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깊이에의 강요
지금은 나름 뽀송뽀송한 그림을 그리고 있지만, 한때는 표정이 험한 인물화를 주로 그렸다. 굳이 예를 들자면 ‘뭉크’ 풍 같은 것인데, 예술은 뭔가 주제가 심오해야 한다고 항상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림으로 전시한 후 어느 날, 인물화를 사간 집의 아이가 내 그림을 보고 무서워 화장실에 못 간다는 말을 화랑을 통해 들었다.

여러 착잡하게 드는 생각 중 한 가지는 그림을 화장실 복도 쪽에 걸어 놨구나 하는 서운함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래서 화가로 살아남겠나’ 하는 허탈감이었다. 비교적 순한 인물화로 교환해 주긴 했지만, 그 일은 내 그림을 확 바꾸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순수한 아이도 감동하지 않는 그림으로, 어떻게 철이 다 든 어른을 감동하게 만들 수 있겠나 하는 숙제를 준 사건이었다. 32년이나 지난 지금도 어제 일처럼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그리고 그즈음 우연히 읽은 책 하나가 그림 풍을 바꾸는 결심을 더욱 부채질하게 했다. 그 당시 인기리에 읽힌 《좀머씨 이야기》를 쓴 작가가 또 다른 책을 한 권 냈는데, 바로 《깊이에의 강요》라는 단편집이었다. 한 여류 화가 전시장에 들른 어떤 사람이 무심코 던진 “이 그림은 깊이가 없군”이란 말로 시작이 돼, 그 말에 집착하고 고민하던 여류 화가가 신경쇠약에 정신병까지 걸려 결국 죽는다는 내용이다. 정작 그 말을 던진 지나가던 사람은 자신이 한 말은 물론 전시장에 간 기억조차 없을 것이라는 걸 곁들여, 남에 의해 자신의 삶이 흔들리는 건 어리석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했다. 책 한 권으로 예술관이 바뀐다는 건 우스운 일이겠으나 ‘깊이에의 강요’는 그 아이의 울음과 같은 시기에 묘하게 맞물려 내게 많은 변화를 준 게 사실이다. 나 자신도 예술의 ‘깊이’라는 모호한 것에 대해 은연중에 매몰돼 있지는 않은지 반성하는 계기가 되기는 충분했으니 말이다.

실제 화가들 주변에는 그 책의 내용 같은 일이 심심찮게 일어난다. 주로 술자리에서 그런데, 예술가는 배가 고파야 예술의 깊이를 알 수 있다는 부류의 얘기는 나 또한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많이 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일이 아니라서 말은 그렇게 툭 던지긴 하지만 술이 깨고 나면, 소설 속의 지나가는 사람처럼 그걸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 또한 어느 순간부터 잘 알게 됐다.

하지만 더러는 소설 속 여류 화가처럼 그런 말을 짊어지고 끙끙 앓는 경우도 봤다. 조언이든 지적이든 수많은 공허한 말에 연연해 하지 말고 자기 몸에 맞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현명한 일이 아니겠나 싶다. 예술도 인간관계처럼 ‘우물 같은 깊이’도 나름대로 의미는 있겠으나 그에 못지않게 ‘들판 같은 넓이’ 또한 간과해선 안 되는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우는 아이와 그 책 덕에 ‘깊은 곳’에서 빠져나와 지금처럼 즐거운 그림을 그리게 됐다. 간혹 행복을 그리는 화가라고 불러주는 이들을 만나면 그게 내겐 상이고 훈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