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 해례본' 1억에 판다?…초유의 결정에 미술계 발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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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창제의 원리가 담겨 있는 훈민정음 해례본(국보 제70호·사진)을 1억원에 살 수 있다면 어떨까요. 물론 책 실물을 단돈 1억원에 판다는 얘긴 아닙니다. 1940년 간송 전형필 선생이 이 책을 사들인 가격만 해도 지금 돈으로 30억원(당시 1만1000원)에 달하니까요. 1억원에 살 수 있는 건 대체불가능토큰(NFT)으로 만든 훈민정음 해례본의 사진 파일(훈민정음 NFT)입니다. 컴퓨터 파일이긴 하지만 고유 번호가 붙어 있어 '원본성'과 소유권은 보장됩니다. 무한히 복사하고 전송할 수 있는 일반 파일과는 다르다는 겁니다.
이런 게 총 100개가 판매되니, 구매자는 훈민정음 파일 100분의 1만큼의 소유권을 갖게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훈민정음 NFT를 사도 책 실물에 대한 소유권은 전혀 주장할 수 없습니다. 만지는 건 물론이고 홀로 찬찬히 실물을 감상할 수조차 없죠. 당신이 1억원과 바꾸게 되는 건 NFT를 소유한다는 만족감, 구매를 통해 문화재 보존에 기여했다는 자부심, 그리고 얼마에 되팔 수 있을지 아무도 모르는 컴퓨터 파일입니다. 훈민정음 NFT, 당신이라면 구매하시겠습니까.
원본성이 왜 중요한지를 설명하기 위해 예시를 들겠습니다. 물감을 흩뿌리는 미국의 추상화가 잭슨 폴록(1912~1956)의 이름은 들어보셨지요. 만약 기자가 취미삼아 캔버스에 물감을 뿌리다, 기막힌 우연의 일치로 폴록의 어떤 작품과 정확히 동일한 그림을 만들어냈다고 가정합시다. 그렇다면 제가 만든 그림도 폴록의 그림처럼 점당 수백억원에 팔 수 있을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예술작품을 우러러보게 하는 속성이자 분위기, 즉 아우라(aura)가 없는 단순한 복제품이기 때문입니다.
이때까지 디지털 파일에는 아우라가 없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습니다. 무한히 복제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NFT는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사진이나 그림파일 등 디지털 파일에 원본성과 유일성을 부여한 것입니다. 블록체인 기술을 이용해 디지털 파일에 고유값을 부여하고 이를 저장하면, 똑같은 디지털 그림 사본이 아무리 많아도 NFT화된 파일만이 유일한 진품으로 인정받게 됩니다. 시장에서 사고 팔 수도 있게 되지요. 이렇게 만들어진 아티스트 비플의 NFT작품 '매일 : 첫 5000일'은 지난 3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780억원에 낙찰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디지털로만 존재하는 파일이 아니라 실물로도 존재하는 미술품 및 문화재를 NFT화해 판매하는 건 얘기가 좀 다릅니다. 아무리 NFT로 원본성을 부여했다고 하더라도 실물이 엄연히 따로 존재하는 게 사실이니까요. 이렇게 되면 NFT에 실물과 구분되는 어떤 가치가 있는지 설명하기 어려워집니다. 미학적·철학적인 문제인데, NFT 확산이 본격화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까지는 명확히 결론이 나지 않고 있습니다.
관련해서 잡음도 끊임없이 불거지는 상황입니다. 지난 5월 한 회사가 이중섭과 김환기 작품 등의 NFT를 디지털 아트 플랫폼에서 경매한다고 했지만, 저작권 동의를 얻지 않았고 일부 작품이 위작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경매를 중단한 바 있습니다. "NFT가 미술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다"는 의견이 많지만 아무래도 미심쩍은 구석이 있는 건 사실입니다. '봉이 김선달이 대동강 물 파는' 느낌도 나고요. 물론 “수백년 뒤인 오늘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생수를 돈 주고 사먹지 않느냐”고 반박하면 할 말은 없습니다만….
국보가 NFT로 제작되는 것은 전례 없는 일입니다. 관련해 명확한 규정이 없기 때문에 NFT화가 가능할지 여부는 문화재청 결정에 달려 있습니다. 동산문화재 일부는 사유재산이고, 이를 전시하는 등 활용 사업은 허용돼 왔기 때문에 법적으로 NFT화를 막을 확실한 근거는 없습니다. 다만 문화재를 촬영할 때는 문화재청장의 허가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문화재청이 이를 막을 수 있는 법적 근거도 있습니다. 문화재청은 법률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하겠다는 입장인데, 결국 여론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겠죠.
하지만 반대 목소리도 적지 않습니다. NFT를 둘러싼 논란이 가장 큰 걸림돌입니다. NFT와 실물 소유권은 무관하고, 훈민정음의 경우 NFT가 한 개도 아닌 백 개나 발행돼 ‘원본성’을 주장하기도 애매한 상황입니다. 이런 가운데 외국인 등이 얽힌 문제가 생기거나 사기꾼이 꼬이기라도 하면 '국보 중의 국보'를 두고 괜한 잡음이 나올 수 있다는 겁니다. 미술관의 재정난도 따져 보면 국가의 책임이라고 보기엔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국가 지원을 받지 않는 대신 간섭도 받지 않겠다는 게 간송과 간송 후손들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훈민정음 NFT 판매가 개시된다면 이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전문가들은 "간송미술관 얘기대로 거래나 투자라기보다는 후원 개념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금전적 여유가 있고 간송미술관을 후원하고 싶다면 충분히 구매할 만 합니다. 하지만 시세 차익 등을 노리고 투자 측면에서 접근하는 건 삼가는 편이 좋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가격이 확 뛸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지만, 실물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NFT에 내재 가치가 있다고 말하기는 애매한 게 사실이니까요.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이런 게 총 100개가 판매되니, 구매자는 훈민정음 파일 100분의 1만큼의 소유권을 갖게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훈민정음 NFT를 사도 책 실물에 대한 소유권은 전혀 주장할 수 없습니다. 만지는 건 물론이고 홀로 찬찬히 실물을 감상할 수조차 없죠. 당신이 1억원과 바꾸게 되는 건 NFT를 소유한다는 만족감, 구매를 통해 문화재 보존에 기여했다는 자부심, 그리고 얼마에 되팔 수 있을지 아무도 모르는 컴퓨터 파일입니다. 훈민정음 NFT, 당신이라면 구매하시겠습니까.
'훈민정음 NFT'라니, 대체 무슨 얘기야?
훈민정음 해례본을 관리 중인 간송미술관은 해례본을 NFT로 100개 제작해 개당 1억원에 시리얼넘버를 붙여 판매를 추진 중이라고 밝혔습니다. 먼저 NFT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듯 합니다. NFT란 블록체인 기술을 이용해 디지털 파일에 '원본성'을 부여하는 겁니다.원본성이 왜 중요한지를 설명하기 위해 예시를 들겠습니다. 물감을 흩뿌리는 미국의 추상화가 잭슨 폴록(1912~1956)의 이름은 들어보셨지요. 만약 기자가 취미삼아 캔버스에 물감을 뿌리다, 기막힌 우연의 일치로 폴록의 어떤 작품과 정확히 동일한 그림을 만들어냈다고 가정합시다. 그렇다면 제가 만든 그림도 폴록의 그림처럼 점당 수백억원에 팔 수 있을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예술작품을 우러러보게 하는 속성이자 분위기, 즉 아우라(aura)가 없는 단순한 복제품이기 때문입니다.
이때까지 디지털 파일에는 아우라가 없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습니다. 무한히 복제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NFT는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사진이나 그림파일 등 디지털 파일에 원본성과 유일성을 부여한 것입니다. 블록체인 기술을 이용해 디지털 파일에 고유값을 부여하고 이를 저장하면, 똑같은 디지털 그림 사본이 아무리 많아도 NFT화된 파일만이 유일한 진품으로 인정받게 됩니다. 시장에서 사고 팔 수도 있게 되지요. 이렇게 만들어진 아티스트 비플의 NFT작품 '매일 : 첫 5000일'은 지난 3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780억원에 낙찰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디지털로만 존재하는 파일이 아니라 실물로도 존재하는 미술품 및 문화재를 NFT화해 판매하는 건 얘기가 좀 다릅니다. 아무리 NFT로 원본성을 부여했다고 하더라도 실물이 엄연히 따로 존재하는 게 사실이니까요. 이렇게 되면 NFT에 실물과 구분되는 어떤 가치가 있는지 설명하기 어려워집니다. 미학적·철학적인 문제인데, NFT 확산이 본격화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까지는 명확히 결론이 나지 않고 있습니다.
관련해서 잡음도 끊임없이 불거지는 상황입니다. 지난 5월 한 회사가 이중섭과 김환기 작품 등의 NFT를 디지털 아트 플랫폼에서 경매한다고 했지만, 저작권 동의를 얻지 않았고 일부 작품이 위작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경매를 중단한 바 있습니다. "NFT가 미술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다"는 의견이 많지만 아무래도 미심쩍은 구석이 있는 건 사실입니다. '봉이 김선달이 대동강 물 파는' 느낌도 나고요. 물론 “수백년 뒤인 오늘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생수를 돈 주고 사먹지 않느냐”고 반박하면 할 말은 없습니다만….
간송미술관 "재정난 때문", 문화재청 "법률 검토해보겠다"
훈민정음 해례본의 NFT화라는 모험을 간송미술관이 감행한 까닭은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서입니다. 미술관을 설립한 간송 전형필 선생과 그 후손들은 국가의 지원도 간섭도 받지 않는다는 입장이지만, 미술관 운영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지난해에는 재정난 때문에 보물 불상 2점(사진)을 판매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간송미술관 측은 "일종의 후원 개념으로 NFT를 판매하려는 것"며 "비판이 있을 수 있지만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내린 결정"이라고 전했습니다.국보가 NFT로 제작되는 것은 전례 없는 일입니다. 관련해 명확한 규정이 없기 때문에 NFT화가 가능할지 여부는 문화재청 결정에 달려 있습니다. 동산문화재 일부는 사유재산이고, 이를 전시하는 등 활용 사업은 허용돼 왔기 때문에 법적으로 NFT화를 막을 확실한 근거는 없습니다. 다만 문화재를 촬영할 때는 문화재청장의 허가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문화재청이 이를 막을 수 있는 법적 근거도 있습니다. 문화재청은 법률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하겠다는 입장인데, 결국 여론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겠죠.
'훈민정음 NFT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미술계에서는 이번 일을 놓고 의견이 엇갈리고 있습니다. 먼저 긍정론입니다. 간송미술관을 설립한 간송은 자신의 인생과 재산을 바쳐 일본 등 외국으로 유출되는 값진 고미술품과 문화재들을 수집했습니다. 그가 모은 문화유산 중 12점은 국보, 10점은 보물, 4점은 서울시 지정 문화재로 지정됐지요. 신윤복의 미인도를 비롯해 청자상감운학문매병·동국정운·금동여래입상 등 값을 매길 수 없는 문화재들이 그 덕분에 한국 땅에 있습니다. 훈민정음을 NFT화 한다는 게 생소하지만 그 자체로 나쁜 일이라고는 결코 할 수 없지요. 이런 가운데 NFT화를 허용하면 재정난에 시달리는 간송미술관을 도울 수 있다는 겁니다.하지만 반대 목소리도 적지 않습니다. NFT를 둘러싼 논란이 가장 큰 걸림돌입니다. NFT와 실물 소유권은 무관하고, 훈민정음의 경우 NFT가 한 개도 아닌 백 개나 발행돼 ‘원본성’을 주장하기도 애매한 상황입니다. 이런 가운데 외국인 등이 얽힌 문제가 생기거나 사기꾼이 꼬이기라도 하면 '국보 중의 국보'를 두고 괜한 잡음이 나올 수 있다는 겁니다. 미술관의 재정난도 따져 보면 국가의 책임이라고 보기엔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국가 지원을 받지 않는 대신 간섭도 받지 않겠다는 게 간송과 간송 후손들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훈민정음 NFT 판매가 개시된다면 이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전문가들은 "간송미술관 얘기대로 거래나 투자라기보다는 후원 개념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금전적 여유가 있고 간송미술관을 후원하고 싶다면 충분히 구매할 만 합니다. 하지만 시세 차익 등을 노리고 투자 측면에서 접근하는 건 삼가는 편이 좋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가격이 확 뛸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지만, 실물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NFT에 내재 가치가 있다고 말하기는 애매한 게 사실이니까요.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