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천년 제국'도 전염병엔 속수무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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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운명
카일 하퍼 지음
부희령 옮김
더봄 / 544쪽│2만5000원
카일 하퍼 지음
부희령 옮김
더봄 / 544쪽│2만5000원
서기 166년 로마제국에서 처음 보는 대역병이 빠르게 번졌다. 사람들 사이에 열과 구토가 파도처럼 몰아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음의 물결이 뒤따랐다. 환자의 몸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검은색 발진으로 뒤덮였다. 당대의 명의 갈레노스는 산에서 키운 소의 젖, 아르메니아의 흙, 소년의 소변 같은 ‘신약’을 필사적으로 처방했지만 백약이 무효였다. 당시 제국을 통치했던 황제들의 성을 따 ‘안토니누스 페스트’로 부르는 이 전염병은 단순한 일회성 사건이 아니었다. 700만 명 이상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재난은 로마제국이 쇠망의 길로 접어드는 상징적 장면으로 평가받는다.
《로마의 운명》은 기후와 질병 같은 환경 측면에서 로마제국의 멸망 원인을 탐구한 책이다. 18세기 에드워드 기번이 《로마제국 쇠망사》를 쓴 이래 ‘로마 제국이 왜 멸망했는지’ 이유를 밝히는 것은 역사가들에게 주어진 힘겨운 난제였다. 향락에 빠진 로마인의 부패와 타락, 이민족의 침입, 기독교 확산에 따른 상무 정신의 쇠퇴부터 로마의 성장과 확산이 더는 유지되지 못할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이라는 주장까지 다양한 가설이 제기됐다.
기존의 이론들과 달리 카일 하퍼 미국 오클라호마대 교수는 정치나 사회구조 같은 인간의 행위에서 제국 종말의 근원을 찾기보다는 시야를 넓혀 자연환경에서 ‘파멸의 씨앗’을 찾는다. 그 과정에서 로마제국이 성장·유지·쇠락해 소멸하는 데 자연의 힘이 절대적 영향을 미쳤음이 드러난다. 대제국을 쓰러뜨린 주범도 기후변화와 대규모 전염병으로 좁혀진다. 저자는 유전자 분석과 고(古)기후학, 인구통계학, 미생물학 및 전염병의 발병과 확산에 대한 최신 이론을 동원해 로마의 운명이 자연현상에 의해 좌우됐음을 검증한다.
몰락의 씨앗을 잉태한 것은 역설적이지만 제국의 방대한 영토였다. 북위 24도에서 56도 사이에 놓인 사막과 열대·지중해성·냉대 대륙성 기후의 다양한 지역이 영토에 편입되고, 촘촘한 교통망이 형성되면서 ‘생태적 리스크’는 현실 문제로 다가왔다. 사람과 물자가 향하는 곳으로 세균도 따라 움직였다. 구경거리로 로마까지 끌려온 이국의 동물, 노예시장에 선 수많은 사람은 새로운 질병의 매개체가 됐다. 여기에다 높은 인구밀도와 열악한 위생 상태의 대도시는 유입된 질병의 치명도를 높였고, 확산세에 기름을 부었다. 설상가상 ‘거대한 온실’로 평가되며 로마제국의 부상에 큰 도움을 줬던 온난다습한 기후는 2세기 중반부터 춥고 메마른 날씨로 극적으로 바뀌었다.
로마인들의 취약한 영양 상태도 일을 키웠다. 화려한 유적이 풍기는 이미지와 달리, 로마인의 삶은 당대 기준에서도 풍요하다고 말하기 힘들었다. “일용할 빵을 주시옵고”는 단순한 수사를 넘어서는 진지한 청원이었다. 죽음은 만인의 곁에 있었다. 유아 사망률은 높았고, 기대수명은 20대 중반에 불과했다. 남성들의 평균키가 140㎝에도 못 미쳤다. 황제나 귀족이라고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로마제국은 2세기 중반 이후 지속해서 닥친 역병과 날로 악화한 기후의 타격으로 휘청였다. 관 뚜껑에 못을 박은 것은 6세기에 퍼진 ‘부보닉(임파선)페스트’와 소빙하기의 ‘이중 충격’이었다. 이에 대응하다 마지막 남은 제국의 힘이 소진됐다. 자연의 충격은 수세기 동안 인간이 노력한 것들도 모두 수포로 만들었다.
저자는 매력적인 필치로 팬데믹의 역사가 제국과 전쟁, 노예제, 사회제도의 변화와 밀접하게 얽혀 있음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심화한 세계화 이후 들이닥친 기후변화와 코로나19로 곤욕을 치르는 오늘의 현실은 책이 그리는 먼 옛날의 역사를 더욱 실감 나게 한다.
다만 역자가 로마사 비전문가인 탓에 어렵사리 소개된 책의 가치가 제대로 전해지지 못한 점은 아쉽다. 라틴어와 희랍어 고유명사들은 어색하게 옮겨졌다. ‘게르만족’을 ‘독일인’으로 번역한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알프스 빙하’를 ‘알파인 빙하’로 옮기는 등 영어 형용사를 그대로 한글로 전사하거나 ‘필립 더 아라브(Philip the Arab)’라고 음만 딴 것은 민망한 일이다. 라틴식 인명으로 적힌 ‘페르시아 의사 라제스’도 인터넷 검색으로 ‘이븐 자카리아 알 라지’라는 원래 이름을 손쉽게 찾을 수 있는 만큼, 성실한 번역이라고 말하긴 힘들다.
김동욱 기자 kimdw@hankyung.com
《로마의 운명》은 기후와 질병 같은 환경 측면에서 로마제국의 멸망 원인을 탐구한 책이다. 18세기 에드워드 기번이 《로마제국 쇠망사》를 쓴 이래 ‘로마 제국이 왜 멸망했는지’ 이유를 밝히는 것은 역사가들에게 주어진 힘겨운 난제였다. 향락에 빠진 로마인의 부패와 타락, 이민족의 침입, 기독교 확산에 따른 상무 정신의 쇠퇴부터 로마의 성장과 확산이 더는 유지되지 못할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이라는 주장까지 다양한 가설이 제기됐다.
기존의 이론들과 달리 카일 하퍼 미국 오클라호마대 교수는 정치나 사회구조 같은 인간의 행위에서 제국 종말의 근원을 찾기보다는 시야를 넓혀 자연환경에서 ‘파멸의 씨앗’을 찾는다. 그 과정에서 로마제국이 성장·유지·쇠락해 소멸하는 데 자연의 힘이 절대적 영향을 미쳤음이 드러난다. 대제국을 쓰러뜨린 주범도 기후변화와 대규모 전염병으로 좁혀진다. 저자는 유전자 분석과 고(古)기후학, 인구통계학, 미생물학 및 전염병의 발병과 확산에 대한 최신 이론을 동원해 로마의 운명이 자연현상에 의해 좌우됐음을 검증한다.
몰락의 씨앗을 잉태한 것은 역설적이지만 제국의 방대한 영토였다. 북위 24도에서 56도 사이에 놓인 사막과 열대·지중해성·냉대 대륙성 기후의 다양한 지역이 영토에 편입되고, 촘촘한 교통망이 형성되면서 ‘생태적 리스크’는 현실 문제로 다가왔다. 사람과 물자가 향하는 곳으로 세균도 따라 움직였다. 구경거리로 로마까지 끌려온 이국의 동물, 노예시장에 선 수많은 사람은 새로운 질병의 매개체가 됐다. 여기에다 높은 인구밀도와 열악한 위생 상태의 대도시는 유입된 질병의 치명도를 높였고, 확산세에 기름을 부었다. 설상가상 ‘거대한 온실’로 평가되며 로마제국의 부상에 큰 도움을 줬던 온난다습한 기후는 2세기 중반부터 춥고 메마른 날씨로 극적으로 바뀌었다.
로마인들의 취약한 영양 상태도 일을 키웠다. 화려한 유적이 풍기는 이미지와 달리, 로마인의 삶은 당대 기준에서도 풍요하다고 말하기 힘들었다. “일용할 빵을 주시옵고”는 단순한 수사를 넘어서는 진지한 청원이었다. 죽음은 만인의 곁에 있었다. 유아 사망률은 높았고, 기대수명은 20대 중반에 불과했다. 남성들의 평균키가 140㎝에도 못 미쳤다. 황제나 귀족이라고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로마제국은 2세기 중반 이후 지속해서 닥친 역병과 날로 악화한 기후의 타격으로 휘청였다. 관 뚜껑에 못을 박은 것은 6세기에 퍼진 ‘부보닉(임파선)페스트’와 소빙하기의 ‘이중 충격’이었다. 이에 대응하다 마지막 남은 제국의 힘이 소진됐다. 자연의 충격은 수세기 동안 인간이 노력한 것들도 모두 수포로 만들었다.
저자는 매력적인 필치로 팬데믹의 역사가 제국과 전쟁, 노예제, 사회제도의 변화와 밀접하게 얽혀 있음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심화한 세계화 이후 들이닥친 기후변화와 코로나19로 곤욕을 치르는 오늘의 현실은 책이 그리는 먼 옛날의 역사를 더욱 실감 나게 한다.
다만 역자가 로마사 비전문가인 탓에 어렵사리 소개된 책의 가치가 제대로 전해지지 못한 점은 아쉽다. 라틴어와 희랍어 고유명사들은 어색하게 옮겨졌다. ‘게르만족’을 ‘독일인’으로 번역한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알프스 빙하’를 ‘알파인 빙하’로 옮기는 등 영어 형용사를 그대로 한글로 전사하거나 ‘필립 더 아라브(Philip the Arab)’라고 음만 딴 것은 민망한 일이다. 라틴식 인명으로 적힌 ‘페르시아 의사 라제스’도 인터넷 검색으로 ‘이븐 자카리아 알 라지’라는 원래 이름을 손쉽게 찾을 수 있는 만큼, 성실한 번역이라고 말하긴 힘들다.
김동욱 기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