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정읍 태생인 고인은 19세에 법주사에서 금오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머리를 깎았다. 금산사, 개운사, 영화사 주지를 지냈고 1980년 조계종 제17대 총무원장, 1994년 제28대 총무원장을 역임했다.
스님은 평생토록 불교계의 사회적 책무를 다하는 데 앞장섰다. 조계종 총무원장에 처음 선출됐던 1980년에 발생한 신군부의 불교 탄압 사건인 ‘10·27 법난’ 때 강제 연행돼 고문을 당하는 등 갖은 고초를 겪고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지지 성명을 내달라는 신군부의 요구를 거부하고 5·18 민주화 운동 희생자들을 기리는 추모 행사를 봉행했다는 이유에서였다.
1994년 조계종 분규 이후 총무원장을 다시 맡아 종단 개혁에 앞장섰다.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을 기치로 내걸고 다방면에서 불교의 사회참여 운동을 추진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지원 시설인 ‘나눔의 집’ 설립은 이런 운동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고인이 1998년 총무원장 연임을 시도하다 종단 내 갈등을 빚었던 점, 대표로 있던 나눔의 집에서 후원금 착복 및 할머니 학대 사건이 벌어진 것은 오점으로 남는다.
스님은 불교인권위원회 공동대표와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상임대표, 실업극복국민운동본부 공동대표를 지내는 등 시민·사회운동에 매진했다. 2000년대 들어서는 고(故) 김수환 추기경, 강원용 목사 등과 함께 종교화합 운동을 펼쳤다. 2004년부터는 지구촌공생회를 세워 동남아시아 등 세계 여러 곳에서 교육 및 지역 개발 사업을 벌였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국민훈장 무궁화장과 모란장을 받았고 만해대상, 대원상, 조계종 포교대상 등을 수상했다.
월주 스님은 세상을 떠나기에 앞서 이런 임종게(臨終偈)를 남겼다. ‘하늘과 땅이 본래 크게 비어있으니/일체가 또한 부처이구나./오직 내가 살아왔던 모든 생애가/바로 임종게가 아닌가./할(喝)!’ 장례는 5일간 금산사에서 조계종 종단장으로 치러진다. 영결식과 다비식은 26일 봉행된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