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두려운 연주자들
연일 폭염이 이어지자 클래식계에 비상이 걸렸다. 덥고 습한 날씨 탓에 악기 관리가 까다로워져서다. 다시 제작하고 싶어도 만들 수 없는 고(古)악기를 쓰는 연주자들에겐 더더욱 고역이다.
258세 명기를 유지하는 비결 ‘항온·항습’
김동현은 선배 바이올리니스트인 고(故) 권혁주가 쓰던 바이올린을 물려받았다. 이탈리아의 지오반니 바티스타 과다니니가 제작한 바이올린은 소리가 균일하고 음정 변화가 없는 명기(名器)로 통한다. 현대 기술로 복제할 수 없는 희소성 때문에 가격이 수십억원에 달한다. 2018년 11월 영국 런던의 타리시오 경매장에 출품된 과다니니 바이올린(1773년산)은 210만달러(약 24억원)에 낙찰됐다.워낙 고가의 악기라 관리에 심혈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 그가 쓰는 바이올린 케이스에는 습도계가 들어 있다. 성인 남성 손바닥 크기의 제습제를 4개씩 넣어 습도를 40%로 유지한다. 내부 온도를 20도에 맞춘 연습실과 공연장에서만 케이스를 연다. 김동현은 “야외 공연을 하고 나면 반드시 방에 제습기를 틀어놓고 2시간 정도 악기를 말린다”고 말했다.
꾸준한 정기 점검도 필수다. 김동현은 2~3개월에 한 번씩 금호문화재단 악기를 관리해주는 서울 종로의 스트라디공방을 찾아 점검을 받는다. 공방 주인인 김동인 대표(53)는 아버지 김현주 씨와 함께 2대째 악기 공방을 운영하고 있는 악기 제작 명장이다. 지난 26일 스트라디공방을 찾은 김동현은 긴장한 표정이었다. 그는 “점검을 받으러 올 때마다 숙제 검사를 받는 기분이 든다”고 했다.
김 대표는 김동현의 과다니니를 유심히 살폈다. 피아노 해머로 본체를 두드리며 균열 여부를 확인했고, 악기를 들어올려 브리지(줄을 얹는 부위)의 균형이 맞는지 점검한 뒤 합격점을 줬다. 김 대표는 “공방의 습도는 항상 기상청이 건조주의보를 발령하는 35%로 유지한다”며 “공방이 워낙 건조해서 목감기를 달고 산다”고 말했다.
고악기는 금호문화재단 소유지만 관리는 전적으로 연주자 몫이다. 재단 관계자는 “오디션을 통과해 수혜자로 선발되고도 관리 부담 때문에 사용을 포기하는 연주자도 있다”고 귀띔했다.
다른 악기 연주자들도 긴장하기는 마찬가지다. 오보이스트 함경은 여름이면 악기에 숨을 불어넣는 나뭇조각인 ‘리드’를 평소보다 자주 깎는다. 덥고 습한 날씨에 민감하게 반응하다보니 예비용 리드를 갖고 있어야 해서다. 입 모양, 호흡법 등 개인 특성에 맞춰야 해서 연주자가 직접 리드를 깎는다고 한다. 명품 첼로인 1698년산 ‘지오반니 그란치노’를 사용하는 첼리스트 박유신도 습도 관리에 각별히 신경을 쓴다. 그는 “습도가 높으면 본체 내부의 나뭇조각들이 떨어지는데, 한 번 갈라지면 악기 전체를 해체해서 빼내야 한다”고 설명했다.
대형 악기 관리에도 비상
수십 명의 연주자가 함께 일하는 공연장과 오케스트라들에도 여름 나기는 까다로운 과제다. 더블베이스, 하프, 팀파니 등 고가의 대형 악기들은 악단과 공연장이 직접 관리한다. 2016년 완공된 롯데콘서트홀에는 ‘클린룸’이라는 악기 보관실이 두 개 있다. 공연장이 보유한 11종의 타악기와 피아노 4대의 보관소다. 이곳의 습도는 55%, 온도는 20도 내외로 유지한다. 대당 2억5000만원에 달하는 피아노와 3000만원인 팀파니를 보호하기 위해서다.피아노는 습도가 높아지면 소리가 탁해진다. 피아노 줄을 두드리는 양털 해머가 물을 머금어서다. 건조하면 울림이 줄어든다. 가죽으로 만든 팀파니도 건조하면 갈라지고, 습도가 높으면 덜 마른 빨래처럼 가죽이 늘어진다.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도 하프, 더블베이스, 팀파니 등 대형 악기 관리에 주력한다. 박재균 코리안심포니 무대감독은 “장마철이 되면 습도 차이가 워낙 커서 현악기의 줄이 잘 끊어진다”며 “관리에 소홀하면 금세 망가진다”고 말했다.
오현우 기자 oh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