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대석칼럼] 자유인은 울타리에 갇힐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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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닷컴 더 라이피스트
자유인은 걸림이 없어 울타리에 갇히지 않는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자유인은 걸림이 없어 울타리에 갇히지 않는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자유(自由)는 남에게 구속을 당하거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의지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내 마음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다만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거나 법의 범위 안에서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행위라야 한다.
그런데 자기가 뭔지 모르게 좋아하는 단체 등에 자기 판단을 위임하는 것은 이미 자유인이 아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사실 한국인 대부분의 정치 성향이 그렇다.
자유가 ‘내 마음대로’ 이니 내가 알고 이해하는 수준이 중요하다. 내 경험, 지식, 지혜가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반대로 교양이 높으면 높은 대로 자유 행위가 달라진다. 따라서 국민의 교양 수준의 따라 그 나라의 자유 수준(지수)이 달라질 수 있다.
정치인은 그 수준에 맞추어 국민을 포퓰리즘( (Populism, 대중 영합주의)으로 유혹하고 대부분 선거 등에서 그 이득을 얻지만, 국가는 장기적으로 망가진다. 정치인 수준을 높이고 나라 망치는 포퓰리즘을 없애려면 국민의 교양이 높아져야 한다.
참자유는 분별이 끊어지고 걸림이 없어야 한다. ‘이거다’ ‘저거다’에 갇히지 말고 자신의 자유의지로 판단해야 하고 행동해야 한다. 자신의 지식과 경험, 지혜 수준은 누구나 아는 공지의 사실, 보편적인 상식과 진리로 보아도 타당하다. 다시 말하면 이 역시 교양이다.
교양(敎養)은 개인의 인격과 학습에 관계된 지식과 행위다. 단순히 책과 유튜브를 보고, 경험해서 얻은 것이 전부가 아니고 생각을 해야 한다. 사유(思惟)다. 더구나 요즘은 AI에 의한 교묘한 데이터 알고리즘으로 내가 믿고 싶어하는 정보들만 보이고 점점 확증편향성을 가지게 되어, 점차 어설프게 신념화하여 남을 가르치려 달려든다. 이미 자유가 오염되고 세뇌당한 것이다.
스스로 돌아보고 벗어나야한다. 모든 국민이 플라톤 같은 현인이 될 수는 없지만, 누구나 어떤 상황에서도 공감할 수 있는 상식 수준에서 판단하고 행동해야 한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민족과 반일’은 특정세력의 집권을 정당화해주는 하나의 도구로 사용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반일 의식이 약해지면 민족의 가치도 약해지고, 민족의 가치가 약해지면 통일의 명분이 없어지고 북한에 대한 유화책도 설 자리가 좁아진다고 우려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반대로 반일 분위기를 높아지면 민족의식도 높아지고, 이는 김일성, 김원봉 등에 대한 우호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도움이 되고 최종적으로 대북 지원 정책을 추진하는 데도 쉬워진다고 보는가 보다. 더불어 이는 한미일 공조를 깨야 하는 중국에도 도움이 되는 행위다. 국가가 아니라 일부 세력의 권력안보에만 해당하는 일이다. 당연히 국익에도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의 발전에도 전혀 도움이 안 된다.
그런데 편향된 북한의 시각, 이른바 종족, 민족 시각으로 항일과 반제국주의(반미)를 행태로는 글로벌 시대에 한국은 발전, 번영할 수가 없다. 중공(당시)과 김일성이 일본과 싸워서 실질적인 효과를 얼마나 거두었으며, 또 항일투쟁으로 해방을 쟁취하였는가? 불행히도 전혀 아니다.
2차 대전 중에 미국의 참전을 두려워한 일본이 진주만을 먼저 공습하여 미국을 전쟁에 불러들였고, 미국은 일본을 항복시켜 그 결과로 일본으로부터 한국은 해방됐고,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다. 항일투쟁을 넘어 일본을 박살 낸 것은 중국도, 독립군도, 소련도 아닌 미국이었다. 그러니 따지자면 최고의 항일투쟁의 일등공신은 당연히 미국이다.
그리고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와 종족, 민족을 구분하지 못하면 그야말로 대한민국이 설 자리가 없다. 국가의 존재 이유, 목적, 그에 속한 국민의 권리와 의무가 헌법이다. 당연히 정부는 주권을 가진 국민을 위하여 헌법 등에서 정한 위임받은 일을 해야 한다.
막연한 감성적 접근, 소아병적인 해방 전·후 인식으로 현재의 한국을 다루려 하면 동떨어진 비현실적 생각이다. 따라서 의도된 세력에 의하여 꼭두각시처럼 감정적으로 반일감정에 부화뇌동하는 일은 나라에 도움도 안 되고. 자유 한국인으로서 적절한지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한다. 자유인이라면 말이다.
정치인들이 지지세력 결집과 표를 얻기 위하여, 또 중국의 이간질에 동조하여 한미일 공조를 깨려고 한일의 다툼을 부추기는 이른바 ‘토착 왜구’ 프레임에 그저 쫓아가는 것은 아닌지 다시한번 생각해서 판단해야 한다. 무조건적인 반일 행위가 과연 국익에 도움이 되는지 냉정하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자유인이다.
그럴듯한 명분과 포장으로 만든 그 가두리 안에 갇혀서 내 자유의지, 내 생각, 내 목소리 없이 우르르 몰려다닌다. 군중 틈(뒤)에서 누가 선창 하는 소리에 힘차게(?) 복창하고, 영혼없이 악플에 문자폭탄을 하는 비자유인(정신적 노예)으로 살며 만족감을 느끼고 사는 것을 원한다면 어쩔 수 없다.
자유민주주의란 개인에게 끝없이 생각하고 판단할 사고의 근육을 단련할 것을 요구하는 체제이다. 그러려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고 적정선에서 타협하고 통합할 수 있다. 현대의 복잡 다변한 세상에서 필요한 ‘다원성’이 자리 잡는 세상이 된다.
요즘 친한 사람들끼리도 정치이야기는 아예 꺼내지도 못한다. 각종 사회 문제에 대하여 논리와 객관적 사실로 자유로운 토론이 되어야하는데 모두 그릇된 진영논리로 무장되어 담론이 없다.
누구나 알고 걱정하며 불편함을 겪고 있는 사회현상이다. 친구간, 가족간에 대화 조차 어려우니 나라가 통합될 리 만무다. 건전한 인간관계에도 고약한 독이 편가르기다. 정치는 말할 것도 없다.
편 가르기와 인기영합을 위한 포퓰리즘이 최근 한국에서 통용되는 이유는 바로 ‘보수’ ‘진보’나 ‘옳음’을 어떤 특정 정치 진영에 선험적으로 귀속시키고 자신의 판단을 모두 위임해버리는 경향이 심해서이다.
이는 한국은 영국, 프랑스 등 서구처럼 중세 세습, 봉건주의 시대에서 근대 자본주의로 가는 이른바 근대화 과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시민계층이 형성되어 시민, 노동자가 노동자와 시민의 권익 등 자유를 쟁취하는 과정이 없이 민주주의, 자본주의를 외래로부터 받아들였다.
시민이 생각하고 판단하며 공감하여 행동으로 나타낸 시민운동의 근대화 과정 없이 미국의 힘으로 일제로부터 해방되었다. 시대적으로 한국은 시민, 개인에게 생각하는 힘을 서구처럼 기를 기회가 별로 주어지지 못했다.
한국은 건국세대에 이은 산업화 세대 그리고 민주화 세대까지 우리는 압축성장의 부작용을 겪으면서까지 성장해왔다. 짧은 기간에 고도의 경제성장은 필연적으로 성장통이 나타난다. 독재와 민주화 같은 정치 성장통, 기업윤리와 노동윤리 충돌 같은 경제적 성장통, 부정부패와 반기업 정서 같은 사회적 성장통이다.
한국은 압축성장 성장통을 치유하면서 시민의식과 시민활동이 증가하면서 서구의 시민혁명 등 근대화 과정을 조금 부족하지만 어느 정도 수준으로 겪었다고 필자는 판단하다. 따라서 한국인도 이제는 진영논리에 함몰되지 않고 사안별로 성숙한 시민으로서 판단하고 행동해야 한다.
그래야 정치인들이 정신 차리고 올바른 정치를 하며 나라가 발전하고 후손들이 부강한 나라를 이어갈 수 있다. 한국의 머리좋은 정치인들은 한국 국민의 교양 수준을 늘 관찰하고 있다는 것을 국민은 냉정히 알아야 한다.
부처님은 자기 자신에게 귀의(歸依)하며 법에 귀의하며 남에게 귀의하지 말아라. 스스로를 광명(光明)으로 삼고 법을 광명으로 삼되 남의 광명으로 삼지 말라고 했다.
“답(答)을 교회나 목회자에게서 구하지 말라. 스스로 찾으라. 당신 안의 신성(神性)을 회복하라. 당신은 대체 언제까지 교회가, 목사가 시키는 대로 살 것인가.” 2019. 12. 24. 성탄을 앞두고 길희성(76) 서강대 명예교수(대한민국학술원 회원)가 한국일보를 통해 꺼낸 이야기다.
4대 성인 중 한 명인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라고 하였다. 이 말은 사실 그리스의 "델포이 신전" 안의 기둥에 새겨져 있는 글귀인데 소크라테스가 몇 번 인용하였다. 내가 무지하다는 아는 것이 아는 것의 출발점이다. 무지(無知)의 지(知)다. 그래야 내 안에 있는 이성과 지혜를 꺼낼 수 있다.
최진석 교수는 노자 강의에서 인간은 불을 사용하고 기하학적 도형, 혈연, 상제, 덕(德)의 과정을 거치며 초월적 존재인 신(神)으로부터 멀리하였다. 그래서 도(道)라는 도덕 중심의 문명을 건설하기 시작한 인간이 역사의 책임자로 등장하였다. 인간의 생각으로 새로운 길, 인류문명을 만드는 것이다.
서구에서는 14세기~16세기 중세의 신(神) 중심의 암흑세계에서 인간성 해방을 통한 인본사상의 르네상스가 꽃피워졌다.
자유주의 아버지라 불리는 존 스튜어트 밀은 인류의 가장 큰 약점이 ‘검증되지 않는 신념에 자기 자신을 복속시키는 경향성’이라고 공언했다. 이 말만 유념해도 우리는 저열한 편 가르기, 나라 망치는 저열한 포퓰리즘과 횡행하는 포퓰리스트들을 이 땅에서 몰아낼 수 있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 라고 말하면서까지 초월적, 절대적 존재로부터 만들어진 기존 질서를 부정하면서 인간의 맹목적인 추종 행위를 비판하였다. 하물며 이미 검증된 낡은 이념과 이를 이용하여 국민을 갈라놓고 편 가르기에서 우리는 이제 모두 자유의지로 탈출하여야 한다.
성민 및 현인들도 이럴진대 자신의 자유로운 의지가 아니라 남이 의도적으로 만든 낡은 이념과 술수로 만든 진영에 갇혀있어서는 안된다. 어설픈 신념으로 그들이 지시하고 맹목적으로 따른다면 노예나 다름없다. 그 목줄과 울타리에서 벗어나 사안별로 자산의 교양 수준으로 자유롭게 판단하고 행동하여야 한다. 자신이 자유를 행사는 주인으로 사는 삶이다.
인간이 경계가 있다는 것은 신념과 이념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상태를 말하며, 통찰하는 사람은 바로 이 경계에 있는 사람이다. 결국, 설익은 신념에서 벗어난 '나'로 돌아가야 통찰력, 인문적 사고력이 생긴다.
그래야 친구와 이웃과 사회와 대화하고 발전하며 통합할 수 있고 인간다운 건전한 사회가 만들어지고 국가로 바로 서게 되는 것이다.
“ 사람을 두고 내 편, 네 편 나누고 차별하는 인간들은, 근원적 트라우마나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자들이다. 원래 우주 시간을 뒤로 돌리면, 애시당초 너ㆍ나가 한 몸인 것을 인식 못 하는 소인배들이나 하는 짓이다.
지구에 생물이 최초로 출현한 태초의 시점에 무슨 너ㆍ내가 따로 구분되는가. 상생ㆍ공생ㆍ공화의 정신이 티끌만큼이라도 있다면, 내 편,네 편 나누는 것이 얼마나 허망하고 부질없는 짓거리인지 알 수 있지만, 이상한 자들은 근기가 모자라 그럴 생각ㆍ여유조차 없는 인간들이다.
세상이나 나라는 '너도 살고 나도 살자'는 정신을 갖춘 자가 이끌고 리더가 되어야 한다. '나만 살고 너는 죽어라' 식의 편 가르기 선수, 에고이스트가 이 세상을 개척하거나 리더가 될 수는 없다.
그럼에도 그런 인간들이 리더인양 설친다면 그것은 우리의 불행이자 그런 자들 자신이 필망 하는 첩경일 뿐이다. 정말 다들 생각 근육을 단단히 키워 세뇌ㆍ선동의 강물에 익사당하지 말아야 한다.” 멜 깁슨이 열연한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서 윌리엄 월레스가 잉글랜드와 싸우기 전 외친 자유에 대한 가슴 뭉클한 말이다. “저들이 우리 목숨 가져갈진 몰라도, 그들이 결코 앗아가진 못할 거라고, 우리 자유는!”
한국 역시 6·25 전쟁 등 숱한 고난 속에서도 무수한 피를 흘리며 자유를 지켜 왔다. 우리가 지금 누리는 자유는 결코 공짜가 아니다. 그런데 그 고귀한 ‘자유’를 그냥 진영에 갇혀 스스로 버리는 행위를 해서야 되겠는가?
진영에 갇히지 않아야 서로 공감할 수 있고, 다음에 통합할 수 있다. 당연히 포퓰리스트 정치인과 국익에 해가되는 포퓰리즘은 사라지고, 정치인은 국민을 따라온다. 그래야 통일도 한국의 번영도 미래도 있다.
<한경닷컴 The Lifeist> 박대석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독자 문의 : thepen@hankyung.com
그런데 자기가 뭔지 모르게 좋아하는 단체 등에 자기 판단을 위임하는 것은 이미 자유인이 아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사실 한국인 대부분의 정치 성향이 그렇다.
자유가 ‘내 마음대로’ 이니 내가 알고 이해하는 수준이 중요하다. 내 경험, 지식, 지혜가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반대로 교양이 높으면 높은 대로 자유 행위가 달라진다. 따라서 국민의 교양 수준의 따라 그 나라의 자유 수준(지수)이 달라질 수 있다.
정치인은 그 수준에 맞추어 국민을 포퓰리즘( (Populism, 대중 영합주의)으로 유혹하고 대부분 선거 등에서 그 이득을 얻지만, 국가는 장기적으로 망가진다. 정치인 수준을 높이고 나라 망치는 포퓰리즘을 없애려면 국민의 교양이 높아져야 한다.
참자유는 분별이 끊어지고 걸림이 없어야 한다. ‘이거다’ ‘저거다’에 갇히지 말고 자신의 자유의지로 판단해야 하고 행동해야 한다. 자신의 지식과 경험, 지혜 수준은 누구나 아는 공지의 사실, 보편적인 상식과 진리로 보아도 타당하다. 다시 말하면 이 역시 교양이다.
교양(敎養)은 개인의 인격과 학습에 관계된 지식과 행위다. 단순히 책과 유튜브를 보고, 경험해서 얻은 것이 전부가 아니고 생각을 해야 한다. 사유(思惟)다. 더구나 요즘은 AI에 의한 교묘한 데이터 알고리즘으로 내가 믿고 싶어하는 정보들만 보이고 점점 확증편향성을 가지게 되어, 점차 어설프게 신념화하여 남을 가르치려 달려든다. 이미 자유가 오염되고 세뇌당한 것이다.
스스로 돌아보고 벗어나야한다. 모든 국민이 플라톤 같은 현인이 될 수는 없지만, 누구나 어떤 상황에서도 공감할 수 있는 상식 수준에서 판단하고 행동해야 한다.
▲ 예를 들어 친일이 나쁘다고 하면
최소한 왜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는지 알려하고, 36년간 그 속에서 살려면 나라면 상식적으로 어떻게 했을까?, 일본에 다시 당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극일(克日)하는지를 생각하고 판단해야 한다.현재 대한민국에서 ‘민족과 반일’은 특정세력의 집권을 정당화해주는 하나의 도구로 사용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반일 의식이 약해지면 민족의 가치도 약해지고, 민족의 가치가 약해지면 통일의 명분이 없어지고 북한에 대한 유화책도 설 자리가 좁아진다고 우려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반대로 반일 분위기를 높아지면 민족의식도 높아지고, 이는 김일성, 김원봉 등에 대한 우호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도움이 되고 최종적으로 대북 지원 정책을 추진하는 데도 쉬워진다고 보는가 보다. 더불어 이는 한미일 공조를 깨야 하는 중국에도 도움이 되는 행위다. 국가가 아니라 일부 세력의 권력안보에만 해당하는 일이다. 당연히 국익에도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의 발전에도 전혀 도움이 안 된다.
그런데 편향된 북한의 시각, 이른바 종족, 민족 시각으로 항일과 반제국주의(반미)를 행태로는 글로벌 시대에 한국은 발전, 번영할 수가 없다. 중공(당시)과 김일성이 일본과 싸워서 실질적인 효과를 얼마나 거두었으며, 또 항일투쟁으로 해방을 쟁취하였는가? 불행히도 전혀 아니다.
2차 대전 중에 미국의 참전을 두려워한 일본이 진주만을 먼저 공습하여 미국을 전쟁에 불러들였고, 미국은 일본을 항복시켜 그 결과로 일본으로부터 한국은 해방됐고,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다. 항일투쟁을 넘어 일본을 박살 낸 것은 중국도, 독립군도, 소련도 아닌 미국이었다. 그러니 따지자면 최고의 항일투쟁의 일등공신은 당연히 미국이다.
그리고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와 종족, 민족을 구분하지 못하면 그야말로 대한민국이 설 자리가 없다. 국가의 존재 이유, 목적, 그에 속한 국민의 권리와 의무가 헌법이다. 당연히 정부는 주권을 가진 국민을 위하여 헌법 등에서 정한 위임받은 일을 해야 한다.
막연한 감성적 접근, 소아병적인 해방 전·후 인식으로 현재의 한국을 다루려 하면 동떨어진 비현실적 생각이다. 따라서 의도된 세력에 의하여 꼭두각시처럼 감정적으로 반일감정에 부화뇌동하는 일은 나라에 도움도 안 되고. 자유 한국인으로서 적절한지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한다. 자유인이라면 말이다.
정치인들이 지지세력 결집과 표를 얻기 위하여, 또 중국의 이간질에 동조하여 한미일 공조를 깨려고 한일의 다툼을 부추기는 이른바 ‘토착 왜구’ 프레임에 그저 쫓아가는 것은 아닌지 다시한번 생각해서 판단해야 한다. 무조건적인 반일 행위가 과연 국익에 도움이 되는지 냉정하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자유인이다.
이상한 면만 교묘히 반복적으로 재미있고 시원하게 알려주는 방송과 유투브에 현혹, 세뇌당하고 있지는 않는지,
내 판단과 생각을 가로채려는 정치 세력으로부터 내 자유 의지로 빠져나와야 진정 자유인이다. 정치인은 끝없이 진영을 만들어 국민을 가두리 안에 넣어 편하게 관리하려 한다.그럴듯한 명분과 포장으로 만든 그 가두리 안에 갇혀서 내 자유의지, 내 생각, 내 목소리 없이 우르르 몰려다닌다. 군중 틈(뒤)에서 누가 선창 하는 소리에 힘차게(?) 복창하고, 영혼없이 악플에 문자폭탄을 하는 비자유인(정신적 노예)으로 살며 만족감을 느끼고 사는 것을 원한다면 어쩔 수 없다.
자유민주주의란 개인에게 끝없이 생각하고 판단할 사고의 근육을 단련할 것을 요구하는 체제이다. 그러려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고 적정선에서 타협하고 통합할 수 있다. 현대의 복잡 다변한 세상에서 필요한 ‘다원성’이 자리 잡는 세상이 된다.
요즘 친한 사람들끼리도 정치이야기는 아예 꺼내지도 못한다. 각종 사회 문제에 대하여 논리와 객관적 사실로 자유로운 토론이 되어야하는데 모두 그릇된 진영논리로 무장되어 담론이 없다.
누구나 알고 걱정하며 불편함을 겪고 있는 사회현상이다. 친구간, 가족간에 대화 조차 어려우니 나라가 통합될 리 만무다. 건전한 인간관계에도 고약한 독이 편가르기다. 정치는 말할 것도 없다.
편 가르기와 인기영합을 위한 포퓰리즘이 최근 한국에서 통용되는 이유는 바로 ‘보수’ ‘진보’나 ‘옳음’을 어떤 특정 정치 진영에 선험적으로 귀속시키고 자신의 판단을 모두 위임해버리는 경향이 심해서이다.
이는 한국은 영국, 프랑스 등 서구처럼 중세 세습, 봉건주의 시대에서 근대 자본주의로 가는 이른바 근대화 과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시민계층이 형성되어 시민, 노동자가 노동자와 시민의 권익 등 자유를 쟁취하는 과정이 없이 민주주의, 자본주의를 외래로부터 받아들였다.
시민이 생각하고 판단하며 공감하여 행동으로 나타낸 시민운동의 근대화 과정 없이 미국의 힘으로 일제로부터 해방되었다. 시대적으로 한국은 시민, 개인에게 생각하는 힘을 서구처럼 기를 기회가 별로 주어지지 못했다.
한국은 건국세대에 이은 산업화 세대 그리고 민주화 세대까지 우리는 압축성장의 부작용을 겪으면서까지 성장해왔다. 짧은 기간에 고도의 경제성장은 필연적으로 성장통이 나타난다. 독재와 민주화 같은 정치 성장통, 기업윤리와 노동윤리 충돌 같은 경제적 성장통, 부정부패와 반기업 정서 같은 사회적 성장통이다.
한국은 압축성장 성장통을 치유하면서 시민의식과 시민활동이 증가하면서 서구의 시민혁명 등 근대화 과정을 조금 부족하지만 어느 정도 수준으로 겪었다고 필자는 판단하다. 따라서 한국인도 이제는 진영논리에 함몰되지 않고 사안별로 성숙한 시민으로서 판단하고 행동해야 한다.
그래야 정치인들이 정신 차리고 올바른 정치를 하며 나라가 발전하고 후손들이 부강한 나라를 이어갈 수 있다. 한국의 머리좋은 정치인들은 한국 국민의 교양 수준을 늘 관찰하고 있다는 것을 국민은 냉정히 알아야 한다.
▲ 성인과 현인들 모두가 스스로가 주인이라고 하였거늘...
“조사(祖師, 한 종(宗)이나 한 파(派)를 처음 세운 승려)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는 임제 선사의 유명한 말이다. 조사를 관념으로 이해하고, 부처를 우상으로 간주한다면 쓸모없다는 뜻이다.부처님은 자기 자신에게 귀의(歸依)하며 법에 귀의하며 남에게 귀의하지 말아라. 스스로를 광명(光明)으로 삼고 법을 광명으로 삼되 남의 광명으로 삼지 말라고 했다.
“답(答)을 교회나 목회자에게서 구하지 말라. 스스로 찾으라. 당신 안의 신성(神性)을 회복하라. 당신은 대체 언제까지 교회가, 목사가 시키는 대로 살 것인가.” 2019. 12. 24. 성탄을 앞두고 길희성(76) 서강대 명예교수(대한민국학술원 회원)가 한국일보를 통해 꺼낸 이야기다.
4대 성인 중 한 명인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라고 하였다. 이 말은 사실 그리스의 "델포이 신전" 안의 기둥에 새겨져 있는 글귀인데 소크라테스가 몇 번 인용하였다. 내가 무지하다는 아는 것이 아는 것의 출발점이다. 무지(無知)의 지(知)다. 그래야 내 안에 있는 이성과 지혜를 꺼낼 수 있다.
최진석 교수는 노자 강의에서 인간은 불을 사용하고 기하학적 도형, 혈연, 상제, 덕(德)의 과정을 거치며 초월적 존재인 신(神)으로부터 멀리하였다. 그래서 도(道)라는 도덕 중심의 문명을 건설하기 시작한 인간이 역사의 책임자로 등장하였다. 인간의 생각으로 새로운 길, 인류문명을 만드는 것이다.
서구에서는 14세기~16세기 중세의 신(神) 중심의 암흑세계에서 인간성 해방을 통한 인본사상의 르네상스가 꽃피워졌다.
자유주의 아버지라 불리는 존 스튜어트 밀은 인류의 가장 큰 약점이 ‘검증되지 않는 신념에 자기 자신을 복속시키는 경향성’이라고 공언했다. 이 말만 유념해도 우리는 저열한 편 가르기, 나라 망치는 저열한 포퓰리즘과 횡행하는 포퓰리스트들을 이 땅에서 몰아낼 수 있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 라고 말하면서까지 초월적, 절대적 존재로부터 만들어진 기존 질서를 부정하면서 인간의 맹목적인 추종 행위를 비판하였다. 하물며 이미 검증된 낡은 이념과 이를 이용하여 국민을 갈라놓고 편 가르기에서 우리는 이제 모두 자유의지로 탈출하여야 한다.
성민 및 현인들도 이럴진대 자신의 자유로운 의지가 아니라 남이 의도적으로 만든 낡은 이념과 술수로 만든 진영에 갇혀있어서는 안된다. 어설픈 신념으로 그들이 지시하고 맹목적으로 따른다면 노예나 다름없다. 그 목줄과 울타리에서 벗어나 사안별로 자산의 교양 수준으로 자유롭게 판단하고 행동하여야 한다. 자신이 자유를 행사는 주인으로 사는 삶이다.
인간이 경계가 있다는 것은 신념과 이념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상태를 말하며, 통찰하는 사람은 바로 이 경계에 있는 사람이다. 결국, 설익은 신념에서 벗어난 '나'로 돌아가야 통찰력, 인문적 사고력이 생긴다.
그래야 친구와 이웃과 사회와 대화하고 발전하며 통합할 수 있고 인간다운 건전한 사회가 만들어지고 국가로 바로 서게 되는 것이다.
▲ 송백일기 중, 생각의 근육을 키우자
필자의 ‘페이스북 친구’인 법조인 강민구 님이 7월 30일 ‘송백 일기’는 편 가르기와 생각의 근육에 대한 글이다. 신랄하고 준엄하여 그대로 인용한다.“ 사람을 두고 내 편, 네 편 나누고 차별하는 인간들은, 근원적 트라우마나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자들이다. 원래 우주 시간을 뒤로 돌리면, 애시당초 너ㆍ나가 한 몸인 것을 인식 못 하는 소인배들이나 하는 짓이다.
지구에 생물이 최초로 출현한 태초의 시점에 무슨 너ㆍ내가 따로 구분되는가. 상생ㆍ공생ㆍ공화의 정신이 티끌만큼이라도 있다면, 내 편,네 편 나누는 것이 얼마나 허망하고 부질없는 짓거리인지 알 수 있지만, 이상한 자들은 근기가 모자라 그럴 생각ㆍ여유조차 없는 인간들이다.
세상이나 나라는 '너도 살고 나도 살자'는 정신을 갖춘 자가 이끌고 리더가 되어야 한다. '나만 살고 너는 죽어라' 식의 편 가르기 선수, 에고이스트가 이 세상을 개척하거나 리더가 될 수는 없다.
그럼에도 그런 인간들이 리더인양 설친다면 그것은 우리의 불행이자 그런 자들 자신이 필망 하는 첩경일 뿐이다. 정말 다들 생각 근육을 단단히 키워 세뇌ㆍ선동의 강물에 익사당하지 말아야 한다.” 멜 깁슨이 열연한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서 윌리엄 월레스가 잉글랜드와 싸우기 전 외친 자유에 대한 가슴 뭉클한 말이다. “저들이 우리 목숨 가져갈진 몰라도, 그들이 결코 앗아가진 못할 거라고, 우리 자유는!”
한국 역시 6·25 전쟁 등 숱한 고난 속에서도 무수한 피를 흘리며 자유를 지켜 왔다. 우리가 지금 누리는 자유는 결코 공짜가 아니다. 그런데 그 고귀한 ‘자유’를 그냥 진영에 갇혀 스스로 버리는 행위를 해서야 되겠는가?
진영에 갇히지 않아야 서로 공감할 수 있고, 다음에 통합할 수 있다. 당연히 포퓰리스트 정치인과 국익에 해가되는 포퓰리즘은 사라지고, 정치인은 국민을 따라온다. 그래야 통일도 한국의 번영도 미래도 있다.
<한경닷컴 The Lifeist> 박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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