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근대5종 첫날 펜싱 2위 맹활약…"내일도 돌아오지 않으니, 매 종목 최선을"
[올림픽] '이 순간, 돌아오지 않아' 장갑의 주문처럼…김세희의 인생 경기
특별취재단 = 5일 일본 도쿄의 무사시노노모리 종합 스포츠 플라자에서 열린 2020 도쿄올림픽 근대5종 첫날 펜싱 랭킹 라운드에 나선 김세희(26·BNK저축은행)의 팔목엔 한글 문장으로 보이는 어떤 형체가 눈에 띄었다.

자세히 보니 펜싱 검을 든 오른쪽 장갑의 팔목 부분에 손으로 꾹꾹 눌러쓴 듯한 문구가 선명했다.

'지금 이 순간은 절대 돌아오지 않는다'.
스스로 새긴 주문처럼, 돌아오지 않을 그 순간 온 힘을 다한 김세희는 이날 펜싱 35경기에서 24승 11패라는 호성적으로 전체 2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한 명의 선수가 펜싱, 수영, 승마, 육상, 사격을 모두 소화하는 종목인 근대5종에서 한국의 역대 올림픽 최고 성적은 남자부의 11위다.

그 주인공인 1996년 애틀랜타 대회 김미섭이나 2012년 런던 대회 정진화(LH)도 펜싱에서 2위에 오른 적은 없었다.

말 그대로 '쾌조의 출발'이다.

경기를 마치고 만난 김세희는 "24승은 제 국제대회 출전 최고 성적일 거다.

원래는 23승이 가장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며 웃었다.

[올림픽] '이 순간, 돌아오지 않아' 장갑의 주문처럼…김세희의 인생 경기
2019 아시아선수권대회 개인전 우승으로 도쿄행 티켓을 거머쥔 김세희는 세계랭킹 31위로 사실 이번 대회 메달 후보로 꼽긴 어려웠으나 생애 첫 올림픽 경기에서 선두권에 이름을 올리는 맹활약으로 한국 근대5종 최고 성적의 기대감을 키웠다.

그 원동력이 된 장갑에 쓴 메시지에 대해 묻자 김세희는 "일본에 오기 며칠 전 구멍 난 장갑을 바꾸며 쓴 글이다.

심리 담당 박사님이 뮤지컬 음악 '지금 이 순간'을 들어보라고 하신 적이 있는데, 그게 생각나 적었다"고 소개했다.

"오늘 이 경기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 있으니 후회하지 않게만 하자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평소 경기 직전 생각 정리가 잘 안 되는 편이었는데, 오늘은 버스를 타고 경기장에 오며 휴대전화에 해야 할 것들, 신경 쓰지 말아야 할 것들을 정리하니 마음이 편했다"고 귀띔했다.

이어 "긴장감은 모두가 느끼는 거고, 조급한 건 메달을 목표로 하는 세계 1, 2위 선수들이지 내가 아니라는 생각으로 나섰더니 침착하게 경기를 잘 풀어갈 수 있었던 것 같다"고 자평했다.

[올림픽] '이 순간, 돌아오지 않아' 장갑의 주문처럼…김세희의 인생 경기
이번 올림픽은 준비하는 모든 선수가 그 과정에서 난항을 겪었을 테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직접 걸려 지장을 받은 경우는 타격이 더 극심할 수밖에 없었다.

김세희도 그중 한 명이었다.

여러 국가대표 선수처럼 그 역시 유럽 지역에서 열린 국제대회에 출전했다가 확진돼 한동안 앓았다.

밝은 표정으로 경기 소감 등을 밝히던 그의 표정이 코로나19 얘기엔 잠시 어두워졌다.

"한국에 도착해서 3∼4일 정도 특히 많이 아팠다.

중간에 갈비뼈가 갑자기 아파 폐렴 의심 소견을 들었을 때는 많이 울었다"며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다행히 아무 이상이 없다는 진단을 듣고 이후엔 마음이 편해지더라"며 "운동을 하지 못할 땐 유튜브로 다른 종목 경기를 보면서 '이 선수들은 얼마나 힘들게 할까' 생각도 하고, 올림픽으로 가는 과정도 잘 정리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몸도 마음 모두 더 단단해진 뒤 밟은 올림픽 무대에서 데뷔전을 멋지게 치러낸 김세희는 6일 다른 종목 경기도 팔목에 새긴 그 주문처럼, '이 순간'만을 바라보며 치러나갈 참이다.

그는 "오늘은 잊어버리고 처음부터 한다는 생각으로, 한 종목씩만 생각하겠다.

내일도 돌아오지 않으니까, 진짜 최선을 다해보겠다"며 미소 지었다.

/연합뉴스