇴직한 A씨(31)의 토로다. 그는 “만 3년을 공부해 붙은 행정고시였지만 미련은 없었다”고 했다. A씨는 공직에 있는 4년간 3개 부서를 거치며 정책 수립, 연구개발(R&D) 지원 업무를 맡았다.

그는 ‘정책적으로 연구자들을 지원하고 싶다’는 생각에 공무원이 됐다. 하지만 현장에서 이뤄지는 연구를 충분히 이해하고 정책을 결정하기엔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의 과에서 맡았던 정책사업만 20여 개, 주어진 예산 규모는 4400억원이었다. 각기 다른 20여 개 사업에 대한 해외 연구 동향, 기술 개발 과정 등을 정확히 파악해 국민 세금을 쓰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A씨는 “내가 잘 모르는 일을 아는 것처럼 말해야 할 때 드는 회의가 심했다”며 “‘여기 머무르면 영원히 전문성을 쌓지 못하고 얄팍하게 남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산업의 주도권이 정부에서 민간으로 완전히 넘어간 영향도 컸다. 그는 “산업계 분들께 ‘나라는 제발 아무것도 하지 말아달라’는 말도 들었다”며 “정부가 기업보다 앞서 신산업을 이끄는 게 불가능해진 현실을 관료들이 인정하고 기존 정책을 잘 유지하고 관리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는 생각”이라고 설명했다.

‘형식’에 매몰된 조직 문화도 스트레스였다. 콘텐츠가 바뀌는 것도 아닌데 단지 ‘보기 좋은 보고서’로 고치기 위한 야근이 빈번했다. A씨는 “우스갯소리로 '사무관을 하는 동안 얻은 전문성은 한글 프로그램 다루는 법이 전부'라는 말도 한다”며 “장차관들이 워낙 많은 보고를 받으니 가독성이 좋아야 한다고는 하지만 너무 비합리적”이라고 꼬집었다.

공직을 떠난 그는 요즘 민간기업에서 투자처를 찾는 일을 하고 있다. A씨는 “업무 성격은 사무관 시절 맡았던 R&D 사업과 비슷하다”고 했다. 그렇지만 돈을 쓰는 목적이 ‘지원’이 아니라 ‘투자’인 것은 근본적인 차이점이다.

투자 대상을 철저히 리서치하지 않으면 회사에 큰 손실을 입히게 된다. 이런 업(業)의 성격이 공부를 좋아하는 그와 잘 맞아떨어졌다. “특히 기업에 대해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어서 좋아요. 형식에 대한 강요나 불합리한 지시도 정부 조직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덜하고요. 이직한 것에 아주 만족합니다.”

최예린 기자 rambut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